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38화 (38/202)

19.

87년 3월.

얼어붙었던 뉴욕 땅이 어느 새 슬슬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천우는 신문을 펼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경재지면 1면에 자신의 별명이 떡하니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리안 뉴 보이, 슈퍼보이로 등극하다!]

[월스트리트가 주목하는 코리안 뉴 보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코리안 뉴 보이의 동맹세력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신문에는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금융투자본부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천우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면서 간절한 만남을 기대한다고 적어두었다.

실은 천우의 진외종숙이 조카를 보고 싶다고 신문에 광고까지 한 셈이었다.

"거참, 그림 한 번 이상하군."

그림이 이상하긴 했지만 천우가 이만큼 확 뜬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천우는 지금까지 손실률 0%를 자랑해왔다.

그것이 지금까지 쭉 이어져 유럽계열 화폐의 강세까지 예언한 것이었다.

달러가 내려가면 상대적으로 오르는 화폐가 있기 마련이다.

엔화와 마르크화는 오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천우는 정확하게 87년도부터 유럽계 화폐가 본격적인 절상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천우는 그중에서도 87년도 3월에 만기가 되는 파운드화 선물환에 대대적 투자를 감행하였다.

영국은 얼마 전, 세율인하 및 재정차입억제를 주요 안건으로 내걸었고 엔화와 마르크가 안정되면서 파운드화가 한 달 사이에 무려 5%씩이나 올랐다.

파운드화의 유례없는 폭주였다.

사실, 그 이후로는 파운드화의 폭주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달러화 하락의 반사효과로 다른 국가의 화폐는 다 오르는데 급진적인 금리인하 정책 때문에 파운드화는 절하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천우는 한 차례 더 꺾어서 87년도를 기점으로 유럽권 화폐를 매입하겠다고 했으니, 귀신도 울고 갈 예언이 아닐 수 없었다.

딩동!

신문을 접을 때쯤 해서 초인동이 울렸다.

"천우, 학교가자!"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천우의 친구 마이클 베넷이 서 있었다.

마이클 베넷은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의 백인 청년이었는데, 워낙 말이 없어서 학교에선 거의 유령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허나 그에게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았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그는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나고 암산능력과 암기력이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두 사람은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친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둘이 있으면 편해서 같이 다니는 것뿐이었다.

"가자."

"응."

한희연은 천우의 아침만 차려주고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여나 애써 만든 청년 친구가 천우를 애 취급 할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허나 어차피 천우는 지금도 애 취급을 당하고 있긴 했다.

물론, 한희연이 생각하는 애 취급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감자야!"

"어? 꽁치누나다!"

"우리 귀여운 감자!"

아침 댓바람부터 금발의 미녀가 천우를 끌어안고 여기저기 뽀뽀를 하고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녀는 바로 보스턴의 유명잡지 표지모델 출신의 늘씬한 8등신 미녀 줄리아 테일러였다.

줄리아는 천우가 감자를 닮았다면서 매우 귀여워했으며 어디를 가든 그를 옆구리에 꼭 끼고 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천우도 이런 살가운 누나 한 명쯤 있는 게 그리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나치게 살갑다는 정도랄까.

"누, 누나, 나 숨 막혀···."

"이게 다 이 천하제일 미녀님 방식의 애정표현이야! 으흐흐, 인상 찌푸리는 것도 귀여워!"

마치 최호명이 오버랩 되는 듯한 그녀였다.

천우는 그녀를 한국 발음 그대로 '누나'라고 부른다.

엘더 시스터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더니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었다.

어감이 너무 귀엽다는 이유였다.

별명이 꽁치인건 그저 꽁치를 좋아하기 때문,별 뜻은 없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도 상당히 외향적인 그녀가 마이클과도 상당히 죽이 잘 맞는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은 이 세 사람이 친해진 것이 컬럼비아 경영대 최대의 난제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마이클에게도 격한 인사를 건네려 했다.

"마이키, 굿모닝! 우웅···!"

"꽁치냄새 나."

"···뭐야?!"

"가자. 수업에 늦겠어."

"쳇, 이것들은 이 미녀 모델님께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알아, 인기 많잖아. 네가 그 남자들을 족족 다 차버리는 것이 문제지."

"쯧, 그놈들은 머리가 비어서 재미가 없어! 우리 귀염둥이들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다면 모를까."

이쯤 되니 천우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어느 구석이 귀엽다는 것일까.

사실, 천우는 이제 귀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신체사이즈는 아니었다.

이제 그의 키는 153cm로 또래보다 훨씬 컸고 어지간한 성인여성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이클이 귀여운 남자일까?

그는 날카로운 인상에 키가 190cm쯤 되는 제법 꺽다리였다.

귀여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누나는 귀여움의 기준이 도대체 뭐야? 애늙은이? 꺽다리?"

"쿡쿡, 아니! 내가 좋으면 그냥 귀여운 거지! 기준이 꼭 필요한가?"

"뭐, 그건 그렇지만."

세상에는 마이페이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천우는 주변의 시선은 따가울지라도 본인만 행복하다면 무슨 문제인가 싶었다.

"그래, 누나만 만족하면 된 거지."

세 사람은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 지하의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등교 전에 이곳에 들려 수업에 필요한 서적을 챙기거나 과제물을 보충하기도 했다.

여긴 세 사람이 하교 전까지 수업시간을 빼놓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아리방이었다.

이 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 되어 있는데, 투자동아리나 봉사동아리와 같이 학교에서 특별활동 점수를 주는 동아리가 상당히 많았다.

이 세 사람은 '소수의견 투자'동아리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이 소수의견 투자라는 것은 카렐 학파의 역발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우량주식은 철저하게 배재하고 앞으로 미래가 촉망되는 비상장주식에 투자하는 기법을 연구하는 동아리였다.

