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46화 (46/202)

23.

다니엘 마빈스는 천우와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다니엘이 워낙 수다쟁이라서 살짝 고생한 감이 있긴 했지만, 천우로서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무려 세 시간이나 쉬지 않고 얘기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모자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하지만 못 다한 얘기가···."

"나중에 또 시간이 날 겁니다. 자주 만나면 되죠."

"아하!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저야 좋지요!"

"아무튼 간에 오늘 저를 보자고 하셨던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네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서야 천우는 다니엘이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천우에게 '개도국 및 신흥공업국 투자리스크 분산을 위한 스와프 상품'이라는 기획안을 내어놓았다.

"감수 및 고문을 맡아주셨으면 하는 프로젝트가 바로 이겁니다. 투자은행(IB)에서 상업은행의 대출서비스에 대한 일종의 보험을 파는 것이죠. 아직 프로젝트 명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가칭 '리스크스와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리스크스와프라."

"아마 이로서 신용거래가 활발해지고 개도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아마 신흥공업국의 투자시장의 장벽도 이것으로 다소 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리스크를 공유하는 스와프 개념이 슬슬 IB업계에서 거론되는 중이었고 그것이 완성되어 대대적으로 보급되는 시기가 94년도였다.

천우는 신용부도스와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리스크스와프에 대한 초안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우선 스와프의 전재조건은 '신용도'에 따라 달라지는 프리미엄의 요율이었다.

AAA+부터 BBB까지 이어지는 신용도 등급에 따라서 피라미드형식의 프리미엄을 부과한다는 설정이었다.

해당 프리미엄의 요율은 상당히 치밀하고 체계적이었다.

아마 꽤 많은 수학자들과 투자전문가들이 뼈를 갈아 넣었을 것으로 보였다.

"고생 좀 하였겠는데요?"

"혹시 부족한 부분은 없겠습니까?"

"부족한 부분이라."

신용부도스와프(CDS)에는 순기능도 분명 많지만 역기능의 여파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CDS는 리스크 분산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허나 이것이 증권화 되면서 무분별한 파생이 이뤄졌고 그것이 첨예하게 엮이면서 오히려 리스크는 점점 더 커졌다.

결국엔 리스크 분산을 위해 만든 CDS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되레 역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2008년도에 있었다.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였다.

구조적 모순, 천우는 이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몇 가지 장치를 걸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해당 스와프에 대한 변칙 투자를 막아서 투기세력 조장을 억제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지요?"

"투기세력이라."

지금의 초안에는 스와프 프리미엄이 신용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가격에 높게 책정되지만 그와 더불어 스와프 거래의 수요가 올라가면 가격이 점점 오른다고도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세요. 스와프 프리미엄이라는 것도 투기세력의 운집으로 구매가 집중되면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잖아요. 그건 다시 말해서 해당 기업이나 국가에 대한 신용도를 절하시켜 자금조달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요?"

"역시. 맹점을 잘 찔러주시네요."

"그냥 보이는 걸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뭘."

지금이야 단순 보험 상품쯤으로 생각되겠지만 추후에 CDS는 19조 9천억 달러의 엄청난 시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천우는 이들이 그 시장의 시작, 또는 중심에 서고자 한다면 우선 시장 조작부터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천우에게 앞으로 스와프 관련 상품을 감수해주고 프리미엄을 받으라고 제안했다.

"리스크 스와프는 물론이고 앞으로 이쪽 파생상품의 감수를 부탁드려도 되련 지요?"

"제가요? 저는 이쪽 전문은 아닌데."

"하하, 이 기회에 세력을 확장하시는 거죠. 프리미엄은 사정에 맞게끔 최대한 맞춰서 약정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지금의 개도국 차관에 대한 수익에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아시아의 금융시장은 아직 개방태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몇 %이던 간에 천우가 시작부터 깃발을 꼽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 앞으로 CDS시장이 발달하면서 생기는 부작용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도록 조언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역시. 그리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헌데 이 아이디어는 누가 낸 건가요?"

"접니다. 원래는 정권교체 이후, 다음 정부에나 출범시키려던 계획이었는데 좋은 파트너가 생길 것 같아서 한 번에 밀어붙이기로 한 거죠."

원래 CDS는 94년도에 처음으로 출범이 된다.

천우는 그 시기가 빠르다 싶어서 물어봤는데,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빨라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또 다른 국면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CDS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나 카렐 학파 내부에서도 끝도 없는 찬반여론이 많았는데, 천우는 오히려 자신이 사전에 감수를 맡음으로서 학파의 의견을 고루고루 들어보며 적용시킬 수 있겠다 싶었다.

천우는 최종수정안은 이를 통해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학파모임에 나오실 건가요?"

