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86년 9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학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천우는 오금자의 손을 잡고 컬럼비아 교정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조손은 청동으로 만든 동상 앞에 멈추어 섰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엄청난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진외증조할아버지다!"
"그래, 맞아. 체스터 카렐이시지."
경영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동상은 컬럼비아의 자랑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천우는 대학에 입학하니 세삼 진외증조부의 존재감을 절감하게 되었다.
오늘 오전에 끝이 난 입학식 이후, 존 헤네시가 학부의 볼일을 마치고 천우를 찾아왔다.
"천우 군!"
"안녕하세요, 교수님!"
"잘 지냈지?"
"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로구나. 그나저나 키가 아주 쑥쑥 자랐는데?"
현재 천우의 신체지수는 143cm에 38kg이었다.
올해 8살 천우의 키가 10세 평균키를 훨씬 상회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풋볼클럽에서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풋볼이요? 미식축구요?"
"그래, 그거! 컬럼비아는 풋볼클럽도 유명하잖니."
"아하! 그랬구나."
"그건 그렇고, 요즘은 투자 같은 건 안 하니?"
"그게···."
천우가 오금자의 눈치를 보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주억거림이 긍정을 뜻하자, 천우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 전부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AI의 성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자신이 맞는 길을 가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었기 때문에 천우는 항상 평가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존 헤네시의 평가는 이러했다.
"B정도 주고 싶은데?"
"B면 높은 건가? 혹시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경제학적으론 아주 훌륭하지만 은행권을 끌어들인 목적이 불분명하잖니."
"목적이라."
"그저 단순히 이자만 받아먹겠다고 생각하고 은행권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네 생각은 틀린 거란다. 어떠한 세력을 구성하려면 명확한 방향성과 목적을 가져야해."
"방향성!"
"그래, 방향성 말이야. 또한, 그에 따른 책임감도 생각해봐야해. 과연 무분별한 세력증식으로 경제라는 자연성을 훼손하지 않을 것인가 말이야."
그제야 천우는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지금 HC투자라는 이름의 괴물을 만들어 가고 있을 뿐, 그 괴물이 만든 사건의 책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제가 입학하자마자 교수님께 한 가지를 배웠네요."
"하하, 그랬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간에 투자고문을 해주어서 수익을 낸 건 아주 잘 한 일이다. 이보다 더 실전감각을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니?"
천우는 자신의 투자고문 정책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는 존 헤네시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저의 고문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투자전략이라면 이미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요, 아까 말씀하셨던 방향성과 책임감 말이에요. 그것까지 생각한다면 교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존은 천우의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주었다.
"제자의 부탁을 거절하는 스승이 어디 있겠니? 그래, 같이 한 번 고민해보자꾸나."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앞으로 내 문하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감사하면 어쩌나?"
천우는 제대로 된 스승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강남의 한 요정에 대검 중수부장 이혁진과 최희명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었다.
쿵턱!
최희명이 이혁진에게 술잔을 한 잔 넘겨주었다.
"하하, 분위기 좋네! 얘들아, 이분이 오늘 너희들 서방님이시다! 잘 뫼셔라!"
"네, 오라버니!"
이혁진은 자신의 양팔에 달라붙은 여자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는 슬그머니 웃음을 보였다.
여자들은 오늘 팁이 아주 후하게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한껏 아양을 떨어댔다.
"서방님, 아아!"
"···다들 나가 있어."
"응? 뭐라고요?"
"귀 먹었어? 나가 있으라고."
이혁진은 분명 잘 웃는 편이었지만 그 미소가 어쩐지 좀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검찰 특유의 날카로움 때문일 것이다.
최희명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에잇, 좋다 말았네! 한참 좋은데 왜 그러십니까?"
"···제가 누구인 줄 아시고 이러는 겁니까."
"어허, 참! 검사는 사람 아닙니까? 이럴 때 코도 좀 풀고 그러는 거지."
"남이 코풀어 주는 건 질색입니다만."
