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검찰총장 집무실 안.
짐짓 무거운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중수부 독단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 의원님!"
조의창은 검찰총장 유현욱을 찾아왔다.
대선을 불과 보름 앞둔 현 시점에서 중수부가 정치인의 추가 내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헌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중수부가 5.18 민주화항쟁,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광주사태가 조의창 주도로 이뤄진 사건이라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잘못하면 막판뒤집기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이었다.
해당 사건이 누구의 주도로 이뤄진 것은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정민당 자체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고 그건 직선제에선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조의창은 그동안 잘 벼려두었던 칼날을 곧게 세웠다.
"그럼 유 총장님, 하나만 물읍시다. 그동안 양다리를 걸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
"그 생각, 한 번 잘 곱씹어보세요. 감옥에서 말이죠."
그동안 여야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유현욱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찰총장 경질.
시국이 민주화로 향하는 만큼 정의의 사도로 거론되는 중수부와 검찰총장을 경질하는 것은 여당에게 있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허나 어차피 이제 곧 대통령이 바뀐다.
정민당이든 심민당이든 어느 한쪽에서는 반드시 대통령이 나오고야 만다.
어차피 물갈이 될 거, 차라리 검찰총장을 쥐고 흔드는 것이 정민당에게는 이득이었던 것이다.
"다만, 주인이 누구인지도 못 알아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던 지난날을 참회한다면 최소한 검찰에서 전 총장을 직접 수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자, 어떻게 하시겠어요?"
유현욱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분명 도박이었다.
처음 중수부가 설치기 시작했을 때 꼬리를 자르지 않았던 것은 다음 정권에서 자신이 살아남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허나 달리 생각해보면 정권이 바뀌어도 위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야가 교체된다면 그동안 정민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야권을 족쳐온 검찰조직을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질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유현욱이 경질된다면 검찰은 과연 누구를 수술시키려 할까?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요. 중수부장을 내란죄로 체포하고 공안부장 경질하세요. 그런 후에 서울중앙지검장을 데려다가 현보 그룹 수술시키세요. 불법대출 및 뇌물공여, 불법비자금 조성 등, 있는 죄목들은 전부 다 끌어다가 붙이란 말입니다."
"혀, 현보를요? 그들은 조 의원님의···."
"수족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사냥을 시켜놓았더니 주인을 술병에 담그려 하는 새끼들 아닙니까? 이참에 제대로 수술을 시켜줘야겠어요."
최희명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대놓고 일을 벌인다는 점이었다.
그건 권력을 등에 업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 반대로 등에 업었던 권력을 등지고선 절대 통할 리가 없었다.
유현욱은 조의창의 명령에 따라 즉각 반응하였다.
12월 5일.
대검은 중수부장을 내란죄로 전격 체포, 공안부장을 관련혐의로 경질하였다.
또한, 현보 회장 최희명과 중수부장 이혁진이 뇌물을 주고받으며 유착관계를 이어왔다면서 최희명 역시 체포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지검은 현보의 각종 불법대출 및 비자금 조성 등에 대한 협의를 포착하여 최희명에게 부여할 예정이었다.
12월 16일, 대선 당일.
쿵쿵쿵!
"최희명 씨! 문 여세요,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갑니다!"
정권이 교체되기도 전에 최희명은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는 장인 조의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삼일 전, 처자식들까지 전부 친정으로 도피한 상태였고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그는 전화를 돌려 오인석에게 연결을 시도했다.
-···이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콰앙!
"이런 제기랄!"
일이 꼬여버렸다.
최희명은 오인석이 조의창의 적이라는 것만 생각했지, 만약 조의창이 오인석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서 일을 꽈 버릴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검찰총장이 근본적으로는 누구의 사람이었는지,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희명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네, 사람 있어요. 그러니 소리 좀 그만 지릅시다."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대답을 안 하니 이렇게 꼴사나워 지는 거 아닙니까?"
검찰은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곧바로 서울지검으로 압송된 그는 수사를 받지 않은 채 이틀 동안 갇혀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소식.
"최희명 씨, 정민당에서 대통령이 나왔답니다."
"···뭐요?"
"이를 어쩌나. 이제 현보는 공중분해 되게 생겨버렸네."
"······."
"협조만 잘하면 알거지는 면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징역은 못 피하겠는데요? 한 15년쯤 푹 썩다가 나와요. 뭐, 종친들이나 당신 형이 구해준다면 거리에 나앉지는 않겠네."
최희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
새해가 밝았다.
88년 2월, HC컴퍼니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부동산을 대거 입수한 이후 글로벌 원자재 무역회사를 인수하였다.
천우는 이 회사를 통해 태국 방콕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일대에 건물을 세울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HC컴퍼니는 천우의 이런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국의 경우, 외국인이 토지 및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공장, 관광시설 등을 지어 이윤창출 등을 영위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헌데 건물까지 지어 올릴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일반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허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자, 합작서류다."
