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아사다 준이치로는 유미영의 제안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뭘 어쩌라고요?"
"간단해요. 그냥 투자요건을 조금 더 느슨하게 해달라는 것뿐이잖아요."
"아니, 요지는 그게 아니잖습니까! 이정도면 거의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잖아요!"
80년대의 일본은 EC에게 아래와 같은 요건들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엔화의 국제와, 금리의 자유화, 금융상품의 탄력적 확대, 금융자본 시장의 확충, 대일직접투자의 제한환화.
이는 사실상 시간이 흐르면서 국제정세에 맞게 변형이 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대외자본에 대한 규제 허들은 생각보다 높았다.
슈팅스타가 내놓은 협상안은 자사의 신용등급을 AAA+로 격상시키고 블랙하워드 뱅크의 계열사들을 일본에 대대적으로 상륙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AAA+ 등급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외국계 상업은행에 걸려 있는 규제를 풀고 약간의 우대를 해달라는 것이 유미영의 주장이었다.
아사다 준이치로는 이것이 결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윽박을 질렀다.
"일본 10위의 은행을 붙잡는 대신 블랙하워드 은행을 들여오라고요? 이미 당신들이 긁어모은 일본 내 부실채권이 얼마인데 여기서 더 영향력을 높여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기업이 이익을 좇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득이 되는 시장에 진출하겠다는데 그게 잘못된 건가요?"
아마 이대로는 그녀를 말리지 못할 것이다.
법망이 보호하는 하에서 기업이 기업을 합법적으로 인수한다는데 과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만약 이들이 지금의 인수합병을 물리적으로 간섭하려 든다면 한창 해외로 뻗어나가고 있는 일본의 채권시장은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었다.
아베 노보루는 가만히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불현 듯 말했다.
"일, 미의 외교문제가 불거진다면 당신들이 책임을 질 겁니까?"
"외교문제요? 은행권 하나 인수하는데 무슨 외교문제?"
"동경은행은 여신비율 중 민간, 중소기업의 비중이 가장 높은 회사입니다. 이들을 미국으로 끌고 가겠다는 건, 미국이 일본 민간자본을 사실상 침략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허참, 비약이 좀 심하시네요."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만."
설마하니 그걸 모르고 일본으로 상륙했을까.
유미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협상을 하라고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면 당신들도 편하고 우리도 편하잖아요."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군요. 굳이 우리가 물리적으로 개입해야 한 발 물러서겠습니까?"
일본이 슈팅스타와 직접 접촉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3개월 전, 전략기획회의를 통해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들은 수 억 달러의 인수자금을 동원하는 동시에 그들을 찜 쪄 먹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저들의 맹점은 무엇이고 어째서 당장 협상에 나올 것인가도 계산해두었다. 그리고 협상대표로 나올 예상인물들에 대해서도 분석해 둔 상태였다.
만약 저들이 물리적으로 개입을 시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그냥 손을 놓으면 된다.
"좋아요. 그럼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게요. 은행인수는 없었던 것으로 하죠."
"이제야 말이 좀···."
"대신 우리는 일본에서 철수합니다."
"철수한다고요?"
"네, 아예 철수하겠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건 그냥 협박이잖습니까."
최호명은 일본계 자본시장이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차근차근 투자를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90년도에 경제위기가 발발하자마자 빠르게 부실채권을 매입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기업, 기관, 심지어 민간에 이르는 폭넓은 채권이 매입되었기 때문에 민간부채비율이 높은 은행권의 지분까지도 한 방에 흡수가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슈팅스타가 미친 척 하고 손절에 나선다면 뿌리부터 일본이 통째로 흔들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정당하게 자금을 투여해서 회사를 인수했는데 당신들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니 발끈하지 않겠어요?"
"거의 막 나가는 수준이로군···."
"그러니까 애초에 상대를 존중하면서 협상을 준비했어야지요. 발등에 불 떨어지니 속옷 바람으로 달려 나오면 쓰나요?"
아마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슈팅스타가 일본의 민생을 잡고 늘어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허나 그건 아베 노보루의 주장일 뿐이었다.
'쯧, 그러니까 누가 은행권 가지고 장난치래?'
88년, 부동산회사인 리크로 코스모의 미공개 지분이 일본 정치인들에게 넘어간 정황이 밝혀졌다.
28명의 정계인사들에게 리크로 코스모의 지분 12만 5천 주가 돌아갔고, 그에 이어서 88년까지 증자된 지분 76만주가 각계 인사 88명에게 돌아간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힌 것이었다.
이른 바 '일본 형 5공비리'라 불리는 리크루 사태였다.
이 사태로 일본의 전, 현 총리를 비롯한 전 현직 내각들이 줄줄이 딸려나갔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아베 노보루의 부친 린타로였던 것이다.
아베 린타로는 주민당의 제 2 파벌인 방계 우파의 수장으로서, 이 사건을 통해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수순을 밟게 되었다.
허나 정계를 떠난 이후에도 제 2 파벌은 건제하였고 주류파벌인 온건우파를 누르고 점점 실세로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미영은 최호명의 지시로 일본 금융계 부실채권을 매입하던 도중, 뜻밖에도 아베 노보루의 차명계좌가 동경은행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인수를 위해서 부실채권을 매입하고 그에 대한 내실조사를 벌이다가 이곳에 10조 엔 대의 차명계좌가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뒤를 캐다보니 제 2 파벌의 비자금루트까지 딸려 올라온 것이었다.
