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30.(2)
5월 중순.
타카키 소이치로의 초대를 받아 일본으로 온 천우는 스스로를 슈퍼보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크게 놀란 눈치였다.
허나 천우의 나이가 몇 살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슈퍼보이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일 뿐, 그가 10대의 대학원생이라는 대수가 아닌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카키 소이치로입니다."
"최천우입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타카키 소이치로는 매우 공손한 중년의 남자였다.
연배로 친다면 천우의 아버지뻘도 더 되는 사람이 꼬박꼬박 존대를 쓰고 있었으며 행실 또한 상당히 정중했다.
그는 천우를 소년이 아니라 국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허나 그의 이런 행동이 타카키 소이치로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듯이 그에게도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장님을 일본까지 초청한 이유는 HC가 일본의 구원투수가 되어주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투수라?"
"우리는 벌써 4년 째 불황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작년 중순, 우리는 한 차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미국의 WTO제소 등의 시비로 또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1년 후 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타카키 소이치로는 중소기업의 중흥과 금융시장의 쇄신, 대기업의 체질변화를 위한 사업기획 5개년 안을 내어놓았다.
이른 바 '여명 프로젝트'였다.
"일본의 제조 산업은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해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국가산업의 허리라 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죠. 또한, 부동산시장의 몰락으로 서민경제까지 타격을 받았습니다."
"흐음, 그렇긴 했었죠."
"저는 HC가 일본의 기업들과 손잡고 지금의 불황을 타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버블붕괴는 두 가지 외적인 요인이 존재했다.
한 가지는 미국의 일본압박, 그리고 두 번째는 국제결제은행과의 바젤 합의였다.
88년, 국제결제은행은 자기자본비율 대비 위험가중자산 비율을 측정하는 기준인 'BIS비율'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니까, 부실채권이나 대출과 같은 불안전자산에 대한 자기자본의 비율이 얼마나 높은가를 따지는 것이 BIS비율이었다.
이 합의가 있기 얼마 전, 일본은 미국의 87년 주가폭락사태인 '블랙먼데이 사태'에 의해 금리인하압박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금리는 2.5%대로 내려갔고, 그와 동시에 민간, 대기업들의 부동산과 주식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일본 은행가는 부실채권과 대출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져 BIS비율이 6%대까지 내려갔는데, 국제권고기준인 8% 이상을 유지하지 못하면 일본은 해외자본을 차입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하여 시작된 것이 대출금리 인상과 대출규제였다.
이 과정에서 버블이 붕괴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금융시장의 안정화가 일본산업의 중흥을 이끌어내는 정답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허나 천우의 생각은 달랐다.
"혹시 저를 통해 미국과의 스킨십을 늘려 불황을 타계하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외람되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 조언하고 싶습니다."
"···방향성이 틀리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안하는 올바른 대안은 무엇입니까?"
천우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왜 물어보는 것일까.
답은 딱 나와 있었다.
'엔화절하'
현재로서 가장 큰 문제점은 버블붕괴 이후에도 엔 달러 환율이 자꾸만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흑자폭을 내리라는 압박은 계속되고 있으니, 일본이 답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당장 일본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엔화를 절하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러자면 일단 투기세력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야금야금 일본의 금융시장을 먹어치우고 있는 천우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말을 한 바퀴 돌렸다.
"글쎄요. 아무튼 간에 국가정책에 사기업이 관여한다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 그건 그렇지요. 뭐,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다만···."
그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여명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치워버렸다.
그리곤 그 위에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안을 올려놓았다.
'여명프로젝트 2차 기획 및 수정안'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타카키 소이치로는 천우의 갸웃거림에 대한 답을 주었다.
"자,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작금의 무역마찰 시기에 무작정 경상수지 흑자를 위해 엔화가치를 낮춘다면 아마 일미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겠죠. 환율조작국으로 낙인이 찍혀 세계 무역계에서 퇴출을 당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양적완화 국면에 미국
계 기업이 참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통화완화 시기에 미국계 기업이 국채나 민간 채권 등을 적절히 매입해서 환율의 밸런스를 맞추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일본 내 미국자본비율이 높아지니 제 아무리 재무부라도 어쩔 수 있겠어요?"
"결국 이건 제 살 깎아먹기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천우의 제 살 깎아먹기라는 비판에 타카키 소이치로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이 일본을 쥐고 흔들겠다고 작정한다면, 차라리 허리에 밧줄을 함께 묶고 같이 흔들리겠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가 미소냉전을 통해 미국시장을 파고들었던 것처럼 미국이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얻는 것은요?"
"최소한 무역수지는 건질 수 있겠죠. 어쨌든 대일적자폭만 줄여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국 금융시장을 내어주고 무역수지를 이대로 유지해서 기업을 살리겠다···?"
"미국이 일본 재계를 그렇게도 장악하고 싶다면 내어주자는 겁니다. 다만, 그들도 우리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지요."
