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장례식이 끝난 후, 천우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천우는 두 친구들과의 시간 속에서도 일주일 간 말이 없었다.
줄리아와 마이클은 그런 천우의 입이 열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뚝딱, 뚝딱.
동아리방에 못질, 톱질 하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두 친구는 가만히 앉아서 천우가 하는 걸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자동차만 20대 이상 만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불현 듯, 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고파."
"우리 귀염둥이! 드디어 말 할 생각이 든 거야? 이 누나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 내 나름대로 생각할 게 좀 있었어."
"그래, 조부님을 보내고 생각할 게 많았겠지. 오늘은 이 꽁치누나가 맛있는 걸 사줄게! 피자 먹을래?"
"피자, 좋지."
그는 일주일 동안 할아버지의 미소를 떠올리며 프라모델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투기와 투자, 과연 그것으로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까?
그것으로 대한민국 정계와 숙부를 족쳐 버릴 수 있을까?
답은 '충분하다'였다.
천우가 짠 청사진은 대략 이러했다.
차근차근 금융가에 대한 영향력을 늘린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금을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에 투자하고 곡물과 국방산업,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원과 무기, 곡물, 부동산은 금융과 함께 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천우는 그것들을 손에 틀어쥘 생각이었다.
'두고 봐라, 내가 싹 잡아서 족쳐줄 테니까!'
그동안 식음을 거의 전폐하고 있었던 천우는 새로운 힘을 되찾았다.
복수심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동력원이었던 것이다.
"우걱, 우걱!"
닥치는 대로 피자를 입에 욱여넣었다.
친구들은 천우가 스트레스로 인해 폭식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괜찮아?"
"사람은 먹어야 살아. 그동안 잘 못 먹었으니까 신체에게 보상을 해주는 거야."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오는 법.
천우는 앞으로 자신이 복수를 하자면 그만큼 대단한 지식과 신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먹었다.
학교에서도 쉬지 않고 먹었고 집에 가서도 먹을 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한희연은 천우의 행동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먹기만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걱, 우걱!"
학교에서 가지고 온 과제를 하고 있던 천우에게 한희연이 물었다.
"천우야, 그렇게 계속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는 먹는 걸 전부 다 소화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 하지만 먹는 것도 적당히 먹어야 건강하지."
"걱정 마세요! 혹시 먹는 게 너무 많아서 가계에 부담이 되어서 그러세요?"
"그건 아니지. 하지만···."
"엄마, 먹는 만큼 운동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인간이 비만으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필요한 영양보다 더 많이 먹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기초대사량)이 정해져 있다.
살을 빼고 싶으면 이 기초대사량보다 적게 먹으면 된다.
아주 단순한 원리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기초대사량이 높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찐다.
인간이 생체를 구성하고 신체를 성장시키는데 들어가는 칼로리가 무지막지하게 높으면 살이 찌기는커녕 끝도 없이 열량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천우가 딱 그러했다.
마샤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허나 인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하드웨어를 개선할 필요도 있었다.
신체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숙주의 신체특성에 맞게 하드웨어를 바꾸어야 했기에 하드웨어 개선프로그램이 장착된 것이었다.
결국 이 초기설정은 나노머신의 무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니까, 천우의 신체가 성장하면 나노머신의 하드웨어도 성장하는 환경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는 정말 하루 종일 먹었다.
그만큼 성장했고, 그만큼 활동영역도 많이 넓어졌다.
6월 말.
미국계 은행 14개가 천우에게 줄을 대고자 찾아오는 형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계 은행과 영국계 은행까지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릴 판이었다.
허나 지금까지는 천우가 그들을 무시했었다.
굳이 급작스럽게 활동영역을 넓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달랐다.
'···실습은 끝났다. 이제는 실전이다!'
그는 더 이상 필립을 전면에 세우지 않고 HC컴퍼니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바야흐로 HC컴퍼니가 월스트리트의 신성으로 떠오를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
87년 7월.
국세청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5월 경,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삿감이 각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다.
이것이 한 달 동안 묵었다가 6월 말경에 전국을 강타하였다.
안 그래도 민주화항쟁으로 전국이 뜨거웠던 6월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이 전국각지에서 빗발쳤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심지어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그 결과, 6.29선언이 있었고 연내 개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결국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6월 말, 신문사들은 여당인사들의 정치비자금 횡령 사건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이 파장은 엄청났다.
안 그래도 개헌과 독재타도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마당에 횡령사건까지 대대적으로 터지다니, 정민당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리고 말았다.
비자금은 국세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국세청이 안기부의 압박을 받아 재벌가 세무조사를 미끼로 돈을 뜯어냈다, 그것이 다시 안기부로 흘러들었다가 CP로 전환되어 나왔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기자들은 순식간에 국세청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이봐요, 문 좀 열어보세요!"
