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48화 (48/202)

24.

89년 여름.

재무부차관 더스틴 퍼거슨의 집무책상 앞에 두툼한 서류뭉치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CIA의 과장급 인사 안드레 엘드리치의 정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이게 최선이란 말입니까?"

"CIA라고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정 뭣하시다면 FBI에 줄을 대보시던지."

"흐음, 이정도 정보에 넘길 안건은 아닌데···."

더스틴 퍼거슨은 책상 서랍을 만지작거리며 짐짓 고민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안드레 엘드리치가 실소를 흘렸다.

"이놈의 워싱턴 펜대들은 도무지 남자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니까. 이러니 샌님 소리나 듣는 거 아닙니까."

"···뭐요?"

"국장님께서 실망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네요. 코리안 뉴 보이에 대한 정보를 모아달라고 해서 모아줬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땠습니까? 주지사 내사해서 엮어 달라고 해서 엮었고 석유재벌 뒤통수 쳐달라고 해서 쳐줬죠. 그런데 이제 와서 뭐가 어째요?"

"그야···."

"아무리 CIA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당신들 펜대들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안드레 엘드리치는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더스틴 퍼거슨은 최근 재무부를 향하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에 대한 책임소지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여당에 비판적인 주지사를 섹스스캔들 및 선거법 위반 등과 엮어서 반쯤 매장시키는 한 편, 미국계 석유재벌들을 압박해서 텍사스 산 중질유의 가격상승을 부추겨 보기도 했었다.

이 배후에 모두 CIA가 있었던 것이다.

CIA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삽질은 그쪽에서 하고 개고생은 우리가 다 하고 있잖습니까. 이정도 했으면 깨닫는 바가 있어야지. 이건 뭐 거의 안하무인격이로군요."

"뭐요···?"

콰앙!

안드레 엘드리치는 주먹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철제책상에 그의 주먹자국이 남았다.

"우리 CIA가 동네 심부름꾼들로 보입니까?"

"허, 험험! 사람이 품위 없게 폭력을···."

"당신이 앉아있는 그 차관자리,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왜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렸습니까?"

"그야···."

"우리가 당신에게 놈들의 자료를 수집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매집세력을 한 방에 감아치기 위함입니다. 만약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당신과의 공조도 끝입니다."

CIA는 최근 5년 동안 원자재 및 식량 가격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세력을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81년도부터 CIA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對韓) 고철수출 가격은 불과 1년 사이에 3~4배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원업체들을 패닉 상태로 몰고 갔었다.

상식적으로 불과 2~3개월 사이에 고철가격이 3배 이상 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CIA는 수사에 착수하였고 미국 각 주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쳐 웃돈을 주고 고철을 수집하여 가격을 올렸다가 다시 폭락시키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냈다.

허나 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그걸 귀신 같이 알아채곤 꼬리를 잘라내기 일쑤였다.

내부자가 있는 것일까.

CIA는 미국 정부의 대 소련 압박정책의 일환으로 정보조직의 개편을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내부자척결을 시도하였다.

허나 워낙 방대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던 CIA이었던지라 색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CIA는 재무부와 상무부 등, 외부세력을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고 최근에는 그 성과가 있어 올해 곡물가격 상승에 놈들의 개입이 있었음을 알아냈다.

그런데 재무부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자료를 가지고 CIA를 부려먹기만 할 뿐, 좀처럼 공조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이러니 안드레 엘드리치의 뚜껑이 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젠장, 공조고 뭐고 다 엎읍시다. 우리 CIA 독단으로 알아서 할 테니 차관 당신, 일주일 내로 옷 벗을 준비하고 계세요."

"자, 잠깐···."

"뭐요."

"미안합니다! 아까는 내가 사리분별이 좀 안 되어서···."

"그래요. 아무튼 잘 가세요."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빌빌거리는 더스틴을 바라보며 안드레가 물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멍청합니까. 다음부턴 CIA의 코털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아요."

"물론이죠!"

"자, 그럼 서류 건네주세요."

더스틴은 안드레에게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안드레는 첫 장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헌데 첫 장부터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게 만들어버렸다.

"···뭐야, 이놈들. 세력이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영국, 심지어는 중공에 소련까지 넘나듭니다. 동서고금은 물론이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까지 넘나든다고요."

"제기랄, 이런 엄청난 자료를 왜 이제야 넘겨주는 겁니까?"

"그야···."

"이놈들, 앞으로 세력을 더 키워 우리가 미처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릴 겁니다. 보세요. 당장 몇 개월 후, 곡물가격이 미친 듯 올라갈 테니."

벌써 미국에 몇 달 째 이상기후가 관측되고 있었다.

아마 대대적인 흉작이 이어질 것이고 곡물가격은 또 다시 뛸 것이다.

안드레는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번 곡물가격이 폭등하게 된다면 놈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 거야.'

그는 서둘러 워싱턴을 빠져나와 뉴욕으로 향했다.

***

HC투자로 모여드는 투자컨설팅 의뢰는 하루 평균 100건이 넘는다.

이중에서 신생고객의 비율은 15%남짓.

지금까지 천우가 모아놓은 업체들의 숫자는 총 250개 정도로, 이제는 일반기업에서도 투자문의를 해 올 정도였다.

경상수지 악화로 사업의 다각화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기업들이 환율이나 주식 등에 투자하기 위해 천우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천우는 이들의 문의를 100% 다 수용하고 그와 더불어 사회간접자본의 유입을 늘렸다.

8월 말, 완연한 여름이었다.

"어디서 나왔다고요?"

"CIA말이야. 자네 정도 머리라면 중앙정보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정도는 알 텐데?"

한 여름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

동태눈이 아니고서야 이들이 어디 정보기관쯤 되는 곳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천우가 놀란 것은 CIA가 자신을 찾아와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코리안 뉴 보이의 정체를 알고 찾아왔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잠깐 얘기 괜찮지?"

