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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10월 말, 계절은 슬슬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여명프로젝트, 즉 '타카키노믹스'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타카키 소이치로 내각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금융시장의 완전개방을 내어주는 대신, 해외차관 금융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여명조약'을 채결했다.
타카키노믹스의 핵심은 정부가 양적완화를 진행하는 대신,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 함께 조절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HC투자를 재무성 고문으로 끌어들여 미국계 자본들의 안정적 시장 유입을 유도하는 한 편, 대대적인 통화완화 정책을 펼쳐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다만 타카키노믹스는 장기프로젝트로 시행되어 나갈 예정이었다.
총 5년에 걸쳐 통화시장 안정을 꾀한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목표였는데, 타카키노믹스를 총 5개 구간으로 나누어 시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1차 프로젝트는 통화완화정책의 시행이었다.
재무성은 일본중앙은행과 함께 대량의 자금을 풀기 시작했고, 미국의 대표적 투자세력인 HC라인이 슈팅스타 등을 이끌고 들어와 대대적인 국채와 민간채권을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천우가 투자한 금액은 총 4,700억 엔, 다만 이 자금을 달러화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통화전문가들은 이것이 사실상의 금융, 무역 스와프라고 평가했다.
일본금융시장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큰 이유는 이들이 전 세계 채권시장에서 가장 큰 점유율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일본에게 돈을 빌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마디로 일본의 돈을 끌어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당장이라도 채무상환으로 준비할 수 있는 돈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였는데, 미국이 이 시장을 뚫고 들어가 채권시장의 지분을 일부 틀어쥐는 것이었다.
다만, 미국에서 들어온 자본은 유출방지조약을 통해서 일본에 묶였고 반출에는 꽤 긴 시간과 엄격한 절차를 밟아야만 그것이 가능해졌다.
해서 일본은 미국의 돈을 차입해서 재정수익을 늘려주는 대신 자국의 화폐를 절하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타카키노믹스의 1주년이 되었다.
95년 5월.
타카키노믹스의 효과로 침체되었던 경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금융시장에 미국자본이 대대적으로 유입되면서 오히려 재정적 역마진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었는데, 오히려 일본계 자본시장에는 유례없는 풍년이 도래해 있었다.
천우는 이곳에 총 5천 억 엔을 투자하였고 세계 채권시장의 지분을 대대적으로 틀어쥘 수 있게 되었다.
김영실은 HC투자의 채권부문 수익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작년까지 수익률은 -5%까지 내려갔다가 올해 초, 회복세를 거쳐 +150%로 뛰어올랐습니다. 기록적인 등락입니다."
"증권수익은요?"
"기대이상입니다. 작년도대비 대략 2.5배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천우가 일본시장으로 들어올 때, 그는 타카키 소이치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허나 그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거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동원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인물도감 내에 분포되어 있는 타카키 소이치로의 인맥들 덕분이었다.
인맥을 검색해보니 타카키 소이치로는 꽤 많은 우방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계 인사, 러시아계 인사, 한국계 인사 등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그들은 금융계의 중추라고 할 수 있었다.
천우는 그 인맥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 믿고 초도자금 1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타카키 소이치로가 한, 중, 일, 러 관계를 정상화 시키고 갈등국면을 없애는 정책을 펼쳐 엄청난 경상이득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였다.
돈을 투자하자마자 수익률은 쭉쭉 오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천우는 HC라인을 총동원하여 채권사냥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채권사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정부가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재무성 투자고문으로 들어앉으니 이건 거의 노다지나 다름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친 타카키 세력으로 분류되어 돈만 들고 오면 무조건 프리패스였던 것이다.
허나 5개년 계획의 2분기가 되자,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생겨났다.
그건 바로 재정적자였다.
금융시장이 활황이었고 무역수지도 좋아졌지만, 작년의 타카키노믹스에서 너무 많은 재정투입이 있었던 것이었다.
타카키 소이치로는 천우를 불러들였다.
재무성 투자고문으로서 뭔가 대책을 강구해 주기를 바란다는 명목이었다.
허나 그건 명목일 뿐, 그는 천우에게 또 다른 거래조건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었다.
타카키 소이치로는 천우에게 두툼한 투자계획안을 꺼내놓았다.
[에너지 투자방안]
"이게 뭡니까?"
"말 그대로 에너지에 투자하겠다는 겁니다. 현재, 일본정부는 재정적자로 인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 되었던 범위입니다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네요."
투자방안을 펼쳐보니 그 안에는 러시아 천연가스와 중국 유전에 대한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나와 있었다.
다만, 그 방향성에 대해선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고 하였다.
"투자의 방향이 없다?"
"우리는 당신이 재무성의 투자고문으로 들어온다는 전제하에 여명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재정확보를 위한 2분기 역시 당신의 도움 없이는 프로젝트가 굴러갈 수 없다는 소리죠."
슈퍼보이를 이용해서 안정적으로 채권을 회수한 후, 그것을 일본 내에 묶어버린다.
그리고 이어진다는 계획이 그를 다시 이용해서 러시아와 중국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천우는 실소를 흘렸다.
"무서운 사람이시네요. 이렇게까지 계획적이라니."