최호명은 어차피 동경은행은 인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저들이 정계의 심장부를 그냥 내어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짐짓 모른 척하며 뻗대면 꽤나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뻔뻔한 놈, 민생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앞으로는 민생을 운운하지만 사실은 그저 비자금줄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방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대로 협상에 응하면 결론적으로는 아베 노보루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베 노보루는 아버지 린타로의 뒤를 이은 강경주의, 그러니까 극우파 세력의 중추세력 중 하나였다.
독도영유권 분쟁부터 중국,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까지, 일본이 대외적인 외교노선이 이토록 꼬여버린 원흉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베 노보루와 같은 사람들이 득세하는 한 앞으로도 이와 같은 사태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 뻔했다.
아베 노보루는 협상의 차선책을 제시했다.
"당신들의 요구의 일부를 수용하겠습니다. 다만, 100% 모두 다 수용한다는 건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협상에 응해주시죠."
"그럼 옵션을 더 붙여주셔야죠."
"세금인하는 어떠십니까?"
"세금인하?"
"각종 세금의 현재 비율을 25% 이상 삭감해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계산기를 꺼내더니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암산과 계산기를 이용한 방식으로 기업인수로 얻는 이익과 세금인하로 얻는 이익을 비교한 것이었다.
유미영은 결과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보셨어요? 우리가 세금인하를 받는다는 가정 하에 인수를 포기할 경우, 무려 손해액이 3000만 달러나 된다는 걸 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세금인하는 어떻죠? 그 절반도 안 되죠?"
"···애초에 민생을 등골을 빨아먹겠다고 빨대를 꽂은 잘못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허어, 말이 좀 심하시네요. 우리가 자금을 일제히 회수하면 자국에 피해가 간다면서요. 그런데 빨대를 꽂았다고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민생을 잡아 흔들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사악한 방법을 썼을 것이다.
슈팅스타는 민생을 방패막이로 삼은 일본의 부패 정치인들을 엿 먹여 이득을 취하려는 것뿐이었다.
"정말 민생을 파탄 내는 짓이 뭔지 보여줘요?"
"···제기랄."
"그럼 이렇게 하죠. 합병은 취소하되 우리가 가진 지분은 빼지 않습니다. 그냥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양도할게요. 그럼 됐죠?"
"그건 그저 이름만 남겨놓는···."
"그럼 어째요? 그냥 생으로 피해를 보라고요?"
어쨌든 경영권 방어에는 성공했다.
대신 협상카드를 몇 장 내어주긴 해야겠으나 아베 노보루의 입장에서도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좋습니다. 지분은 남겨두기로 하시죠."
"그리고 우리가 인수를 취하하는 대신에 블랙하워드의 계열사들을 AAA+등급으로 상륙시키는데 동의하신 거죠?"
"AA등급으로···."
"대신 세금혜택은 양보할게요. 한 15%선 깎아주는 것으로?"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결국 유미영이 협상에서 이긴 셈이었다.
***
92년 12월, HC투자의 일본 소재시장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가 투자한 자본규모는 대략 5억 달러 이상.
소재시장의 정크본드는 물론이고 일반 회사채, 주식에 이르기까지, 꽤나 폭넓은 채권공략이 가능했다.
물론, 천우가 투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도움 덕분이었다.
원래 일본의 자금시장은 신용등급에 따라서 진입장벽이 거의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천우처럼 홈그라운드에 비해서 해외시장의 대외 신용도가 낮은 회사의 경우엔 투자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일본 주민당 극우세력의 간섭이 일부 작용했기 때문에 해외자본이 소재부문 채권시장을 뚫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얼마 전, 슈팅스타가 동경은행인수를 포기하면서 얻은 AAA+등급의 회사들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가니 5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밀어 넣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소재시장에 숟가락을 얹은 후, 천우는 곧이어 중국으로 투자영역을 넓혔다.
올해 3월, 중국은 해외투자유지의 일환으로 투자절차의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해외투자수신업무는 성 지방정부로 이관되었고 바야흐로 대 중국투자시장이 열리게 된 셈이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극동지방 및 중앙시베리아 지역의 자원시장에 대대적 투자를 감행하였다.
천우는 중국과 러시아에 투자할 종목들을 정리해서 김영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마샤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통하여 향후 개발가치가 있는 부동산과 관련 주식 등을 추려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물론, 희토류금속이나 천연가스분천 등의 호재가 터진다고 해도 그걸 독점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자원산업에 대한 권한은 국가에게 있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부동산에 대한 사유재산권은 인정됨으로 그 지분은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천우는 양국의 본격적인 투자규제가 시작되기 전에 개방화 물결을 타고 자금을 꾸역꾸역 밀어 넣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지분을 늘려놓으면 당연히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자원영향력은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김영실은 천우의 기획안을 수령하는 한 편, 그에게 새로운 소식도 전해주었다.
"무기시장에 투자하였던 자금이 수월하게 안착한 것 같습니다. 각 회사들과의 의견조율을 통하여 향후 투자기획도 세우는 중이고요."
"상당히 적극적이네요."
"사장님의 방침이니까요. 하지만 저들이 우리의 투자를 수용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부탁이 뭔데요?"
"대대적인 자금수혈을 유도해달라는 겁니다."
"자금유도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우의 영향력이라면 무기회사들에게 자금줄을 대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금융권을 움직여서 자금을 수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천우는 그런 방법으로 슈퍼보이의 명성을 깎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하세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대신 내가 사업의 다각화를 이뤄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김영실은 저들의 자금동원력을 높여 줄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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