"뭐, 그러죠."

CIA는 천우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건 천우 역시 상당히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헌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천우가 코리안 뉴 보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즘 뉴 보이가 아니라 슈퍼보이라고 부른다면서. 그 슈퍼보이와 자네는 무슨 관계인 거지?"

"슈퍼보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오신 건가요?"

"그래. 그와의 공조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온 것이지."

"공조?"

"자세한 건 지금 당장은 말해줄 수가 없어."

"으음. 그렇다면 저도 자세한 건 알려드릴 수가 없는데."

"정부에서 하는 일이야. 협조 좀 해주지 그래."

"그 사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잖아요."

"흐음."

CIA요원들은 천우에게 슈퍼보이의 정체를 묻는 대신에 두툼한 서류 한 권을 내밀었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가요?"

"소수의견 투자 연구회? 그 동아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말인데, 자네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군."

뭉치 안의 서류들은 전부 차트형식이었다.

서류를 펼쳐본 천우는 깜짝 놀랐다.

이 서류 안에는 천우가 84년도에 처음 꼬리를 잡았던 고철수집세력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그런 차트였다.

허나 그 차트 안의 변동폭과 자금의 이동을 살펴보면 금세 파악이 가능했다.

천우는 자신에게 이걸 왜 주는 것인가 싶었다.

"이렇게 엄청난 자료를 왜 저에게···."

"저놈들이 대세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에 역행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지."

"그렇다면 저들이 소수의견 투자 이론과 부합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자네가 저들과의 접점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아. 다만, 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슬쩍 들여다 볼 수 있다곤 생각했어."

자료에 따르면 의문의 세력, 가칭 '엑스(X)'라고 불리는 저놈들은 CIA의 생각대로 대세를 거스르는 투자를 자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카렐 학파와는 다소 일맥상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카렐 학파는 내제가치를 판단하여 장기투자를 하는데, 이들은 사회의 맹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뭔지 파악하고 그것을 일종의 무기화 하여 이득을 취하는 중장기 투자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곡물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선점하여 매수를 시작했다가 어느 특정 악재가 터지기라도 하면 곳간을 걸어 잠가 이득을 취하는 식이었다.

"악질 중에 악질이네요."

"그래, 악질이지. 화이트칼라인 자네가 보기엔 어때?"

"···곡물가격은 오를 겁니다. 당장 다각화를 진행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놈들이 곡물가격을 무기화 할 가능성이 높아요."

천우는 서류뭉치를 다시 CIA요원들에게 건네주었다.

헌데 한 사람이 슬그머니 걸어 나오며 오히려 천우에게 다른 서류를 한 뭉치 건네주었다.

"줄 필요 없어. 자네가 가지고 가게."

"제가요?"

"슈퍼보이, 맞지?"

순간, 천우는 움찔했다.

다소 작은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중년, 하지만 그 깊은 눈동자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분명 보통의 내공이 아니었다.

"반가워. 나는 CIA의 대외정보부장 아론 테이트라고 하네."

"대외정보부장···?"

그는 CIA의 직인이 찍힌 명함과 신분증을 천우에게 보여주었다.

CIA를 사칭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마샤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CIA의 신분증으로 알려진 양식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진품입니다.

91년도, CIA는 전산화를 통하여 신분증을 회수하여 새로 발급하였는데 그때 일부 쓸모가 없어진 자료가 일부 유출되어 마샤의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할 나위가 없다는 소리.

허나 그래도 천우는 저들에게 순순히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자네가 슈퍼보이가 아니었다면 그 자료만 보고 엑스가 곡물을 무기화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나?"

천우는 아차 싶었다.

저들이 보여준 건 차트형식의 자료들이었다.

그 어떠한 주석도 없었고 심지어 숫자와 차트의 명칭 빼고는 글귀조차 없었다.

"···허참, 사람을 이렇게 시험하시면 어떻게 하나요."

"그만큼 우리에게 자네가 필요하다는 소리겠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하하, 그래. 나라도 그렇겠어. 하지만 생각해봐. CIA가 아무리 급해도 이렇게 대놓고 자네를 찾아와 차트를 건네겠나? 껍데기를 보면 알겠지만 그건 기밀문서야. 그걸 일반인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벌써 철창감이라고."

"으음."

"우리는 자네가 필요하다네. CIA에서 코리안 뉴 보이, 아니 슈퍼보이에게 정식적으로 공조를 요청하는 바이네."

사재기와 물량폭격으로 시장을 뒤흔드는 검은 손,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천우도 그들이 궁금하긴 했었다.

허나 그보다 문제인 것은 저들의 행동패턴이었다.

그들의 행동패턴이 천우의 이론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불똥이 천우에게 튈 수도 있다, 그런 뜻이었다.

"좋아요. 자꾸 신입사원이라고 불러서 기분이 좀 묘했었는데 슈퍼보이라고 별명을 고쳐서 불러주시니 응할게요."

"하하, 화끈해서 좋군!"

"다만, 제가 원할 때까지 슈퍼보이의 정체는 공개하지 말아주세요. 제 나름대로 사정이 좀 있거든요."

"물론이지. 우리도 바보는 아니야."

그는 천우에게 명함을 선물로 주었다.

명함에는 대외정보부장의 직통번호가 적혀 있었다.

"교환 필요 없이 전화하게. 자네가 우리와 공조해서 꼬리를 잡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도 자네에게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주겠네. 필요하다면 돈을 줄 수도 있고."

"돈은 됐어요."

"그렇다면 언제든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시게. 자네의 부탁이라면 어지간해선 다 들어줄 생각이니."

살다보니 CIA와 엮이다니, 천우는 세상사 요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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