"체스터 카렐님의 기일에 맞춰서 당연히 나갈 겁니다."

"그럼 제가 이 초안을 수정한 다음, 올해 증조할아버지 기일에 맞춰서 최종수정을 봐도 괜찮을까요? 앞으로 몇 달 담기는 했지만요."

"하하, 괜찮고말고요! 어차피 저도 하루 이틀 안에 기획이 완성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되면 사람 여럿 다치는 일 아닙니까."

천우가 감수를 맡는다고 한 것도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왕지사 수익을 내는 일이라면 조금 더 안전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아무튼 두 사람의 계약은 마무리가 되었고 천우는 CDS 프리미엄의 1%를 가지고 가는 대신, 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하여 프로젝트를 책임지기로 했다.

***

여름의 끝자락.

이제 슬슬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의 최희명이 철창 너머의 누군가를 힘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최호명이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망해버렸는데 이제 와서 손절해서 뭘 어쩌라고. 그럼 뭐가 달라지나?"

"최소한 길바닥에 버려져 구걸하면서 사는 신세는 면하겠지."

"큭큭, 어차피 추징금 내고도 몇 억은 남아."

"그게 과연 몇 억이나 될 것 같아? 숙부들이 회사를 전부 다 정리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내부거래는 불가능해져. 그럼 현보 그룹이 도산할 수도 있다고. 최소한 그런 사태는 막아야하지 않겠냐?"

"이 양반이 뭘 모르시네. 어차피 현보는 망하게 되어 있어. 형이 뭘 어쩐다고 망할 회사가 안 망하지는 않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최소한 그룹의 뼈대는 건질 수 있다. 네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만 감수한다면 말이지."

"허참, 이 아저씨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조의창이 벌써 현보를 뭉개버리려고 작정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무슨···."

"자금은 충분하다. 미국계 은행도 소유하고 있고."

"···미국계 은행을 소유하고 있다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미국이 바보야? 한국인에게 은행을 넘기게?"

"네가 조의창 밑구멍이나 핥고 있을 때 아버지와 내가 상무부와 딜을 봤다. 그래서 얻어냈지."

"어엉···?!"

"네가 썩어빠진 정치권에 비자금이나 돌리고 있을 때, 나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이 자리까지 온 거다. 알겠냐? 정치권에 너무 빌붙으면 너처럼 되어버린다는 걸 말이야."

최희명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지분공유로 자연스럽게 한결이 블랙하우스와 합병된 것이 아니라 아예 그 판 자체가 모두 최호명의 것이었다는 걸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해라. 알거지가 될 것인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

"내가 형을 선택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긴 할까? 방법이 없잖아."

"블랙하우스는 미국계 회사다. 내가 미국계 자본을 한국에 수혈해주면 최소한 회사가 망하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회사는 내 간섭 하에 놓이게 되겠지."

"젠장! 그렇다면 내가 애써 회장 자리를 꿰어 찬 의미가 없잖아!"

"그 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곤 생각 안 해봤냐?"

"끄응. 그렇지만 어차피 조의창이 있는 한 살아남기는 힘들어."

"과연 그럴까?"

만약 최호명이 미국으로 쫓기듯 나가서 회사를 세우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자신감은 오만이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벌써 그에게 미국계 기업의 이해관계가 수도 없이 얽혀 있어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워낙 많았던 것이다.

최희명은 이제는 최호명이 자신은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영웅 납셨군."

"형제간의 정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다. 현보라는 울타리, 아버지가 만드시긴 했어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끼는 그런 보물은 아니었어.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 빌어먹을 놈의 핏줄 때문이다."

최충의는 자신의 사후에 언젠가는 회사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최희명 때문에 너무 빨리 온 것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형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는 거다. 그러니 이쯤에서 꼬리 말고 엎드리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다 같이 죽는 수밖에는 없어."

"젠장."

"오늘이 마지막이다. 만약 네가 나를 등진다면 우리 형제가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람을 협박하는 거야?"

"그래, 협박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면 차라리 내가 형제의 연을 끊고 손절하고 말 거다."

형으로서 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정이었다.

허나 동생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을 좀 줘."

"아까도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최희명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한 번만!"

"이런 줏대 없는 새끼."

"···시간을 좀 달라고."

"됐다. 더 할 말 없으면 나는 이만 간다. 잘 살아라."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없다면 제 아무리 최호명이 세상천하의 갑부라도 구제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내가졌어."

"이미 버스 떠났다."

"내가졌다고!"

최호명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이대로 현보는 와해되고 마는 것일까?

허나 최호명이 나간 후, 그 뒤를 이어서 오금자가 들어왔다.

"어, 엄마?"

"······."

순간, 모든 것이 멈추는 듯했다.

그리고 최희명은 그저 고개 숙인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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