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
27.(2)
오랜만에 조손간의 정다운 시간이 이어졌다.
오금자 조손은 시애틀의 숨은 맛집들을 찾아다니면서 식사도 하고 디저트도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항상 천우가 걱정이었다.
"학업과 사업을 병행하면 힘들지 않니? 최근에는 CIA의 고문직도 수임했다면서."
"괜찮아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뭘."
"일도 좋지만 적당히 쉬어가면서 하려무나."
"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도 오금자는 건강상태가 아주 좋아서 당분간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천우 때문에 요즘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
조부를 여의고 난 후, 천우가 상당히 우울해 하던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모까지 여읜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페이스가 흔들릴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조손은 시애틀 중심가를 한 바퀴 돈 후,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랜만에 함께 침대에 누워서 영화도 보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천우는 불현 듯 숙부에 대한 얘기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작은아빠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아직 감옥에 있지. 이혼 후에 충격을 좀 받은 것 같은데, 아마도 출소 이후에는 회사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 같아. 나름대로 염증을 느낀 것 같더구나."
회장 자리에 앉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숙부가 저리 망가진 것을 보니 쌤통이다 싶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향한 집착.
일그러진 욕망의 말로가 숙부처럼 좋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면회를 가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던데, 아무래도 네 아빠가 경영정상화까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무작정 지분을 놓아버리면 안 되잖니."
"머리를 깎는다고요?"
"출가 이외엔 마음을 다잡을 길이 없다나?"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천우는 그리 상상했다.
어쨌건 현보는 이제 완벽하게 최호명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남은 건 과연 어떻게 현보와 이어진 끄나풀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태어나느냐였다.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이 정말 많을 것 같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천우에게 오금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 할미가 왜 이렇게 갑자기 미국으로 온 건지 궁금하지 않니?"
"헤헤, 저는 그런 건 안 궁금해요. 할머니도 보고 좋잖아요."
"그래, 그래. 우리 이 할미도 우리 강아지를 보니 좋긴 하구나."
나이를 먹어도 손자는 손자고 조모는 조모다.
그녀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손주 밥이라도 한 끼 해주고 싶어 온 것도 있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단다."
"어라? 저는 할머니가 저를 보고 싶어서 오신 줄 알았는데."
"호호, 그래. 보고 싶었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이거였어."
오금자는 핸드백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어서 천우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오늘따라 할머니의 핸드백이 약간 무겁구나 싶었다. 아마도 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천우는 서류뭉치를 받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요?"
"얼마 전에 영국의 정권이 교체되면서 부동산 일제조사가 있었잖니. 알고 있지?"
"물론이죠. 대처가 물러나면서 일어난 일종의 정치보복성 공격이라고들 하던데요."
영국은 자금세탁의 일번지로 유명할 만큼 런던 뒷골목 검은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영국 정부가 큰마음을 먹고 수술대에 올려도 검은돈은 10~20년 안에 청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은 대대적인 부동산 조사에 착수했다.
정치비자금을 털어내겠다는 안건이었는데, 이는 떨어진 국민들의 신뢰를 다시 되찾음과 함께 대처리즘의 잔존세력을 일거에 불사르겠다는 의지였다.
그 결과야 어찌되었건 간에 이번 사건이 천우와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보수당은 주로 신탁회사의 부동산들을 조사하고 다녔잖니."
"그렇죠. 신탁에 대한 취득세와 양도세 등에 폭탄을 때려서 정치자금 줄을 끊어버리겠다면서요."
"그래. 헌데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여기서 우리 가문의 재산이 발견되었다는구나."
"허어? 신탁회사에서요?"
"글레스터 신탁투자라고 들어봤니?"
"아아! 알아요. 200년 쯤 된 회사라고 하던데."
"그래, 맞아. 전통도 깊고 규모도 크지. 그 글레스터 신탁투자에서 한양 최 씨 일가의 이름으로 된 신탁을 가지고 있다가 이번에 해지하게 된 거야."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꿀꺽하려고 지금까지 신탁을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일까요?"
오금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탁은 법적으로도 영향력을 갖지만 회사에 대한 신뢰도와도 관련이 있단다. 아마 만약 그랬다가 한양 최 씨 일가에서 이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장사를 접어야하지 않겠니?"
"하긴, 그건 그러네요."
"아마도 상속세 부분 때문에 그런 것 같더구나."
"상속세요? 신탁을 오래가지고 있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신탁이 등록된 시점은 1차 세계대전 직전이라는 구나. 그 당시에 영국정부가 100만 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신탁하고 채권으로 묶어 일정기간 이상 보관하면 상속세를 면제해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나봐."
"아아, 군비 때문에요?"
"그런 셈이지. 그밖에 내부기업에 대한 정부의 부채문제도 좀 있었고 해외차관도 갚아야하니까. 아무튼 그 시점이 이제 막 지나서 신탁을 해지하려 하니 뜻밖에도 양도세와 취득세의 폭탄이 터진 거야."
"아아, 일제조사 때문에!"
"정치자금을 끊어낸다는 명목 때문에 우리 가문이 피해를 입게 생긴 거지. 그래서 나름대로 글레스터에서 머리를 써서 신탁을 유보하려다가 발목이 잡힌 거야."
"그럼 상속세는요?"
