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34화 (34/202)

17.

현 시점의 달러화의 가치는 상당히 절상되어 있는 상태, 만약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절하되어 있는 엔화를 달러화로 구매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달러화는 가치가 높고 엔화는 낮으니 당연히 엔화를 보다 많이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만약 9월 플라자 합의 이후 10월에 엔화가 급등하는 시기에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엔, 달러를 바꾸게 된다면···.

'으흐흐, 내가 가진 차트만 있다면야 당연히 개이득이지!'

선물환에 한 30억 걸어놓고 천우는 그 나름대로 또 다시 하루하루 외화를 거래하면 된다.

허나 문제는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은행이 있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80년대 최근, 선물환 거래의 동향을 보자면 개인과 개인이 거래하는 과정에 은행이 중개를 서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믿을 만한 은행이 있다면 은행과 개인이 직접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선물환 거래를 해 줄 수 있는 은행만 있다면야 천우는 꽤 많은 엔화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엔화를 꽁꽁 쟁여두었다가 엔고 현상이 터지면 반대로 절하되는 화폐를 환투기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엔저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 또 다시 반대로 환투기, 아마 은행만 제대로 섭외한다면 환율만으로도 이득은 무한대였다.

추후에 국내 통화선물 시장이 안착된다면 보다 안정적으로 거래할 수도 있겠지만 선물환 거래는 보다 많은, 약간은 변칙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천우는 그 대상을 잡아두려는 것이었다.

필립은 천우의 환투기 얘기를 듣더니 상당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야 너와 은행을 이어주고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먹으면 그만이지만 무조건적인 투기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저도 알지만 진외증조부님의 이론에 의하면 저는 분명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거예요."

-흠, 그렇지만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필립은 천우의 파트너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긴 했으나 여전히 그가 아직 어린 투자자라는 것을 감안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쉽게 은행과 은행을 연결시켜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9월이 되기 전에 얼른 약정을 맺어야 하는데···.'

투자에도 타이밍이 있지 않던가.

지금 은행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협상해서 2~3월에 약정을 맺어야 10월쯤에는 거래가 이뤄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우에겐 지금 시간이 없다는 소리였다.

허나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천우는 무리수가 없는 방법으로 필립을 설득하기로 했다.

"아저씨, 외화시장은 이제 곧 반전된 거예요. 얼마 전에 G5가 만났잖아요?"

-으음, 그랬었지.

지난 17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 G5재무장관회의에서 달러화 폭주를 막기 위한 합의가 이뤄졌고 각 통화별로 대 달러환율이 일정수준을 밑돌 때에 상호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뤄졌다.

미, 영, 불, 일, 서독이 합의하였고 그밖에 이탈리아와 스웨덴, 스위스, 캐나다, 호주 등이 이 합의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서 플라자 합의의 서막이 열린 것이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달러화를 절하시키기 위해서 연준에서 통화를 완화한다고 치자고요. 그렇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요?"

-그거야 그렇지.

"원론적으로는 달러화를 상대적으로 절하시킬 수 있는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요. 지금 재무장관회의가 있었다고 해서 달러화가 내려갔나요?"

-으음, 그렇지는 않지.

"그럼 결국 누군가는 달러화 가열에 물을 부어주어야 한다고요. 제 생각엔 그 대상이 일본과 서독이 될 것 같아요."

-엔화와 마르크가 절상 될 것이라는 소리야?

"절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러화 독주는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엔화가 쭉쭉 올라갈 거라니까요?"

-흐음.

"지금의 물가를 보세요. 달러화가 워낙 고공행진이라 전 세계의 소비심리까지 위축되어 있잖아요. 얼마나 힘들면 비스트코가 저렇게 비틀비틀 거리겠어요? 이대로는 다 같이 힘들어요. 이럴 때 누가 총대를 멜까요?"

-일본이 이 상황을 타계할 구원투수로 나온다는 거니?

"일본에겐 미안하지만 구원투수가 아니라 총알받이 정도가 되겠죠."

달러화의 절하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건 미국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국제무역의 기준 화폐는 달러이기에 달러 강세에 기준금리 인상은 신흥국이나 개도국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벼랑 끝에서 선 미국이 일본의 등을 떠 밀 것이다?

"네, 맞아요."

-흐음.

"아저씨, 저를 한 번 믿어주세요! 확실히 이득을 봐서 수수료도 두둑이 챙겨드릴게요!"

이미 천우는 곡물시장이 한 차례 흔들렸다는 사실을 알아맞힌 이력이 있었다.

필립은 미친 척 그를 한 번 더 밀어줘보기로 했다.

-좋아, 마침 내가 잘 아는 은행이 하나 있어. 그 은행과 연결을 시켜 줄 테니까 환투기 한 번 해봐!

"와아,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다만 네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지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제가 설득할게요! 우선 연결해서 투자를 진행해주세요."

-그래, 알겠다.

천우는 한동안 본가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조부모가 너무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는 당장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네, 현보 일가입니다.

"어라? 집사 할아버지?"

-허허, 작은 도련님 아니십니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허태용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그가 어째서 본가의 전화를 받은 것일까.

"할아버지도 편찮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허허,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제 조부님이 걱정되어서요. 많이 편찮으신가요?"

-이제 좀 괜찮아지셨다고 하네요. 내일부터는 본가에 오셔도 될 겁니다.

"네, 알겠어요!"

다음 날, 천우는 날이 밝자마자 본가로 달려갔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분위기, 허태용도 자택으로 돌아가서 그의 조부모만이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천우 왔냐?"

"할머니도 잘 계셨죠?!"

"오냐, 우리 강아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항상 약 따위를 올려두는 거실의 선반 위에도 영양제와 몇 가지 약을 제외하면 그 양도 확 줄어 있었다.

