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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미 재무부의 원화절상 압박이 있었다.
엔화와 마르크가 절상국면으로 접어든지 28개월 차, 여전히 미국의 경상수지는 적자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여전한 무역 분쟁이 답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한민국의 증시는 여전히 활황이었다.
87년도 대한민국의 흑자폭은 65억 달러였다.
전체무역 471억 달러 중에서 무려 13%가 순수흑자인 셈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 7개국 재무장관들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신흥공업국(NIES)의 흑자폭을 줄여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동북아의 경제성장이 두드려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각 국가에서는 신흥공업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폭을 줄이는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시간이 지나 8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무역수지는 꾸준히 흑자였다.
그에 반해 달러화는 계속 하락국면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9월에는 원 달러 환율이 720원까지 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FRB와 ECB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달러화 투기열풍이 불었었는데, 천우는 그 달러화의 투기보다 대략 3개월쯤 앞서 단타로 환매투기를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증권시장과 원화시장을 공략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88년 6월~7월 사이에 FRB의 직접 개입으로 인해 달러화 가치가 반짝 올랐는데, 천우는 전속 투자전문가들에게 이때 달러화가 올랐다가 10월쯤 다시 절하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전했었다.
또한, 전자를 비롯한 우량주와 함께 하향산업의 주식을 대거 모아두었다가 올림픽 특수와 함께 매도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신조건완화와 하향세 국면에 있는 사업을 부양시키기 위한 절세 및 세금감면 혜택을 부여했다.
여신조건완화로 인해 주가는 엄청나게 뛰었고 석유관련 산업들의 주가도 1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 있었다.
천우는 호황의 최고점에서 주식을 일제 매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주식의 매물이 모자란 마당에 물량이 풀리니 매각에 채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HC투자는 엄청난 고수익을 창출해냈다.
여기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천우는 절하국면의 달러화와 원유, 부동산 등을 꾸준히 매입하기 시작했다.
11월, HC투자의 달러화 보유고는 12억 달러 수준.
여전히 HC투자는 엄청난 달러화 현금을 바탕으로 자금을 순환시키며 괴물처럼 성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투자부서에 천우의 새로운 투자지침이 내려왔다.
새로운 테마는 바로 금(金)이었다.
김영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이라니요?"
"국제 금시세가 바닥을 찍었어요. 지금이 매입에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제 금 시세는 87년도에 최저점을 찍은 것으로 나타나 있었으나, 10월을 기점으로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천우가 생각하는 금투자의 최적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현물과 펀드에 각각 6:4 정도 비율로 투자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녀는 천우의 지침을 전해 받은 후, 그에게 묵직한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쿠웅!
"이번 달 투자고문 관련 안건들입니다. 지침을 정해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편집하겠습니다."
"양이 꽤 많네요."
"최근에 달러화 매매로 인해 벌어들인 수익이 아주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88년 한 해에만 무려 41개의 은행권이 사장님께 투자설계를 받겠다고 줄을 섰습니다."
"와우, 많이도 늘었네요."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겁니다."
그녀는 천우에게 '퀸튼 토플러'의 로고가 박힌 서류를 건네주었다.
서류 안에는 퀸튼 토플러의 개도국 및 신흥공업국 차관에 대한 프로젝트 참가를 제안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퀸튼 토플러라!"
"이번에 토플러 마빈스가 동남아시아 개도국 차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프로젝트 팀에 참여했으면 한다고 전했습니다. 아마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면 아마 퀸튼 토플러 전체의 프로젝트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퀸튼 토플러는 무려 200년 전통의 금융회사였고 은산분리로 인해 퀸튼 토플러에서 투자은행 토플러 마빈스가 갈라져 나왔다.
토플러 마빈스는 처음으로 개도국 투자에 대한 리스크 분산 상품을 꺼내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용부도스와프', 줄여서 CDS라 부르는 금융상품이었다.
천우는 지금까지 공룡급 회사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진외가의 압박이 있을 지도 몰랐기에 몸을 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흐음."
천우는 일단 토플러 마빈스의 현 대표이사에 대해서 검색해보았다.
-다니엘 마빈스. 토플러 마빈스의 대표이사이며 토플러 6세대 회장의 외손자입니다. 컬럼비아 경영대학 출신으로 모교에 매달 일정금액을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교를 사랑하는 컬럼비아 대학의 경영학도라! 그렇다면 카렐 학파의 일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만나볼 가치가 충분하겠어!'
천우는 당장 접선을 수락하였다.
"접촉하자고 전하세요."
"예, 그럼 로비 전담팀에게 연락해서···."
"아니요. 토플러 마빈스 대표에게 코리안 뉴 보이가 좀 보자고 했다 전해주세요."
"직접 가시게요?"
"네.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직접 대면해서 파트너로 만들게요."
"하지만 아직 사장님은···."
"알아요. 대학생 신분의 소년이죠. 하지만 괜찮아요. 같은 학파끼리 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천우는 다니엘 마빈스와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며칠 후.
천우는 토플러 마빈스의 본사로 직접 찾아갔다.
비서진도 없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하교하던 바로 그 복장으로 다니엘 마빈스를 찾아갔다.
웅성, 웅성!
토플러 마빈스의 본사는 엄청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뉴욕 맨해튼 한 복판에 위치한 이 회사는 61층 전부가 푸른색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사파이어로 깎아 건물을 지은 느낌이 들었다.