쿵쿵쿵!
국세청 앞에는 기자들과 함께 하나 둘 시민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했다.
독재정치의 자금줄이 되어주었던 국세청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국세청 차장 조필규가 청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청장님, 조차장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
"청장님?"
순간, 조필규는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적인 자기비관으로 인해 사람이 목숨을 끊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지 않던가.
허나 조필규는 문을 열자마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하고 말았다.
"허참!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람?"
이미 국세청장은 어디로 튀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이 성난 벌떼처럼 몰려들었는데도 국세청의 수장이라는 작자는 오히려 피난을 가기 바빴던 것이다.
조필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놈···. 제 한 목숨 부지하겠다고 평생을 동고동락한 부하들을 버려?"
"선배님,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잘못하면 우리가 다 뒤집어쓰고 옷 벗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말조심해. 각하께서 안기부를 통해서 직접 조성하신 자금이야. 아무리 기자들이 날뛴다고 해서 저놈들이 뭘 어쩌겠어?"
"아아!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 안기부의 운영자금을 여당에서 정치자금으로 빼돌리던 것은 꽤나 오래 된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선은 물론이고 총선 때마다 떡이며 돈을 돌리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자금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그건 바로 대기업의 주머니였다.
국세청을 압박해서 대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한다고 선포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법 한 번 안 어기고 사업하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거기서 거두어들인 자금을 안기부의 운영자금으로 돌려놓고 대통령과 그 여당들은 사방 천지에 돈을 마음껏 뿌리고 다녔다. 그렇게 만들어 진 정권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그 유서 깊은(?) 비자금에 대한 사실을 낱낱이 파헤친다니.
얼마 전만 해도 그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허나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조필규는 지금까지 자신이 뒤를 봐주었던 검사들에게 쭉 연락을 돌려보았다.
"유 검사? 나야, 조 부장! 지금 우리 청 앞에···."
-뚝.
전화는 받는 그 즉시 끊어져버렸다.
물론 그는 곧장 전화를 돌렸고, 다른 곳에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이제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차장님, 일단 우리들도 자리를 뜨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미쳤어?! 이제 곧 경찰이 도착할 거야. 공무집행방해로 저놈들 싹 잡아 쳐 넣으면 끝날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진심이세요?"
"씨발, 그럼 다른 뾰족한 수 있어?"
"그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조필규의 머리도 정상은 아니었다.
"다들 중요한 자료들 금고에 넣어놓고 지금부터 입에 자물쇠 단단히 채워. 남산에서 곡소리 듣기 싫다면 말이야."
"넵! 알겠습니다!"
남들 고혈 빨아먹기 바쁜 세리들이 굳이 남산까지 갈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조필규의 말에 따라 재빨리 국세청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나 바로 그때, 국세청의 정문이 열렸다.
콰앙!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나왔습니다!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대기해주세요!"
"허억! 중수부에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국세청 공무원들은 가만히 두 손을 든 채 검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갈등은 되었다.
있는 그대로 자료들을 모두 빼앗겨야만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버텨야 하는가?
조필규가 외쳤다.
"수사에 협조해드려!"
"네···?!"
"검사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만 선배님,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어차피 최종승인권자는 청장이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
지금 이 자리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만약 청장이 부장들에게 총대를 메라고 지시했다면 그 중 몇 명은 눈치껏 국세청을 나갔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대로 판이 흘러가면 어차피 국세청장 밑은 전부 물갈이를 당할 텐데, 그럴 바엔 청장에게 덮어씌우는 편이 낫다고 조필규는 판단한 것이었다.
중수부 검사 최용팔이 조필규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째, 이 수사에서 좀 빼드려요?"
"저희들은 그저 검사님께 협조할 뿐이지요!"
"좋아요. 그럼 청장을 찍어낼 자료들을 전부 가지고 나오세요. 최소한 철창신세는 면하게 해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들은 청장이 여권에게 대량의 CD(양도성예금증서)를 만들어 돌렸다는 사실이 담긴 자료를 가지고 나왔다.
우연치 않게도 그 리스트에는 정치인들의 자세한 프로필까지 죄다 나와 있었다.
최용팔의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증거는 확보된 셈이다.
조필규는 웃고 있던 최용팔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수부는 원래 검찰총장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기관이라고 들었는데···."
"뭐가 궁금한 겁니까? 당신 먼저 감옥에 보내줘요?"
"아, 아닙니다!"
"입 닫고 시키는 것이나 잘 하세요."
최용팔은 궁금해도 그저 입을 닫기로 했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철창신세를 지기는 싫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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