"감사해요, 아빠! 정말로 합작을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아들이 사업한다는데 아비가 되어서 이정도도 못 해줄까? 그나저나 네가 천재이긴 한 모양이구나. 고작 열 살에 이런 사업이라니."
"실무는 회사가 다 알아서 하는 걸요. 저는 그냥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에요."
보통의 대학교 2학년 학생이 투자를 해서 이만큼 성공시키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인데, 하물며 이제 열 살이 된 소년이 이렇게나 발전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이제 최호명은 깨달았다.
천우는 보통의 나이, 학력, 경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최호명은 계속해서 미국계 부실채권과 재보험을 인수하면서 세력을 늘려나갔고, 심지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는 거의 진공청소기처럼 부실채권을 인수하여 재투자하였고, 지금은 거대재벌집단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주쿠, 시부야 일대에 지어올린 고층빌딩들의 가격이 천정부지기수로 오르는 바람에 일본에서도 부동산 갑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최호명은 명실공이 미국계 재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천우가 동남아 부동산 시장에 투자한다는 소식을 듣곤 곧장 태국계 회사를 인후, 정부와 협상하여 현지사업권을 취득하였다.
그 결과, 천우가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빌딩을 지어 올릴 수 있도록 합작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작서류를 받은 천우는 아버지 최호명과 함께 낚시를 떠났다.
롱 아일랜드에서 부자간의 선상낚시를 계획한 두 사람은 남자들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최호명 명의로 된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흐르는 바다에 배를 띄워놓았다.
부자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라면을 끓여 놓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러다 불현 듯 최호명이 물었다.
"천우야, 요즘도 프라모델인가 하는 걸 만드니?"
"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자동차들을 만들어서 본가 서재에 놓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구나."
"살아계실 때 더 많이 만들어드렸으면 더 좋아하셨겠죠···."
"녀석."
세 가족은 뉴욕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아직 딱히 국적을 옮기지는 않았다.
유학생 가족 신분과 사업자 신분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최호명 정도의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미국인이 될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천우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아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지, 그건 본인이 스스로 정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었다.
만약 최호명은 천우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프라모델을 만들어 본가를 꾸미고 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천우나 최호명이나 한국에서 꽤나 괴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동들을 보며 최호명은 그에게 기회의 창을 더 많이 열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슬슬 가닥을 잡을 때가 되었다.
"앞으로 대학을 졸업하면 할아버지를 모셔둔 한국에서 살 거니, 아니면 계속 미국에 남을 거니?"
"전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가문 대대로 우리 집안이 터를 잡아왔던 본가를 지킬 거고요."
"본가를 지킨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과연 천우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성장하여 거대한 맹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사냥을 시작하겠지. 아주 피바다가 펼쳐지겠군.'
천우는 무거운 화재를 전환시켰다.
"그나저나 아빠! 한국에서 살자면 병역문제를 해결해야 하잖아요? 아빠는 제가 면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군대를 갔으면 좋겠어요?"
"아아, 그래. 병역문제가 있었지."
최호명은 자신의 젊은 날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와 억압, 그리고 어머니의 방관을 참지 못해 결국 젊은 나이에 특전사로 입대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긴 하지.'
주변에선 그야말로 기함을 하며 넘어갔다.
그 어떤 누구도 재벌가의 장남이 특전사에 입대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젠 그 모든 것이 아픈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래, 다녀와."
"아빠는 특전사에 입대했던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후회했었지. 지금도 비가 오면 무릎이 쑤셔. 거기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었고. 하지만 적어도 정신은 차렸으니 됐지. 재벌가 자식이라고 별 이상한 핑계로 군대를 빼는 것보다야 차라리 빡세게 한 번 고생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으음."
"하하, 그렇다고 아빠처럼 젊은 날에 객기는 부리지 말고. 아마 특전사에 입대한다고 하면 네 엄마는 기절할 지도 몰라."
천우도 딱히 부사관으로 입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허나 군대는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랑 같아질 수는 없지.'
굳이 동생을 욕하기는 싫어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최호명 형제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각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갔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랐었다.
천우도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최호명은 남자가 한 번쯤은 다녀와야 정신을 차리는 것이 군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었다.
"남자답게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다만 이 아빠 생각에는 그 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학위도 좀 따면 좋겠는데."
"물론 학위는 딸 거예요. 사업도 확장하고요."
최호명이 경험해보니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가방끈이 길면 장땡이었다.
뭐든 돈만 많으면 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시선까지 생각한다면 학위는 있는 것이 좋겠다,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천우도 그걸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이 아빠가 최대한 서포터 해주마. 그러니 넌 공부 열심히, 사업도 열심히, 알겠지?"
"넵!"
"그래, 대답도 잘 하는구나."
그렇게 부자만의 시간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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