"제가 무서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겁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계획성, 그것이 없다면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사실, 타카키 소이치로는 일본 내부 극우파들에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지지율은 이미 60%를 돌파했다. 게다가 그를 손가락질하던 극우파들마저도 이제는 불화타파 5개년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장기불황을 타계했다는 업적, 그것은 어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굳히기에 들어갈 차례였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와는 얘기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자금만 투여하면 됩니다."
"다만 적당한 파트너가 없을 뿐이군요."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타카키 소이치로는 이미 판을 다 짜놓았다. 그리고 외교관계를 회복함으로서 투자의 길까지 다 닦아둔 상태였다.
이제 천우가 세력을 끌고 계약만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데 천우가 그걸 못할 리가 없었다.
"일본계 금융권과 한국계 자본을 모집해서 세력을 만들겠습니다. 외교관계는 이미 회복되었으니 어려울 것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다리를 놓아드릴까요?"
천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아참, 당신은 원래 한국계 재벌이었지요?"
살아생전의 최충의가 천우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인맥이었다.
최근, 현보가 되살아나면서 그때의 인맥들이 다시 현보와 하나 둘 손을 잡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서 만약 슈퍼보이가 현보의 자손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예전의 인맥들은 아마 돈까지 싸 짊어지고 천우를 찾아오게 될 것이 분명했다.
***
한국은행 부총재 안유혁과 외환은행장 조석규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라···?"
"잘 지내셨죠?"
"허어! 설마하니 슈퍼보이가 현보가문의 장손이었을 줄이야!"
"그동안 공사가 다망해서 찾아뵙지를 못했네요."
안유혁은 예전의 경시대회를 뒤흔들었던 꼬마천재가 미국계 큰 손이 되어 돌아와 감회가 새로웠고 조석규는 조부와의 인연을 슈퍼보이와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안유혁은 최근 정권교체와 함께 한국은행 부총재로 껑충 뛰어올랐고 차기총재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조석규는 벌써 10년 동안 장기집권 할 정도로 외환은행 내부에서 입지가 굳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한국 금융계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천우는 우선 이들로 하여금 일본과의 공조기류를 만들어놓고 대대적인 인맥을 동원해서 러시아와 중국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이번에 일본이 조 단위 천연가스 투자와 유전지분 투자를 진행한답니다. 그쪽에서 판은 깔아놓았으니 자금만 투자하신다면 꽤나 괜찮은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인맥은 일본에서 자금은 한국에서? 그럼 기술력은 어디서 끌어 오는 건가?"
안유혁의 질문에 천우는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끌고 옵니다."
"미국산 기술력을···?"
"일부는 그렇겠지만 대부분은 국산 기술을 사용할 겁니다. 한국의 자원플랜트 부문 기술력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니까요."
"혹시 현보의···?"
"그것도 일부 만요. 나머지는 제 조고께서 남겨주신 인맥을 동원한다면 플랜트 산업을 아주 짜임새 있게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업계의 단합을 이끌어 내겠다?"
"기업계의 단합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합니다만, 결국은 그런 셈이죠."
"오호, 그런 청사진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군!"
지금은 과당경쟁으로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기업계의 단합을 일부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안유혁은 그리 생각한 것이었다.
한 편, 조석규는 이번 해외사업에 자신들이 차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조고에 이어서 그 자손까지 우리 외환은행에 큰 손이 되어주신다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그저 살아생전의 조고님을 따르는 것뿐인데요, 뭘."
허나 조석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과 스킨십을 계속 이어나가자면 뭔가 떡밥이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떡밥을 던지기 전에 안유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럼 한은과 HC는 이제부터 협력관계가 되는 건가?"
"그런 셈이죠.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와 자본시장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관계가 유지되겠지요."
안유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마침 시기도 적절하고 명분도 있군. 한국계 재벌의 미국 자본 유입이라!"
"잘 아시네요."
유서 깊은 서울토착세력의 장손, 그가 미국자본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생짜 미국인이 들어오는 것과는 아예 다른 얘기였다.
명분도 명분이지만 자본시장을 두드리는 느낌 자체가 아예 달랐다.
조석규도 이에 질 세라 다급히 입을 열었다.
"우, 우리도 돕겠습니다!"
"알아요. 당연히 그래주셔야지요. 외환으로 장사를 하는데 외환은행이 없으면 되겠어요?"
"하하, 그래요!"
"앞으로 많은 상품들을 기획해서 저희들을 좀 도와주세요."
"물론입니다!"
"아참, 그리고 예전에 제 조고께서 만들어주신 외환계좌 있잖아요. 기억하시죠?"
"그 특별계좌 말입니까?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거, 계속 쓸 수 있는 거죠?"
"그야···."
"그걸 법인계좌로 좀 변경할까 싶은데, 해주실 수 있죠?"
그저 단순히 외화장사를 하겠다고 만들었던 계좌를 대대적으로 개정해서 법인전용으로 돌리겠다는 생각, 단순해보이긴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서 외환은행에게 대대적인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조석규도 그리 해주고 싶었다.
허나 한 사람의 눈치가 보였다.
그가 옆으로 눈을 스윽 돌리니, 안유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이래서 할아버지가 인맥, 인맥 하신 거구나!'
지금까지는 절감하기 힘들었지만 한국으로 오니 세삼 실감이 났다.
최충의의 안배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3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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