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미카엘 어니스트가 인사담당자로 포섭되었다.
회사의 최대주주인 천우와의 첫 대면이 있는 날, 미카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나 코리안 뉴 보이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자네가 코리안 뉴 보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뉴 보이였을까요? 조금 더 멋있는 별명도 있었을 텐데."
미카엘은 웃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말투와 행동에서 매너가 자연스럽게 묻어져 나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의외로군. 보이라는 건 별명인줄만 알았는데 진짜 보이였네?"
"그래서 저와 함께 일할 생각이 없어지셨나요?"
"아니, 전혀. 보스가 누구인 것이 무슨 상관이야. 그의 능력이 어떤 지가 중요한 것이지."
천우가 미카엘 어니스트를 섭외한 것은 그의 인성이 상당히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행적을 보자면 미카엘 어니스트는 인권운동 및 소외계층구제에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휴가철에는 아프리카로 구호활동을 떠나기도 했었다.
과연 말년에는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벌어들인 재화를 사회에 환원하면서 살아왔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싶었어.'
직접 만나보니 감이 왔다.
듣던 대로 편견 없이 천우를 대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을 반드시 채용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보스가 나를 섭외할 때, 이 사람들에 대한 비전을 스스로 보증한다고 섭외를 요청했다면서. 그 근거가 뭔지 참으로 궁금한데."
"으음. 제가 기밀이라고 한다면···."
"기밀이라곤 해도 내가 그들을 섭외해야 할 이유정도는 알아야 협상이 가능하지 않겠어? 나도 얼마를 줘야 적당한 지는 가늠할 수 있어야 하잖아."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였다.
연봉을 협상하는 사람은 미카엘인데 그가 영입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혹시 일어날지 모를 타 기업과의 영입경쟁에서 얼마를 더 줘야 할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천우는 이걸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허나 다르게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는 주식투자담당자 후보인 벤 드노세에 대한 프로필을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MIT공대 출신의 월스트리트 증권맨이죠.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가졌지만 그가 자라온 배경을 보면 왜 증권가로 발을 들였는지 이해가 가요. 그는 공학자 집안의 내력 때문에 공대에 진학하긴 했지만 원래 상경계열에 뜻이 있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금융권에서 여는 대회에 꾸준히 참가 했었고 중학교 때부터는 아버지 몰래 주식에 손을 댔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은 한마디로 떡잎부터 남다른 사람이었다는 소리죠."
"호오···."
"누군가의 뒷조사를 하는 건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좋은 인재를 뽑고 싶어 조사를 해봤어요. 사람을 뽑을 때에 대비해서 신문에 나왔던 몇몇의 행적을 조사했고, 지금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 거죠."
인물도감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처럼 약간 에둘러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건 미카엘 어니스트이 천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조직구성원에 대한 관심이 이리도 높다는 건, 그 조직이 제대로 된 조직이라는 소리지. 좋아, 보스의 인사단행에 대해선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도록 하지. 아니, 품을 이유가 전혀 없겠어."
자신이 만든 조직에 대한 애착. 그것을 가진 보스가 있는 한, 기업은 절대 망할 리 없다는 것이 미카엘의 지론이었던 것이다.
그는 천우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보스."
"저야말로!"
50명을 스카우트 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업계야 말로 돈이 사람을 움직이는 곳이 아니었던가.
사회초년생에게는 평균초봉의 5~10%정도를 더 준다고 제안하면 쉽게 접근이 가능했고 기성세대의 경우엔 지금 받는 연봉보다 5~10%를 더 준다고 하면 웬만해선 이직권유를 수렴하였다.
허나 미카엘은 이것만으로는 절대 이들을 자기사람으로 묶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다른 회사보다 좋은 옵션을 붙여주었다.
바로 커미션의 요율이었다.
통상적으로 부여되는 전속 브로커의 커미션 요율보다 10%정도 더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50명 전원이 입사를 희망하였다.
또한, 추가로 영입되는 사무직에 대해선 회사 성장률에 따른 성과급을 따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버는 만큼 돌려주는 회사, 그것이 미카엘 어니스트가 지향하는 조직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천우는 그의 설계에 대해서 상당히 만족했다.
기왕지사 함께 하는 김에 더 나은 미래를 같이 설계할 수 있다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천우는 단기, 장기에 걸친 폭넓은 통화변화를 예측하여 그래프로 만들어서 지급해주었다. 또한, 주식시장의 변동을 일부 공지해주었다.
허나 이 정보를 열람하는데 두 가지 전재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 조건은 비밀엄수.
두 번째는 개인투자의 금지였다.
회사에서 얻어가는 커미션 이외에 욕심을 내서 천우가 주는 재료를 가지고 개인투자를 하면 곧바로 회사에서 아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원칙으로 회사는 빠르게 안정화 되어 갔다.
천우는 9월, 10월을 기점으로 유가가 빠르게 올라갔다가 다시 안정화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8월에 본격적으로 정상화 국면에 접어들었던 회사는 9월과 10월에 걸쳐 대대적인 고수익을 창출했다.
전속 투자전문가 일동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1, 2차 쿠웨이트 유조선 습격]
처음에 이 악재 소식을 접한 전문가들은 반신반의하면서 투자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미 이란, 이라크의 페르시아 만 유조선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레이건 대통령의 쿠웨이트 유조선 호위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허나 9월, 미 해군의 허점이 노출되고야 말았다.
해군의 호위에도 불구, 유조선이 폭격되었고 10월에 2차 피습을 당한 것이었다.
유가는 빠르게 요동쳤다.
페르시아 만의 긴장이 유가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70년대 오일쇼크에 입증되었다시피 전 세계 시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투자전문가들은 천우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보스는 진짜다···!"