"법적으로 상속세는 면제처분을 받을 것 같아. 하지만 양도세와 취득세 등은 어쩔 수 없이 내야할 것 같아."
"으음, 그렇군요."
서류뭉치를 열어보니 신탁등기가 천우의 앞으로 해지된다고 적혀 있었다.
신탁등기는 호적상, 족보상, 대외적으로 한양 최 씨의 장손인 자에게 신탁이 해지된다고 되어 있었기에 천우에게로 재산이 돌아온 것이었다.
"어라? 제가 상속자로···."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너를 장손으로 세우고 대외적인 비즈니스에 데리고 다니셨잖니. 그게 상속법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것 같아."
"허어, 설마하니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다 예상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다만 손자에게 집안의 가산과 이름을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이겠지. 아무튼 간에 신탁은 네게로 넘어올 것이고 성인이 되는 시점인 만 18세에 유동화가 가능하도록 설정된 것 같아."
"성인이 되는 시점이라면 한 5년쯤 남았네요."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재산의 규모는 얼마래요?"
"글쎄. 그건 신탁이 해지되는 순간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동안 신탁투자로 묶여 있던 돈을 전부 회수하자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거든."
사실, 돈이 얼마나 되었든 상관없었다.
천우는 앞으로 이 재산은 대대손손 물려지도록 만들어 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규모가 궁금하긴 했다.
'설마, 조상님들이 금을 땅이 아니라 채권에 묻어두셨나?'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
현보 그룹의 구조조정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8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왔던 유럽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여겨졌던 동유럽 거점과 서유럽의 공장단지를 전부 철거하고 부지를 일제히 매각했다.
일각에서는 현보가 유럽진출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허나 실상은 달랐다.
최근 미국과의 무역마찰로 인한 수지악화 및 원화절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시장을 집중공략하기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처음 현보가 유럽시장으로 투자했던 자본을 회수한다고 선언했을 때, 이사회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반발은 한 방에 정리되었다.
바로 블랙하워드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현보는 현재 사실상 은행관리 수순에 들어가 있었고 조만간 대주주를 슈팅스타로 전환한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현보는 미국계 자본과 아주 깊숙하게 엮인 한국계 재벌이 되는 셈이었다.
부채정리라는 대외명분과 유럽시장진출의 엔진을 정비한다는 실리, 두 가지를 모두 취하는 방향으로 블랙하워드가 현보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슈팅스타 회장 집무실로 보고서가 올라왔다.
"회장님, 지시하셨던 영국과 프랑스의 공장부지 후보입니다."
"으음."
최호명은 블랙하워드의 자본으로 현보를 영국과 프랑스에 뿌리박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최근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임금이 점점 오르고 있는데다 물가까지 상승세라서 유럽시장의 수지가 계속 악화 국면이었다.
게다가 파운드화 안정을 위해서 통화완화가 실시되었고, 이는 즉각적인 인플레이션과도 직결되었다.
결국 긴급 진화로 파운드화는 냉각되었지만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찾아온 것이었다.
최근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시행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불황을 타계할 방법은 마땅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80년대의 과도한 자유정책으로 인한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가 걸프전으로 인해 폭발하면서 영국은 한 차례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과 사정은 마찬가지.
결국 두 국가는 해외자본유치 정책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첩보가 최호명에게 들어온 것이었다.
최호명은 실무진에게 HC투자의 대외 유럽정책의 방향에 대해서 물었다.
"천우네 회사가 대 유럽 정책노선을 어떻게 가지고 가고 있죠?"
"파운드화 선물환 거래를 통해 대량의 현물을 확보한 이후, 그것을 북부 부동산에 투자했습니다. 파운드화 폭주이던 시절에는 대량의 채권을 매입했다가 최근 채권가격이 오르자, 그걸 빠르게 매각해서 금융권에 재투자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녀석이군. 아예 환율을 가지고 놀고 있잖아?"
어떤 시장이든 호재가 터질 기미가 보인다 싶어서 발을 담가보면 이미 HC투자가 먼저 선수를 치고 있었다.
그건 아무리 슈팅스타의 정보력이 신장되어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최호명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대놓고 아들에게 좀 기대어볼까?"
"어떻게 투자할까요?"
"녀석을 따라서 투자하세요. 그리고 천우에게 공식으로 투자고문에 대한 제안서를 보내세요."
"그쪽 수수료가 좀 비싼데, 괜찮으시겠어요?"
비서진이 웃으며 말하자, 최호명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로비를 좀 해보죠 뭐."
"아드님에게 로비를 하신다고요?"
"사우나 좀 하면서 꼬셔봐야죠."
아직까지 두 사람의 비즈니스라고는 부자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식이 전부였다.
허나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천우의 몸값은 이제 그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정도가 아니던가.
사외이사도 생각을 해봤지만 엄연히 혈족인데 그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해서 최호명은 HC를 공식적인 투자고문으로 묶어 슈팅스타의 곁으로 끌고 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간의 로비를 해줘야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흐음, 녀석에게 뭘 주면 좋아하려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웃음이 났다.
살다보니 아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로비를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뿌듯하면서도 하늘에게 감사하게 되는 최호명이다.
'이렇게만 자라다오.'
이제 다른 소원은 없었다.
그저 아들이 이대로 반듯하게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27.(2) > 끝
ⓒ 풍류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