"만약 자금을 일제 상환하기라고 한다면요?"
"당연히 규제를 걸어야지요. 일본과 미국이 거의 자웅동체처럼 엮이도록 말입니다."
지금 미국에게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해서 스스로 미국을 끌어안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천우 입장에서는 그와 손을 잡기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천우는 장사꾼이다.
그의 이름을 보고 투자한 투자자들과 그를 따르는 금융세력 등으로 만들어진 HC를 이끄는 장사꾼으로서 반드시 이익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일본의 경제부양책 노선구축을 옆에서 도와준다면 그만한 수지타산을 챙겨야 한단은 소리였다.
허나 타카키 소이치로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일본 재무성의 공식 파트너로서 기업진단 및 투자고문으로서 계약하신다면 채권매입과 국채 등, 금융시장에 대한 제한을 사실상 없애드리겠습니다. 특혜로 친다면 일본계 기업들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거머쥐게 되실 겁니다."
"으음."
"나쁠 것 없는 제안이라 생각합니다만."
잘만하면 슈팅스타와 HC가 함께 일본의 금융시장을 통째로 쥐고 흔들 수도 있었다.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보다도 훨씬 큰 시장지배력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천우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으음, 뭐. 총리님의 말처럼 나쁠 건 없네요."
"그렇죠? 그리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건 있었다.
타카키 소이치로가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저 일본의 금융시장을 미국에게 가져다 바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중해야한다.'
일단 손을 잡긴 했다.
앞으로 천우가 일본 시장의 종주세력이 될 것인지, 반대로 꼭두각시가 될 것인지는 그가 하기에 따라 달려 있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우가 일본 금융시장의 지배자가 될 길이 열렸다는 점이었다.
***
4개월 전에 검찰청으로 붙잡혀 왔던 조의창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구치소에 있는 지금도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실거리며 다녔다.
-···속보입니다. 여야의 유력인사 12인에 대한 비자금 조성이 전직 대통령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김재성 기자가 전합니다···.
조의창은 혼자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여당세력에게 뿌렸던 자금의 출처와 함께 그 연대세력이었던 당시 야권인사들에게 주었던 비자금 내역까지 아낌없이 토해냈다.
그와 함께 이제는 범죄자로 거론되는 전직 대통령 두 명에 대한 폭로까지 해버렸다.
이는 87년 총선과 대선에서 그저 의혹으로만 끝났던 대통령 직속 비자금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해당 사건의 파장이 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당시에는 민주투사 야권인사들이었던 현 정권의 핵심인물들 덕분이었다.
당시, 야당의 유력 제야인사로 거론되었던 국회의원들 3인에 대해 대통령이 대가성 비자금을 건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야권세력의 중추가 사실은 뒤에서 전 여당의 집권을 도우며 지내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건 다시 말해서 민주야권 인사들이 대통령 독재를 옹호했다는 뜻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의창은 고소하다는 듯이 큭큭 거렸다.
"크흐흐, 이 새끼들아! 사람을 감옥에 가두면 모든 것이 다 끝날 줄 알았더냐? 에라이, 더러운 새끼들아!"
현직 대통령은 흔히 말하는 '운동권' 인사다.
자신의 우호세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여당의 중추세력들이 사실은 유신체제와 12.12정권의 하수인이었다는 사실에 격노 할 것이다.
조의창은 그들에게 비자금을 건넸던 장본인이었다.
그들에게 얼마를 몇 번에 나누어 어떻게 주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의창은 어떻게 해서든 감옥행만은 면할 줄 알았는데, 놈들이 정권교체와 함께 입을 싹 닦아버리니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이 죽자고 아예 폭탄선언까지 해버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최소한 철창신세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 와중에 현 여당의 중추세력 중 하나인 이명성이 찾아왔다.
이명성은 조의창과의 면회에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정계에 복귀시켜 줄 테니 비자금 사건은 그만 덮는 것으로 합시다."
"허참, 이미 신문사에서 대서특필까지 다 했는데 그걸 어떻게 덮습니까? 그리고 당신들의 각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각하는 우리가 설득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비자금 사건을 모르쇠로 일관해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허참, 웃기는 사람들이네. 이제 와서 협상을 하시겠다고? 나를 중수부에 가둬놓고 두들겨 팰 때는 언제고."
"···그때는 정권을 막 교체하던 시기 아닙니까. 어디 장사 하루 이틀 해봅니까?"
조의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됐습니다.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지."
"이러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재미는 니미럴, 사람을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뭐 어째?"
"말 가려서 하시죠."
"됐고, 돌아갈 때 엿이나 사 잡수셔. 내가 직접 먹여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이거."
이명성은 욕받이가 될 것이라고 이미 각오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허참, 사람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신당을 창당시켜드릴게요."
"신당···?"
"돈과 세력, 명분, 우리가 다 드릴게요. 그럼 어때요?"
조의창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 31.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