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57화 (57/202)

< 28.(2) >

천우가 80년대 후반에 미국에 묻어두었던 부동산이 미친 듯이 폭등하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낙후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었는데, 이것이 한 방에 크게 터져버린 것이었다.

이른 바 도시재생사업의 시작되면서 재개발 부지 인근 부동산이 폭등하였고, 그 자금은 다시 현금으로 전환되었다.

천우가 직접 건물을 지어서 수익을 거머쥘 수도 있었다.

허나 그는 임대사업에는 큰 뜻이 없었기에 오른 가격만큼만 돈을 받고 적당히 부동산을 처분해버렸다.

이 자금은 고스란히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갔다.

철을 비롯한 지하자원에 투자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최근 철강시장은 80년대 후반에 비해 상당히 고평가 되어 있었다.

아랍권의 개발과 중공, 소련의 해체 및 시장개방으로 인하여 철의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래도 10년 후의 가격과는 비교를 할 수 없었다.

만약 매수타이밍을 잡는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HC투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 중에서 영국인 지주를 둔 회사들만 골라냈다.

그런 후, 그들에게 대대적 매수 프러포즈를 건넸다.

최근 영국의 광산재벌들은 파운드화 폭락에 수지악화까지 겹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의 부동산 일제조사로 인하여 엄청나게 세금폭탄을 때려대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헐값에 나오는 소, 중 규모의 광산이 많았고 이는 영국 광산재벌들의 세금 돌려막기로 동원되고 있었다.

대대적 매수프로젝트의 첫 번째 손님은 로츠필드 사였다.

92년의 끝자락, 영국 로츠필드 가문의 광산 5개에 대한 인수협상이 진행 되었다.

이들이 내놓은 매물은 감정가의 70% 남짓이었다.

허나 HC투자는 다섯 개의 매물을 한꺼번에 현금으로 매입하는 조건에 65%를 붙여 넣었다.

협상대상자로 나온 해외투자본부 제 2팀장 마이클 비엘에게 로츠필드 컴퍼니의 CEO 알렉스 로츠필드가 말했다.

"···아무리 돈 가진 자가 이기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감정가의 5%를 더 깎겠다니."

"요즘 자금줄이 막혀서 장사에 차질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사업에 보태시라고 저희들이 도와드리는 겁니다."

HC투자는 이들의 맹점을 찔렀다.

광산을 운영하는데도 무역은 필요하다.

기계를 공수한다던지, 기존의 장비를 보수한다던지, 심지어 채굴 및 정재에 들어가는 화학품 등도 해외에서 들여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헌데 파운드화는 여전히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고 그것을 달러화로 환전해서 무역을 이어나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HC는 이 타이밍에 꽉 막힌 자금줄을 뚫어주고 당장 현금이 돌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장 갑갑한 국면이 해제됨으로 광산가격 5%를 인하해주는 것쯤은 상쇄할 수 있었다.

자금의 체증, HC는 그걸 뚫어주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었다.

알렉스 로츠필드가 초조해 보이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이었다.

허나 그는 짐짓 의연한 척을 했다.

"돼, 됐습니다. 그렇게 헐값에 넘길 바에야···."

"그래요. 정 찝찝하시다면 나중에 연락 주십시오."

"이, 이렇게 단칼에?"

HC는 급할 것이 전혀 없었다.

만약 이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면 다른 광산을 알아보면 된다.

돈이 급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알렉스는 되지도 않을 으름장을 놓아보았다.

"···협상의 도리도 모르다니, 지금 일어나면 다른 회사에게 광산을 넘기겠습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저는 그럼 이만."

알렉스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돈 많다고 아주 똥배짱을 부리는군. 제기랄!'

협상도 결국엔 돈 많은 놈이 장땡인 것이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현금부자 슈퍼보이의 회사에게 쓸데없는 어깃장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쯧쯧, 너희들 발등에 불 떨어진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디서 허세를 부려?'

마이클 비엘은 정말 단 한 점의 미련도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결국 로츠필드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좋습니다. 넘기도록 하죠."

마이클 비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 그것은 영업용 미소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광산 인수과정이 마무리되면 현금은 일제히 지급하겠습니다. 혹시 선금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매수자금의 70%를 먼저 받았으면 하는데요."

"선금을 70%나?"

"···안 됩니까?"

아쉬운 소리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로츠필드 입장에서는 안 되면 만다는 생각이었으나 HC입장은 '70%쯤이야'였다.

"되죠. 계약서 작성하면 곧바로 70%를 현금으로 쏴드리겠습니다."

"허어, 무슨 현금이···."

"계약이 문제지 현금은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 대주주는 돈이 많거든요."

HC는 현금을 동원하는 속도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송금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제외한다면 소요시간은 거의 제로.

로츠필드는 한 달 후에 추가계약을 맺자면서 손을 잡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업계에는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슈퍼보이보다 현금을 더 잘 주는 사람도 없다.'

엄청난 현금동원력과 시원시원한 지급.

HC는 로츠필드 이후로도 계속해서 막힌 목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대금지급을 무기로 영국계 광산들을 문어발식으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천우는 광산을 싼 값에 매입해서 좋고 영국계 재벌은 급한 불을 꺼서 좋았다.

그 결과, 광산업계에서는 '급매=슈퍼보이'라는 등식까지 생겨났다.

영국계 광산재벌들은 세금폭탄과 광산운영적자 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급전이 필요해서 급매를 하는데 시일이 한 달 이상 걸린다면 그게 어디 급매겠는가.

허나 천우는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곧바로 돈을 내어주었다.