요즘 카렐 학파는 사실상 끝물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었다.

아무리 체스터 카렐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인물이라곤 하지만 그의 지론이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천우는 그 의견들을 정통으로 무시해버리는 동아리를 만들어 연구를 시작한 것이었다.

천우는 이곳에서 역발상 이론을 완성시켜서 진외증조부의 이론을 깔아뭉개려는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마이클은 천우에게 유가에 대해 물었다.

"최근에 석유사업에 투자했다면서. 한창 하락국면이라고 하던데,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 리스크만큼 수익성은 충분해. 최대한 길게 봐야 하지만 말이야."

지금은 바야흐로 최고의 저유가 시대다.

최근 천우가 투자한 미국계 석유회사의 주식은 84년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 하락세였다.

얼마 전에는 한국계 석유관련 주식도 대거 매입했다.

한국은 거듭해서 기름 값을 내리고 있었다.

86년에 벙커C유를 15%, 나프타가 12%, 가솔린이 5.5%를 내리더니 이미 국내복합단가가 20달러 선을 깨네 마네 말이 많았다.

줄리아도 천우가 미국과 한국의 석유산업에 대거 투자해 두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국제원유가의 인하 폭이 5달러잖아. 그중 0.75달러가 관세로 흡수되고 4달러 25센트가 국내유가에 반영되는 셈이었는데,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보면 벙커c유만 주야장천 할인해주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국민생활관련 사업은 주춤하게 될 텐데, 그건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한국 정부는 산업유류에 대한 가격 인하를 통해서 경기활성화를 꾀하고 있었다.

벙커C유나 나프타 같은 산업용 유류는 10%이상 대폭 할인한데 비해 등유와 경유는 7.5%로, 휘발유는 5%로 인하폭을 제한했다.

"물론, 생활용 기름 값이 산업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긴 하지. 그래서 주가도 꽤 많이 빠졌고. 아마 당장은 조금 힘들겠지?"

"그런데도 투자를 한다고?"

"유가는 환율이랑 비슷해. 호재와 악재에 상당히 민감하지. 만약 국제정세 돌아가는 판도만 꿰뚫을 수 있다면 이보다 수익률이 더 좋은 건 없어."

"바닥을 찍었을 때 사둔다, 그런 건가?"

"그게 우리 동아리의 주목적 아니었어?"

"아아, 하긴."

이제는 단순히 예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이할 수 있는 학문을 만들겠다는 것이 천우의 목표였다.

물론, 그 학문이 널리 퍼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연구를 통해서 천우의 분석능력과 지식은 더욱 넓어질 테니 말이다.

***

현보 그룹 총수 집무실 안.

최충의 부자가 제 1 비서실장 오안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중수부에 줄을 대 본 결과, 현보를 정조준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제기랄. 그렇게 뇌물을 쳐 먹였는데도?"

"특히나 이번 조사에서는 한결의 부동산 투자를 집중적으로 물고 뜯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외압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설마하니···."

"제 생각에는 작은 도련님께서 드디어 일을 내려 작정한 것이 아닌가, 그리 사료됩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내 사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만, 그놈이 본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겠어."

"잘못하면 아버지까지 딸려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놈이 정말 우리를 고발할까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설마하니 정말로···."

"그뿐이겠냐. 이참에 아예 네 숙부들까지 깡그리 잡아 족칠 생각인 게지."

"무슨 카드로요?"

"카드가 왜 없냐. 우리가 내부거래로 챙긴 이득이 얼마인데."

"아아!"

최호명이 오안태를 쳐다보니,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 2 비서실에 알아보니 작은 도련님께서 내부거래 장부를 조용히 털어갔답니다."

"비서실에선 그걸 몰랐단 말입니까?"

"면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 2 비서실장이나 다른 내부 조력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희명은 잔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리고 유난히도 무언가에 꽂히면 그걸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었다.

최호명은 이제야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최호명과는 달리 최충의는 오히려 홀가분한 듯했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벌어질 내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우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최대한 인맥을 쌓아두었다는 점과 우리 집안의 정통후계자로 이미 얼굴이 꽤 많이 팔렸다는 점이겠지."

최충의는 컨디션이 따라주는 한에서 최대한 많은 비즈니스에 천우를 데리고 다녔다.

막상 천우의 입장에서는 그저 잠깐 스친 얼굴들이었겠지만 최충의는 뒤에서 천우가 집안의 적통을 이을 장손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었다.

그는 이제 다 이루었다는 표정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정말 편안하게 갈 수 있겠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부정 타게 시리."

"의사의 말이 길어봤자 한 두 달이란다. 지금도 마약성 진통제 덕분에 버티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병상에 누워서 초라하게 죽음이나 기다렸을 거다."

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한 회광반조, 최호명은 아버지의 죽음이 이렇게나 가까이 왔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허나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미 최충의의 안색만 봐도 그가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천우가 못 봐서 얼마나 다행이냐. 다만 내가 죽는다고 해서 그놈이 비뚤어질까봐 그게 걱정이구나. 자칫 숙부가 조부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냐."

"······."

"아무튼 간에 호명아, 이제 슬슬 준비해두었던 계열분리 시작하자꾸나. 남은 건 다 내가 알아서 하마."

정말 끝인 것일까.

최호명은 아버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허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겠어요."

"힘내라. 아들이 있잖냐. 내가 이루지 못했던 꿈은 내 손자가 내신 이뤄 주리라, 나는 그리 믿는다."

최충의는 이스트우드&카렐 컴퍼니에게 전달해두었던 유언장을 3개의 법무법인과 손잡고 공개하기로 최종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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