"그래도 우리 장인어른께서 다 생각해주셔서 마련한 자리인데 너무 뻣뻣하게 굴지는 맙시다."
최희명은 이혁진에게 금괴 세 덩이를 건네주었다.
금괴 한 덩이가 거의 성인남성 주먹만큼 컸다.
"이거 봐, 우리 장인어른께서 이 부장님을 얼마나 믿고 계시면 이런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원하는 게 도대체 뭔데 이런 것까지 주시는 건데요?"
"말 좀 잘 들으라고 주시는 선물이죠. 성수동에 아주 대저택을 가지고 계시던데, 이런 돈 한 푼도 안 받아봤다면 거짓말인 거, 아시죠?"
검찰과 권력은 한 줄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이혁진도 자신에게 뭔가 중요한 오더 하나쯤은 내려올 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헌데 문제는 왜 굳이 메신저가 최희명이냐는 것이었다.
"나 같은 끄나풀 따위에게 의원님께서 직접 황금을 사사해주신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시죠."
"우리 부장님께서 의심이 많으시네."
"의심 없이 이 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하여간, 이래서 검찰은 골치 아파.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
그는 술상을 옆으로 스윽 치우더니 이내 두툼한 장부를 한 권 꺼내놓았다.
범 현보 일가의 내부거래 장부였다.
"···뭡니까?"
"뭐긴요, 우리 본가 좀 털어달라는 뜻이죠."
86년 10월 중순,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부동산 실태조사 일정이 잡혔다.
특히나 부동산 임대사업자나 투자사업자들에 대한 조사가 타이트하게 이뤄진다고 정부는 예고했다.
최근 문제가 되기 시작한 탈루, 탈세와 관련하여 부동산임대가 주 게이트가 된다고 하여 이뤄진 조사였다.
한마디로 부동산으로 뒷돈 챙겨놓고 상납 안하는 것들을 싹 잡아서 족치겠다는 뜻이었다.
헌데 최희명은 그 조사에 현보의 이름을 넣은 것이었다.
이혁진은 크게 놀랐다.
"회장승계만 견고히 하게끔 해드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럴 것 같았으면 내가 무려 중수부장까지 등판시켰겠어요? 이렇게 공사다망하신 분을?"
"그럼 뭡니까?"
"우리 형이 요즘 일본 쪽으로 부동산을 많이 빼돌리고 있더라고. 헌데 그거 따지고 보면 다 내 재산이잖아요. 안 그래요?"
"뭐야, 설마하니 형을 묻어달라고요?"
"왜요, 그럼 안 되는 거예요?"
이혁진은 황당해서 그만 웃고 말았다.
"허참,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네. 아니 뭐. 나야 별 상관없지. 하지만 그쪽 종친들은?"
"그거야 중수부에서 알아서 해주시는 거고."
최희명은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금괴를 쫙 깔기 시작했다.
아무리 적어도 그 금액이 수 십 억은 될 법했다.
"자, 금괴를 궤짝으로 투자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갑부라도 이정도 비자금 돌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알고 있으시죠?"
"판때기 깔아주었으니 알아서 해라, 이겁니까?"
"잘 아시네요."
"요즘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왕자의 난을 벌이겠다?"
"아니, 말은 바로 하셔야죠. 왕자의 난이 아니라 숙청이라고 말입니다."
"숙청···."
자기 손으로 일일이 쳐내는 것보다 권력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는 걸 최희명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혁진은 어쩐지 그런 그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졌다.
"성사만 잘 된다면 일본 쪽 부동산 좀 떼어드릴게. 어때요?"
"됐고. 금괴만 받아서 잘 쓰겠습니다. 다만, 나중에 우리가 분탕질 했다고 손가락질하면 곤란합니다."
"뭐 이렇게 사람이 청렴결백하지? 정말 부동산은 필요 없어요?"
"됐습니다."
이혁진은 더 이상 최희명과 깊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최희명의 생각은 달랐다.
"어허, 그래도 사람이 생각해서 준다는데 거절하면 씁니까?"
"···뭐요?"
