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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보 그룹에 대한 해외차관이 실시되었다.
이번 차관으로 현보 그룹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명령받았고 수뇌부는 총 11개 계열사 중 절반을 정리하고 현 부채비율 311%에서 190%로 조정할 계획이었다.
원래 현보는 부채비율이 418%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지만 범 현보일가의 내부거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상장 계열사가 정리되어 부채비율이 100% 남짓 내려간 상황이었다.
해외차관 주재는 부채비율 100%대 진입은 1차 목표이며 이때까지 필요한 자금의 50%만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나머지 50%는 자금투입으로 부채비율을 극단적으로 내려 100%대 초반을 달성하면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현보는 차관조건 협상안을 마련하여 제시하였지만 기각을 당하고 말았다.
현보 그룹의 현 부회장인 조일규 기획총괄사장이 직접 블랙하우스 뱅크를 찾아왔다.
그는 현보 그룹에 대한 차관조건을 일부 조정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대로라면 대대적인 인원감축으로 실직자들이 대폭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껏 회사의 앞날만 보고 달려왔던 사람들을 대거 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압니다.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있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차관을 해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100%대 후반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수치라고요."
미국의 원화절상 압박으로 현보의 무역수지는 점점 악화되는 실정이었다.
원화절상이라는 건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제품이 외국으로 나갔을 때, 대외표시가격이 올라간다는 소리다.
현보 전자는 품질경쟁력보다는 가격경쟁력이 뛰어난 회사인데, 홍콩이나 대만 등의 회사들과 경쟁할 때에 책정되는 가격을 낮출 수가 없으니 문제였다.
더군다나 부품을 수급해 오는 일본의 화폐는 절상, 주요 판매국가인 미국은 절하이니 그야말로 독배를 마신 격이었다.
게다가 다른 경쟁기업들이 90%이상 국산화를 이뤄낸 반면, 현보는 기술력 경쟁에서 한 발 뒤쳐져 원화절상에 더욱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조일규는 이에 대해 상당히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제 거의 자체조달 직전까지 왔는데 자금난으로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요."
"그래요. 운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어쩌겠습니까? 판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걸."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현보에게 이번 차관이 기회가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블랙하우스 뱅크 대 한국 차관담당자 아이작 레스너는 더 이상의 조건협상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미 그쪽 회장님과도 얘기가 끝난 것으로 아는데, 왜 굳이 담당자께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먼 길 오셨는데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회장님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내린 결정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오너는 오너지요. 아무튼 우리는 그쪽 회장님께서 내놓으신 협상안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만약 차관을 거부하신다면 우리야 어쩔 수 없지요. 위험부담을 내려놓는 수밖에."
현보의 수뇌부는 대체적으로 대대적 구조조정에 동의하였지만 일부 세력이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바로 조 씨 일가였다.
최희명의 처남 조일규는 낙하산 인사로는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파격적 혜택을 받았다.
조의창이 처음 최희명에게 중수부라는 칼을 쥐어주었던 그 타이밍에 날아와 뿌리를 박아버린 사람이 바로 조일규였던 것이다.
조일규는 어떻게 해서든 현보의 지금 덩치를 유지하고 싶었다.
"제기랄, 미국의 압박만 없었어도!"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범 현보일가를 포함해 현보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킬 절호의 찬스인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아버지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한국행을 택했다.
헌데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기도 전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현보 그룹 총괄비서실에서 수뇌부가 긴급이사회를 통해 조일규를 비롯한 현보 그룹의 일부를 물갈이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그 중에는 조일규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조일규는 자신과 함께 현보 그룹에 들어왔던 세력들을 찾아갔다.
허나 그들은 이미 틀렸다는 입장이었다.
"대주주가 현보의 구조조정 목록에 우리까지 집어넣었답니다. 이번 구조조정은 대대적인 다이어트임과 동시에 회장의 반대세력을 숙청하려는 움직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새끼들이 돌았나? 감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알고?!"
"이미 주주총회까지 염두에 두고 우호지분까지 정비해두었답니다."
"범 현보일가가 직접 참여할 것이라는 소리입니까?"
"그쪽은 200% 초반까지 이미 부채비율을 낮춘 상태이고 이제 추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서 190%대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답니다. 이미 돌아선 지 오래입니다."
조일규는 최측근들을 만난 후, 곧장 최희명을 면회하기 위해 달려갔다.
허나 그는 면회를 거부하였다.
아예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조 씨 일가를 깡그리 정리해버리겠다는 태도, 조일규의 화가 백회혈을 뚫고 나올 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조 씨 일가가 현보를 버린 순간,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이건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주일 후.
드디어 그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
천우는 CIA에서 분석을 부탁했던 차트들을 쭉 나열해놓았다.
나노로봇들은 무려 3만 개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서 곡물시장에서 엑스가 개입했던 정황을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걸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남짓.
마샤는 경우의 수에 대한 가상의 시나리오까지 전부 도출하여 가장 합리적인 부분만을 발췌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이들은 점조직 형태로 움직입니다. 일반인 매수자들의 움직임과는 확실히 다른 제 2의 패턴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엑스의 수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2의 움직임이라!"
-단순 투자나 투기를 위해 현물이나 펀드를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매점매석을 목표로 움직이는 거죠. 그걸 무수히 많은 점조직 형태로 분할해서 인수하니 제 아무리 CIA라도 꼬리자르기에 당할 수밖에요.
