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
조모 오금자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천우는 아버지와의 시간을 가졌다.
오금자, 최호명 모자가 만나서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워낙 내외하는 사이라 별 수가 없었다.
천우네 집 근처에는 사우나가 딸린 모텔이 하나 있다.
한국의 대중목욕탕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그냥 증기식 사우나가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사우나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천우는 최호명에게 오금자와의 상봉을 종용해보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심란할 사람은 최호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빠, 얘기 들었어요. 투자고문을 맡기시겠다고요?"
"그래. 벌써 얘기가 들어갔냐?"
"헤헤, 물론이죠! 그런데 왜 굳이 서면이에요? 그냥 아침에 하나씩만 물어보시면 될 것을."
"기업과 기업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아. 집에서야 부자지간이지만 바깥에서는 엄연히 사업가와 사업가의 관계 아니냐."
"으음, 그런가?"
"아무튼, 정식으로 너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구나."
천우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우리 회사의 요율은 좀 비싼데요? 리스크가 큰 사업일수록 수수료가 더 올라가는 거 아시죠?"
"깍쟁이 같은 놈. 얼마나 받으려고 그러냐?"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차라리 회사 간에 주식 교환하고 김영실 부사장님을 투자고문 사외이사로 보내면 되잖아요."
"하긴, 법적으로 사외이사의 제한범위는 직계존속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야."
"김영실 부사장님을 사외이사로 보내는 대신 제가 뒤에서 원격으로 투자고문을 해드릴게요. 대신 회사 간의 주식을 교환함으로서 수익을 약간씩 공유하는 거죠."
꽤나 괜찮은 조건이었다.
허나 최호명은 투자고문 수수료를 받는 대신 뭔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으음, 보자. 그렇다면 내가 HC투자에게 옵션으로 일본계 회사의 주식들을 좀 챙겨줄까?"
"옵션이요?"
"앞으로의 수수료를 생각하면 그 돈이 엄청날 것 아니냐. 어차피 주식을 서로 교환해서 이익을 공유한다는 것도 등가교환일 뿐이잖아. 그러니 우리가 매입해두었던 부실채권 중에서 괜찮은 것을 네게 주려는 거지."
"오호, 그거 참 좋은데요?"
"그럼 앞으로 어떤 부문에 투자하고 싶냐? 소재부문 말고."
"일본하면 게임 산업이죠!"
"게임 산업?"
"요즘 제가 미국과 한국계 IT회사와 게임회사에 투자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세요?"
"당연하지. 나도 신문으로 HC에 대한 기사를 보니까."
"지금의 게임이라고 한다면 오락실에 있는 비디오게임이나 콘솔게임 정도잖아요? 하지만 앞으로 IT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시장도 글로벌화 될 거에요. 컴퓨터나 게임기를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게임을 즐기는 거죠."
"호오, 꽤나 미래지향적인 생각인데?"
"헤헤, 그렇죠? 한미일의 기술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언젠가는 게임계의 르네상스가 열리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대한민국의 강점이라면 엄청난 집념이다.
80년대 한국의 통신기술은 이제 막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다.
헌데 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은 변화의 바람을 맞이한다.
한국계 대기업들이 이동통신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엄청난 양의 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한국의 이동통신은 결국 전 세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는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
2000년 이후의 한국 인터넷은 전 세계 1위, 미국에서 하청이나 받던 나라에서 인터넷시장을 주도하는 나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한 강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게임강국으로서 전 세계 E-스포츠 시장을 견인하는 종주국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허나 천우가 있다면 미국과 일본, 한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한마디로 전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게임계의 큰 손이 태어나는 셈이었다.
최호명은 천우를 힘껏 밀어주기로 했다.
"좋다. 내가 투자고문을 받는 대신 지금까지 매입한 부실채권 중에서 게임과 관련된 지분을 모두 너에게 넘기마."
"전부 다요? 그건 너무 많은데···."
"아니야. 나는 너의 비전에 투자하고 싶어. 다만, 나중에 네가 게임지주회사를 차려서 나에게 지분을 나누어주렴."
"게임지주회사!"
2010년대의 게임회사들은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시가총액이 55조가 넘는 게임회사까지 생겨날 정도였으니, 그 시장의 규모가 얼마인지는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천우는 최호명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네, 좋아요. 게임지주회사를 설립해서 지분을 나누어드릴게요."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파트너."
"헤헤, 별 말씀을."
사우나 협상을 끝낸 후, 부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한희연이 김치찌개를 끓여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최호명은 눈을 번쩍 떴다.
"어라?! 이건···."
"어머님께서 어제 배달 업체에게 오늘 날짜로 김치를 보내달라고 의뢰해 놓으셨대요."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비록 미국에서 오긴 했어도 오금자는 남편과 아들들의 입맛에 맞춰서 한식을 배우고 김치 담그는 법을 익혔다.
처음부터 잘 담근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수 십 년의 내공이 쌓여서 어지간한 식당 김치보다 더 맛이 좋았다.
물론, 최호명에겐 맛보다는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이 김치일 것이다.
결국 그 역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군대, 대학,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살았던 시간 동안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건데 이거."
"맛 좀 보세요. 천우 너도 앉아."
오랜만에 집에 한식냄새가 도니 천우의 위장이 제 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꼬르르륵!