"다 생각이 있어서 주는 거니까 받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최희명은 이혁진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그 명함에는 '심민당'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이혁진은 경악했다.
"설마 자기 장인을···?!"
"사람이 줄을 잘 서야죠. 어떻게 오늘 내일만 보고 삽니까? 몇 년 후를 봐야지."
"···당신 미쳤어요?"
"미치긴, 세상에 고인물이 썩는다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장인에게만 붙어먹어서 쓰겠습니까?"
이혁진은 아까부터 최희명에게서 뭔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데 이제 그 위화감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사!'
그는 독사다.
소리 소문 없이 자신의 혈육까지 감방에 쳐 넣을 정도의 냉혈한.
토사구팽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주인을 솥에 담가놓고 자기가 주인행세를 할 놈이 바로 최희명이었던 것이다.
***
86년 11월.
미국 은행가 7개 은행의 매출이 3개월 만에 40% 이상 신장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7월부터 10월 현재까지 이들 은행이 만들어낸 천만 달러 이상 여신의 부실채권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심사조건을 갖추고 여신을 하더라도 분명 부실채권은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단 한 건의 부실채권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 비결은 철저한 분석에 의한 운영이라고만 말해두었지만 사실, 이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코리안 뉴 보이의 존재였다.
미국계 투자금융들은 이제 슬슬 코리안 뉴 보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 같은 공룡 급 투자금융에서도 코리안 뉴 보이의 정체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뉴욕 맨해튼의 체스터 카렐 센트럴 그룹 본사에도 이 얘기가 들어갔다.
"정체 파악이 전혀 안 된다?"
"네, 본부장님.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그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계 회사 등기에 이름 석 자라도 나와 있을 거 아닌가?"
"이름만으로는 수소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계 정보력에도 한계는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금융투자본부장 아론 화이트는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그의 정체를 수소문하고 있었으나 연일 허탕이었다.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음, 정체불명의 투자가라. 멋있지 않나?"
아론 화이트는 체스터 카렐 센트럴의 창시자이자 자신의 외조부인 체스터 카렐과 같은 투자가를 동경하고 있었다.
비록 체스터 카렐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긴 했지만, 등장 1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의 금융계를 뒤흔들고 있는 그의 행보에 충분히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건 쪽에 한 번 줄을 대봐."
"만나보시게요?"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꼭 보고 싶군."
"흐음, 하지만 그가 과연 우리를 만나줄까요?"
"저런 어중이떠중이 은행이 아니고 체스터 카렐 센트럴이야.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은 사람도 있겠나. 투자파트너로 삼을 생각도 있다고 전해봐."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접선은 해보겠습니다."
아론 화이트는 일주일 정도 업무를 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안 뉴 보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일주일 후.
아론 화이트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말았다.
"저쪽에서 접선을 거부했답니다."
"···뭐? 우리는 무려 체스터 카렐 센트럴이라고! 그런데도 거부를 해?"
"뭔가 자신만의 철칙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매머드 급 금융집단이라고. 우리를 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혹시 지금 거래를 맺고 있는 은행들이 많아서 그런가? 혹시 나중에···."
"더 이상 연락하지 말랍니다."
"허어!"
단박에 차여버렸다.
그것도 아예 여지없이 말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아론 화이트는 그런 그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멋있군!"
"···네?"
"다시 한 번 접촉해봐. 될 때까지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신통방통한 사람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어중이떠중이 은행처럼 1.5%씩 수수료를 뜯길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럼 내가 자네에게 반대로 물어보도록 하지. 자네, 당장 내일의 환율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거야···."
"이거 봐, 모르잖아! 세상에 그런 사람은 또 없어. 초단기 환율을 정확히 맞춰서 손실률 0%를 만든다는 건 정말이지 예지능력이 없고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내 말 알아들어?"
만약 코리안 뉴 보이가 한두 번 환율을 맞췄다면 모를까, 그는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쉬지 않고 정답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아론 화이트의 눈에 멋있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끝까지 수소문해."
"예, 본부장님."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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