원유관련 펀드 및 채권으로 거대한 수익을 올렸던 HC투자는 부동산으로 눈을 돌렸다.
천우는 미국 내에서 다소 평가 절하가 되어 있던 뉴욕 시내의 부동산과 아시아 시장으로 서서히 자금의 유입을 늘려나가기로 했다.
전속 전문가들은 또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천우가 내려준 부동산 투자의 방침에는 그에 대한 호재 및 현재 악재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었는데, 그 주석이 뉴욕의 재개발과 개도국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의외인 것은 바로 동남아시아 부동산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
"태국···?"
"향후 5년 안에 태국의 부동산 시장이 포화상태로 돌아설 겁니다. 동남아로 가자고요."
"허어, 진심이세요?"
천우의 지시사항을 받은 김영실은 상당히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타이펀드(태국)와 자바 펀드(인도네시아)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핫머니만 물고 들어가는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허나 천우는 이 핫머니가 이제 곧 부동산으로 몰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제 곧 타이펀드 2기가 출범합니다. 그와 함께 바트화 투기세력도 함께 몰리게 되겠죠. 우리는 그때 부동산을 한껏 물고 들어가서 재미를 보는 거예요."
"아아!"
김영실은 아시아 시장을 공략한다면 싱가포르나 홍콩을 생각했지만 천우는 전혀 달랐다.
앞으로 바트화 시장이 과열의 정점을 찍기 전까지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적정선에 팔면서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태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투자하자고요. 그러는 김에 환율로 재미도 좀 보고요."
"바트화 투기까지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파운드화 절하시기에 한 방 제대로 태워주면 아마 재미가 쏠쏠할걸요?"
"허어, 하지만 그걸 다 어떻게 예측하시려는 겁니까?"
그녀의 말처럼 인간은 시장 돌아가는 사정을 전부 꿸 수가 없다.
허나 천우는 달랐다.
"간단해요. 저만 믿으세요."
"으음!"
김영실은 자못 기대가 되었다.
천우가 이번에는 과연 무슨 사고를 치게 될 것인가, 하고 말이다.
***
11월 중순.
전주의 한 여관에서 뜻밖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뭐랍니까?"
"어차피 싹 정리해서 불태워버릴 노친네들,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쪽에서 남은 지분을 틀어쥐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지금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심민당에서 도와준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은데요."
"하하, 우리가 무슨 환경미화원입니까? 아까는 자기 장인을 해치워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종친들까지 정리해 달라?"
"그에 대한 보수는 충분히 합니다. 걱정 마세요."
10월 초, 부동산 일제조사가 시작되기 전.
최희명은 이미 심민당 오인석과 접선하고 있었다.
장인 조의창을 다음 총선에서 확 담가버리기 위해서 미리 오인석과 판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오인석은 조의창이 항상 눈엣가시였고 그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최희명이 찾아와 손을 잡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아무리 지금 중수부가 미친개처럼 날뛰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 최희명이 없었다면 정민당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비록 최희명이 원해서 중수부가 날뛰고 사방에 정민당을 공격하는 신문기사가 나붙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이 사태를 이용하여 오인석이 조의창을 공격하도록 뒤에서 자료를 쭉쭉 풀어준 것이었다.
중수부가 손에 넣은 국세청 자료는 최희명이 가지고 있는 대기업의 뇌물장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 두 가지가 콜라보레이션을 이뤄 지금의 합작품이 탄생하게 된 셈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협의에 들어간 상태였다.
오인석이 최희명에게 물었다.
"좋아요. 내가 당신 장인을 확 담가버리고 현보까지 살려준다고 칩시다. 그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도대체 뭔데요?"
최희명은 여관 구석에 있던 옷장에서 여행용 트렁크를 꺼내어 오인석과 마주앉은 교자상 위에 올려두었다.
쿵!
묵직함이 남달랐다.
사과박스 몇 개와는 차원이 다른 트렁크.
최희명이 그것을 펼치자, 미국과 유럽계 무기명채권이 다발로 쏟아져 나왔다.
촤라라락!
"선금입니다. 나중에 총선이며 대선이며, 저희들이 아주 알뜰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어때요, 이정도면 딜이 되겠습니까?"
"돈으로 나를 포섭하시겠다?"
"한강물 퍼서 선거하는 거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돈 걱정 안 하도록 살뜰히 내조하겠다, 이겁니다. 이거, 전부 다 무기명채권입니다. 단순 자금세탁도 아니고 이정도로 깔끔한 자금을 도대체 어떤 놈이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재벌가의 총수는 그냥 평범한 부자가 아니다.
그가 원한다면 이 세상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돈의 힘, 하지만 돈의 힘을 짓누르는 것이 바로 권력이었다.
쿠웅!
"알아서 뫼시겠습니다!"
최희명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언뜻 치졸해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조의창에게 당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당 돌쇠가 되시겠다?"
"예!"
"만약 우리가 이번 대선에서 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승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다만···."
"도박에서 져도 상관없으니 장인만 묻어버리면 장땡이다?"
"예, 의원님!"
최희명에게 있어 문제는 정치권이 아니었다.
조의창만 없어진다면 얼마를 들여도 그에겐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오인석은 흔쾌히 교자상을 탁 쳤다.
타악!
"뭐, 좋습니다! 한 번 해봅시다."
"저, 정말이십니까?!"
"다만 누군가 총대는 메야 할 겁니다. 현보가 지금까지 뿌린 비자금이 어디 한두 푼이겠습니까? 그 책임을 질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죠."
"···총대 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게 순리 아니겠어요? 혹시 본인이 직접 메시게?"
"아니요. 다 준비해 둔 바가 있죠."
그는 머릿속에 중수부와 종친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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