먹는 약이 줄었다는 건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 아닐까,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단순하지만 그게 보통이 아니던가.

"할아버지, 이제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래. 거뜬하다. 미국에는 잘 다녀왔냐?"

"있잖아요, 할아버지···."

천우는 조부모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설명하기 시작했다.

꽤 긴 이야기였지만 두 부부는 끝까지 천우의 말을 경청해주었다.

오금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그러니까 환투기를 하겠다는 거지?"

"확실한 건수에요!"

"좋아, 그렇다면 할머니가 좋은 파트너를 하나 더 붙여주마."

"파트너요?"

"혹시 이스트우드 컴퍼니라고 들어봤니?"

"어? 그건 미국계 투자은행이잖아요."

"그래. 정확히는 이스트우드&카렐 컴퍼니라고 부르지."

"아아!"

"네 진외증조모께서 만드신 회사란다. 우선 필립과 함께 손을 잡고 거래하다가 이쪽과도 같이 연계해보렴."

"우와, 정말요?!"

"그래. 우리 강아지가 증조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른다니 기특해서 해주는 거란다."

"헤헤, 할머니 최고!"

"조만간 할미와도 미국을 같이 가자꾸나. 가서 네게 필요한 것들을 갖춰주도록 하마."

"감사해요!"

천우는 단순히 자신의 환투기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필립과 이스트우드를 동시에 등에 업었지만, 그건 마샤가 가진 미래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일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나비효과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

2.12 총선이 끝났다.

여당 정민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나 한민당이 예상을 뒤집는 의석수를 갔다.

허나 한민당을 비롯한 야권인사가 대거 심민당으로 유입되면서 사실상 한민당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심민당이 보유한 의석수는 현재 102석, 야권의 세대교체가 현실로 다가온 셈이었다.

정치권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최호명은 그야말로 질풍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85년도 주택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연립주택이 대거 보급되는 가운데 보급 물량의 35% 이상을 현보에서 가지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결 철강은 현보 내부에 철근을 제공하였고 해당 내부거래로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이득이 생겨났다.

뿐만 아니었다.

범 현보 일가에서 한결 철강과 한결 식품에 일감을 대거 밀어주는 바람에 한결의 주가가 연일 상승하고 있었다.

85년 5월, 한결은 제 3차 해외투자 기획을 단행하였다.

현보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 및 한결의 자체 매출로 인해 생겨난 이익금을 대대적 해외투자로 돌린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 차례 투자의 단맛을 본 이사회와 주주총회는 당연히 한결을 지지해주었다.

한결은 미국계 투자회사인 '슈팅스타'와 손을 잡고 부실채권 및 재보험에 투자하기로 했다.

슈팅스타와의 공식 면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난 최호명은 미국의 유명 호텔 플라자호텔에 투숙하기로 했다.

똑똑.

최호명이 기거하고 있는 객실로 긴 생머리의 여성 두 명이 찾아왔다.

"이사님, 에일리 넬슨입니다."

"들어오세요."

에일리 넬슨과 그녀의 비서로 알려져 있는 엘리자베스 스톤이 최호명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슈팅스타의 대표이사로 등기되어 있는 에일리 넬슨은 원래대로라면 최호명과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허나 사실은 많이 달랐다.

"은행지주회사 설립 건은?"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블랙하워드 은행은 RS컴퍼니의 자회사가 되는 겁니다."

"좋아요. 부실채권으로 나온 지방은행 인수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블랙하워드 뱅크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은행 여섯 곳을 찾아 인수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필요한 자금은?"

"현재는 한화로 대략 3천억 내외로 추산되며 실제 협상에서는 그보다5~10% 선에서 절충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습니다. 신속히 진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호명은 최충의의 말대로 해외 은행을 인수하고 해당 은행을 통해서 문어발식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 아니라면 블랙하워드를 키울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접니다."

-그래. 인수 건은?

"일단 틀은 다 잡았습니다."

-그럼 쉬지 말고 끝까지 쭉 밀어붙여.

"하지만 아버지, 정치권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자본유출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 아닙니까."

-걱정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한다.

얼마 전, 뇌물을 가져다 바친 이후로 최호명은 상당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해외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허나 그런 그를 다잡아주는 건 아버지였다.

-혹시나 미래를 위한 일에 신념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면 아들을 생각해라. 나 역시 내 후손들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물론, 그 과오를 네가 다잡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건 네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문의 유산을 천우에게 모두 귀속시키도록 손을 써두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정통성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네 아들을 이용해도 좋다.

"그래서 애초에 천우를 본가로···."

-그렇기도 하지만 그놈을 본가로 들인 건 솔직히 내 욕심이 더 컸다. 뭐랄까, 자손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랄까.

"천우가 그 기대감에 충족합니까?"

-물론.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손자가 장성하는 것까지 본다면 더 좋을 텐데, 최호명은 결혼이 늦은 자신을 탓했다.

허나 최충의는 자신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은 과도기다. 최대한 집중할 타이밍이야. 다음 계획도 흐트러짐 없이 수행해라. 알겠냐?

"네, 아버지."

최호명은

'그 다음은요?'

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이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이렇게 조언해주시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겠죠?'

더 이상 기댈 구석이 없어진다는 것, 최호명은 그게 너무 서글퍼졌다.

바로 이런 것이 후회라는 것일까.

'젠장, 조금만 더 빨리 정신 차릴걸. 하다못해 아버지랑 날을 세우던 그 날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아들의 이런 후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호명아,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혹시라도 과거 때문에 괴로운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스스로 따귀를 한 대 후려 쳐라. 알겠냐?

"네···."

-대답 소리가 작구나.

"넵!"

-그래, 끊자.

오늘은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잠이 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오랜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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