"간만에 진짜 한국 음식 좀 먹겠네!"
사실, 천우는 미국에 와서 몇 번이고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음식이 입에 너무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천우는 중년이었고 환생을 한 이후에도 쭉 한식을 먹었기에 미국음식은 다소 입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천우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밥을 먹어치웠다.
"역시! 할머니 김치는 치트키라니까!"
"치트키?"
"맛있다고요!"
"그래, 나중에 할머니께 감사전화 좀 드리렴."
허나 최호명은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가 보내준 김치를 먹을 자격이 있나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화를 드린 적이 없었다.
전화는 천우가 알아서 하니 자신은 불편한 마음에 아들 뒤에 숨어서 지냈던 것이다.
"···음."
"드세요. 어머니가 손수 보내신 거잖아."
"그래."
최호명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국물을 한 수저 떴다.
후룩!
그러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때론 음식 한 수저가 사람을 울리기도 한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맛있네."
"아빠, 정말 맛있죠?!"
"응. 맛있어."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차오르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먼저들 먹고 있어."
한희연은 굳이 최호명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건 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왜 화장실을 가는지 두 모자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HC투자가 한국계 기업에 대한 본격적 투자를 시작했다.
이들은 반도체와 통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일전에 천우가 투자해두었던 전자부문의 지분은 그대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HC는 게임지주회사인 미스릴 글로벌을 출범시켰다.
지금까지 HC가 투자해온 게임, IT회사들의 지분을 일제히 이곳에 집중시키고 추가적 자본을 투자하도록 한 것이었다.
미스릴 글로벌은 한국계 게임회사들을 차례대로 돌아다니며 투자제안을 시작했다.
미국계 자본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슈였으나, 미스릴 글로벌의 행보에 전문가들은 상당히 의외라는 평이었다.
이들은 대기업의 소프트웨어를 하청 받아서 작업하는 중소기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제 막 게임프로젝트팀을 꾸려서 개발에 착수한 정도, 아직 게임으로 변변한 수익을 올리는 것도 아니었다.
HC투자 금융투자본부의 제 2 본부장이었던 엘리사 심슨은 미스릴 글로벌의 CEO로 발령받았다.
그녀는 슈퍼보이의 지시에 따라서 그가 적어준 회사들과 차례대로 접촉하고 가능하다면 전격 인수도 진행할 계획이었다.
엘리사 심슨은 소프트웨어 회사 넥스트를 찾아갔다.
넥스트의 대표이자 수석 프로그래머인 김정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 굴지의 회사가 왜 굳이 이런 후미진 회사까지 찾아와서 투자를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용산 뒷골목에서 시작했다고 미래까지 우중충한 건 아니죠."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최근 아산 자동차의 웨브서버를 구축해주고 있다면서요. 그 하청으로 받은 돈으로 게임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요?"
"그렇긴 하죠."
"우리가 그 프로젝트에 투자하겠습니다."
그녀는 김정수에게 한화 50억을 내어놓았다.
김정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그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이,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요?"
"별다른 의미 없습니다. 그냥 투자를 하겠다는 것뿐."
"아예 회사를 통째로 사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만약 파시겠다면 인수할 의향도 있습니다. 물론, 대표이사 자리는 당신께 돌아갈 것이고 임직원들 역시 그대로 계속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그게 우리의 조건이기도 하고요."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엘리사는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이해가 안 갈 겁니다. 도대체 왜 우리인가, 맞죠?"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저 역시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제야 김정수는 HC투자의 인재 발굴 방식에 대한 얘기를 상기시켜냈다.
슈퍼보이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찍고 그에게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선견지명 때문.
"우리의 가능성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로군요."
"잘 아시네요. 대주주께서는 당신들이 언젠가는 게임으로 사고 한 번 제대로 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고 또 어떤 회사와 접촉하고 있나요?
"미국의 블루저드 사와 AE사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및 지분인수를 끝냈습니다. 블루저드 사 같은 경우엔 미스릴 글로벌에 합류하겠다고 밝혔죠. AE사는 이제 우리가 2대주주입니다."
"호오···."
"더 알려드려요? 일본계 비디오게임 업체들도 꽤 있습니다만."
김정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HC라는 괴물의 등에 올라타 앞으로 쭉쭉 뻗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약간의 고행과 함께 독자노선을 걸을 것인가···.
허나 답은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좋아요, 투자를 받도록 하죠. 하지만 우리의 프로젝트가 어떤 방향으로 가든 대주주께서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게임에 관해서는 당신들이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돈을 굴리는 사람들이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이 돈으로 어떤 결과를 내든, 그건 당신들 하기에 따라 달린 것이지, 우리의 소관은 아닙니다."
천우의 철칙 제 1번.
자회사, 혹은 투자회사에 대해선 그 어떤 경영압박도 가하지 않는다.
단,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제대로 된 비전을 가지고 있을 때만 말이다.
"당신은 도덕적이고 비전도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자금은 우리에게 맡기세요."
"그렇다면 50억 이상의 자금도···."
"물론, 지원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자회사라면 우리의 돈이 곧 당신들의 자본이 되는 셈입니다."
김정수는 뭔가 속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것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것이 뭘까.
잠시 후, 마침내 그는 그 정체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건 바로 거대자본이 주는 카타르시스였던 것이다.
< 28.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