다만 5%의 프리미엄을 떼긴 해도 이정도면 현금동원 방법으로는 거의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전문가들은 5% 프리미엄을 주고 급히 현금을 취하는 방식의 급매를 'HC매도방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93년 2월.

천우는 그동안 광산을 구입했던 총액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영국계 광산재벌들에게서 매입한 광산의 총액은 21억 달러 선이며 추가계약은 없습니다."

"으음. 생각보다 양이 좀 적네요?"

"요즘 중국 쪽에서도 자원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광산지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데, 워낙 그쪽의 손이 커서 지분이 쭉쭉 빨린다고 합니다."

이미 91년도부터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량의 자본을 투자하고 있었다.

영국이 부동산 비자금을 털어댄다고 난리를 칠 때, 중국은 지하자원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천우는 이 두 시장의 교묘한 틈을 파고 호주로 진출한 것인데, 그걸 중국이 귀신같이 캐치해냈다.

이제는 HC방식으로 인수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져버렸다.

"으음, 생각지도 못했던 경쟁자를 만나버렸네."

"이젠 시세가 꽤 올라서 작년에 비해 10%를 더 달라고 하는 실정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천우의 목표는 자원시장의 한 축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꾸준한 매입포지션은 천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허나 그보다 좋은 건 포인트를 잡아서 한 방에 몰아치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우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매입을 멈추세요. 어차피 부실채권은 또 쏟아져 나옵니다."

"부실채권이요?"

"영국계 부실채권이 나올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때를 기회로 잡도록 합시다."

김영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타이밍이 있을까요?"

"경제는 회복될 수도 있죠. 하지만 언제나 사건은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기다려보자고요."

앞으로 2년만 더 있으면 영국에 대량으로 부실채권이 생겨나게 된다.

영국계 은행 중 규모 순위 3위에 달하는 메가뱅크가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베오링스 파산 사건'이다.

영국에서는 베오링스 은행이 왕실의 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깊었으며 금융계에 대한 영향력도 컸다.

그런 은행이 파산한다는 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2년 후, 영국의 은행권이 파산할 것에 대비하여 초장기 투자를 감행하기로 했다.

"제가 아버지를 만날 테니 그 전에 기획안을 하나 작성합시다. 2년짜리 장기투자 프로젝트로요."

"어떤 테마로 말입니까?"

"영국 금융시장에 대한 골드러시,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일본 닛케이지수를 한 방 제대로 터는 것으로요."

"닛케이지수라!"

"가능하다면 홍콩과 대만도 같이요."

베오링스 파산으로 인해 영국의 금융시장이 출렁임에 따라서 일본도 큰 영향을 받았다.

홍콩과 대만 역시 파장이 컸던 것은 마찬가지.

아시아 금융시장에 대한 지분을 최대한 먹어치워 영향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 도래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침 슈팅스타는 세계 각국에 현지법인이 있으니 그들을 옆구리에 끼고 두 번째 골드러시를 감행한다면 재미가 꽤나 쏠쏠 할 것 같았다.

이쯤 되니 김영실도 이제는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천우는 어떻게 귀신같이 사건과 사고를 딱딱 맞추는 것일까.

"대표님, 외람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2년 후를 내다볼 수 있느냐, 그런 것이죠?"

"네, 그렇습니다."

내 안에 나노머신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천우는 이걸 약간 에둘러 표현하기로 했다.

"저는 시장의 흐름이 눈에 보여요. 그걸 읽는 것뿐입니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냥 자료를 읽고 그대로 투자를 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게 가장 대단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걸 전부 당장 해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론, 그녀가 평생가도 천우를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

92년 12월의 대선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삼영, 9선 의원이며 새로운 거대여당의 총재였다.

88년 총선 당시, 김삼영은 정민당과 손잡고 당을 흡수하여 새로운 거대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그 이후로 야당은 또 다시 3강 구도에 접어들었다.

헌데 92년 총선을 앞둔 직전, 이변이 일어났다.

거대여당 삼두마차의 핵심이었던 김용필이 탈당을 선언한 것이었다.

여당은 빠르게 분열되었고 마침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일제히 김용필에게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총선의 표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결국엔 여소야대의 구도로 다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

조의창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으나 총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삼두마차의 김용필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콰앙!

"빌어먹을!"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조의창은 속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지금의 이 정권은 거의 반쪽짜리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대여당이 분열하는 바람에 그의 발언권도 다소 약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천하의 조의창도 어쩌지 못하는 김용필이 야권 인사로 돌변하여 그를 압박하고 있지 않던가.

그는 92년 말에 현보를 치려 경제기획원과 접촉했으나, 현보가 은행관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틈을 파고들지 못했다.

안 그래도 저번 총선과 대선에 올인하는 바람에 자금줄이 말라붙어버렸다.

이대로는 집권세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여당세력이 분열되어 오히려 돈을 먹일 구석이 받을 구석보다 많아졌던 것이다.

허나 현보의 수술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허무한 상황.

그는 마지막 수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놈이 미끼를 물어야 할 텐데.'

아예 하루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버린 그는 곧장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서 접선한 상대는 아베 노보루.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럽던 아베 노보루는 한국에선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독도문제에 대해선 이미 일본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을 텐데요."

"압니다. 제가 찾아온 건 독도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같이 아르바이트 좀 해보자고 제안하러 온 겁니다."

"아르바이트? 우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슈팅스타에 거하게 한 방 얻어맞아서 용돈통장 빼앗기셨다고 들었습니다."

"···뭐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아베 노보루는 화들짝 놀랐다.

'뭐야, 안기부라도 동원했나?'

그 출처가 어디이건 간에 아베 노보루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 28.(2) > 끝

ⓒ 풍류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