"점조직의 형태이니 두드러지는 매입세력을 찾기도 힘들 것이고?"
-바로 그게 핵심입니다.
마샤의 정보는 곧 천우의 정보가 된다.
그는 뇌에 입력된 정보를 훑은 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곡물이 오르고 내리는 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놈들, 단순히 자신들의 물량을 가지고 시세를 조작하는 게 아니었어?"
-아직 그 정도의 매점매석 능력은 되지 않지만 약간의 악재를 최악의 악재로 바꾸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그것도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압도적 물량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허나 엑스는 그걸 가능케 만들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곧 자체적으로 매점매석이 가능한 시점도 오겠죠.
"말도 안 되는 조직력이군. 혹시 이와 비슷한 조직이 과거에도 있었나?"
-적어도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데이터를 훑어본다면 그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는 있겠죠.
"과거의 데이터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아무리 나노머신의 하드웨어가 주인님과 함께 꾸준히 성장하였다고는 하나 적어도 3개월 이상은 걸릴 겁니다. 변수가 생긴다면 1년이 걸릴 수도 있고요.
"변수?"
-나노머신이 미래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연대가 오래될수록 유실된 자료들이 많아서 그 정확한 추이를 계산하기가 힘듭니다. 때론 유실된 자료의 중간부분을 추정해서 계산해야하는데, 그건 일반적인 연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복잡한 과정이죠.
"그럼 어쩌나?"
일단은 분석한 것만 CIA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는 3만개 이상의 시나리오를 100장의 A4용지에 압축해서 CIA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은 담당자 안드레 엘드리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뭐야, 이걸 혼자서 다 만들었다고?"
"일주일을 꼬박 세웠어요. 물론, 이건 그들이 어떤 조직인지 이해하는 정도의 자료에 불과하지만요."
시나리오의 맨 앞장에는 이들이 움직이는 패턴에 대한 분석이 나와 있었다.
안드레 엘드리치는 이들의 신출귀몰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건 뭐 거의 슈퍼보이 수준인데? 이들도 자네처럼 차트를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가?"
"어쩌면요."
"흐음."
"아마 단시간 내엔 잡기 힘들 것으로 생각 되네요."
"제기랄, 그렇다면 이번 폭등에서 저놈들의 발을 묶을 방법이라도 없는 걸까?"
저들을 분석하면서 단기적으로 곡물가격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두긴 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론이었지만 어떤 방법이든 부작용은 있었다.
"이봐, 슈퍼보이. 정말 방법이 없겠어?"
"어떤 경우의 수라도 맹점은 있기 마련이에요."
"그래도 들어보고 싶은데."
"흐음. 저는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괜찮아. 기왕이면 놈들의 아가리에 쥐약을 확 털어 넣을 수 있는 방법으로 알려줘."
"거듭 강조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부작용은 있습니다."
"물론!"
천우는 마샤의 시나리오 중 가장 성공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일러주기로 했다.
그는 빈 공책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 미국의 대 아시아 쌀시장은 개방 전이에요. 그렇지만 일본과 같은 경우엔 꾸준히 대외적 쌀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죠."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고요. 아시아로 쌀을 수출할 생각만 하지, 역으로 수입할 생각은 하지 않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요.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죠. 하지만 70년대 곡물파동보다 심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곡물시장이 자체적 내수물량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다면요?"
"그때야 수입을 해야겠지."
천우는 공책에 중동의 지도를 그려놓았다.
현재 중동 페르시아 만의 긴장은 악화일로를 걷다가 잠시 휴전국면에 접어든 상태였다.
허나 얼마 전, 영국이 이란에 대한 외교보복에 나서면서 긴장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갈등국면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소리였다.
"중동발 악재로 곡물가격이 점점 오르고 있잖아요? 이참에 아예 미국이 아시아 시장에서 곡물을 사오는 거예요. 국가의 비축 분을 늘리는 거죠."
"그건 우리 CIA의 소관이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시장에 아시아 시장의 곡물 역수입 루머를 흘려놓으면 아마 곡물을 손에 쥔 사람들은 일부 매각을 하겠죠? 하지만 매점매석을 노리는 놈들이라면 반드시 그걸 주워 먹을 겁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이야 악재가 있으면 팔고···."
"하지만 대세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다르죠."
"아아! 소수의견 투자이론!"
"그래요. 대다수의 의견을 거스르는 사람들. 비록 내재가치를 좇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저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잖아요."
"오호, 그렇다면 그때 저놈들을 한 방에 잡아 족치면 되겠군!"
"하지만 루머 이후의 상황까지 생각해본다면 이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안드레는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재안을 내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고. 내가 주식시장 브로커들 중에서도 꽤나 고위층에게만 이 사실을 풀어놓을게. 기밀엄수를 강요하면서 정보를 풀면 적어도 시중에 정보가 나도는 일은 없을 거야. 그 타이밍에 매도물량을 만들면 오히려 놈들의 꼬리를 잡기가 더 쉽지 않겠어? 어떤 새끼들이 CIA를 엿 먹이고 있는지 분간하기도 쉬울 거고."
"부자들만 죽어나겠네요."
단순 소액투자자들과 엑스의 패턴은 엄연히 다르다.
천우는 그걸 분석해냈고 안드레는 그걸 믿고 이런 엄청난 작전을 시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전면 취소하실 건가요?"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은데."
"돈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지."
과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옳은 일인가?
허나 판단은 천우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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