"최천우 씨?"
"네, 제가 최천우인데요."
"반갑습니다. 다니엘 마빈스입니다."
놀랍게도 대표이사가 직접 천우를 마중하려 나왔다.
아무리 손님이라도 비서실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 보통인데, 지금은 대표이사가 직접 천우를 모시러 나온 것이었다.
"카렐 학파에서 아주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안 그래도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야···."
"아무튼 너무 반갑습니다. 들어가서 천천히 담소 좀 나누시지요."
굉장히 깍듯한 천우의 광팬이었다.
아무래도 천우의 생각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허나 천우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천우는 그를 몰랐지만 그는 꽤 오래전부터 천우를 알아왔다는 점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자신이 신문에서 스크랩한 내용들을 쭉 나열해서 보여주었다.
"한은 경시대회에서는 아주 짜릿했습니다. 그들의 맹점을 그리 콕콕 찔러주시다니요. 카렐 학파와 가장 상극인 집단이 바로 한은과 같은 중앙은행들 아니겠습니까? 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더군요."
"기분 좋으셨다면 다행이네요."
"우리 학파를 대신해서 중앙은행의 콧대를 눌러주시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굳이 그러라고 나간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진외증조부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습니다!"
카렐 학파에 처음으로 체스터 카렐의 진외증손이 나왔을 때부터 그의 맹렬한 추종자들은 천우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많다고만 들었었지, 그들을 직접 대면해 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천우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HC투자는 저희들에게 있어선 거부감이 드는 집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업계의 대세가 되었으나 이른 바 매머드 급 금융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보였던가요?"
"하지만 HC투자의 주인이 당신이란 것을 알았을 때엔 그야말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우리 학파가 소수의견이 아니라 진정한 투자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정도면 카렐 학파의 광신도라고 해도 될 법했다.
일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대화는 상당히 잘 풀릴 것 같았다.
***
최호명은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종친들을 앞에 두었다.
허나 그는 종친들이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는 건데요?"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회사, 네가 좀 회수해다오!"
88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다국적기업 및 해외지사를 둔 한국 글로벌 기업에 대한 일제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법대출이나 내부거래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만약 법에 위배되거나 기업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행위가 적발된다면 곧바로 법적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현보는 이제 막 해외진출로 꽤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었고 그 자금은 전부 은행권 여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이 조사는 현보와 같이 조의창을 배신했던 기업들을 한 방에 정리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종친들은 최호명에게 거의 빌듯이 부탁했다.
"만약 우리가 내부거래 감사와 부정대출 조사에 걸려서 자금 일제상환명령이라도 받으면 우리는 그 즉시 아웃이야!"
"그러게 부채비율을 조금이라도 줄이도록 노력하셨어야죠. 왜 이제 와서···."
"우리라고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 다 기업이 먹고 살자고 해왔던 짓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이지."
대한민국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내실이 전혀 탄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자기자본의 3배, 4배, 심지어는 5배까지 여신을 끌어다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것이 상당히 보편화 되어 있었다.
종친들은 최호명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이며 애원했다.
"부디 아버지의 현보를 버리지 말아다오!"
"현보는 살릴 수 있죠. 하지만 숙부님들의 회사까지 전부 다 살리자면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안다! 하지만 호명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다 죽을 수는 없잖냐. 심지어 네 셋 째 숙부는 감옥에 들어가 있다. 우리야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녀석은 나오기가 아주 힘들 것 같아. 범 현보일가를 일구기 위해서 그놈이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 했었잖냐."
대기업이 적자폭의 자회사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자회사의 물건을 모회사가 비싼 값에 사주고 모회사의 일거리를 자회사에 밀어주는 것이었다.
현보의 친족분리에서 가장 매출이 부진했던 기업들을 셋 째 최충휘가 가지고 나가는 대신에 가장 많은 내부거래 혜택을 보게끔 형제들이 합의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충휘가 가장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최호명은 단순히 아버지의 회사라고 해서 현보를 인수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최대한 이득이 되는 선이라면 당연히 인수를 할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과감하게 포기할 것이다.
당장의 그림만 본다면 가문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현보를 되찾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게 최충의의 목적 아니었겠는가.
최호명은 이들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자고요. 숙부님들께서 회사의 부채비율을 200%대까지 내려주세요. 아마 계열사 정리하고 뭐하면 충분히 가능할 걸요?"
"···우리더러 껍데기만 가지고 나가라는 거냐?"
"설마하니 제가 허풍선처럼 늘어난 회사를 있는 그대로 사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 것 아닙니까."
"허어! 이놈이 숙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거냐!"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숙부님들은 조카를 상대로 장사를 하러 오신 겁니까?"
이정도의 회사는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누가 자기자본의 4~5배나 되는 채무를 짊어진 회사를 있는 그대로 사주겠는가?
최호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현보 그룹 포함, 범 현보일가의 기업들은 일제히 구조조정에 들어가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들 감옥에 들어가거나 알거지가 되고 말 겁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잘 아시죠?"
"···끄응."
"먼 길 오셨는데 시간을 많이 못 내어드려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주세요."
"잠깐."
숙부들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최호명은 슬그머니 웃었다.
"생각을 바꾸셨어요?"
"···매수금액은 정말 제대로 쳐 주는 거지?"
"부채만 정리한다면야."
"그래, 알았다. 구조조정 들어가마."
과연 저들이 제정신을 차렸을지, 최호명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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