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33화 (33/202)

16.(2)

85년 2.12총선을 2개월 남겨둔 상황.

대기업들은 이제 슬슬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을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처세가 빠른 기업들은 이미 줄서기를 끝내놓은 지 오래였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있었다.

현보는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던 기업집단이지만 이번 총선만큼은 달랐다.

정치권에서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는 눈치였건만 현보는 아직도 뇌물을 얼마나 공여할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불현 듯 현보의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비자금을 받는 쪽이 무려 둘이나 되었다.

여당 정민당과 야당 한민당으로 각각 50억씩 전달이 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자금 일체가 금괴라는 점이었다.

한민당 총재 이명기는 이게 과연 무슨 뜻인가 싶었다.

"얼마 전 3당 대표연설로 인해서 우리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인가?"

야3당을 아우르는 지금의 한민당을 만든 것이 이명기다.

그는 이번에야 말로 정치판을 뒤집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과가 시민들의 반응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명기는 자신이 여소야대의 구도를 완성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최대한 많은 의석수를 확보하겠다던 그의 열망은 2.12총선에서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은 현보라는 비자 금줄을 과연 조의창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다는 점이었다.

"흠···. 이상하군. 현보는 사실상 정민당의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누구나 그리 생각한다.

대놓고 조의창과 사돈을 맺은 것을 보면 최충의가 확실히 정민당의 줄을 잡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했다.

헌데 양다리라니, 최충의가 정권교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명기는 같은 당원인 김태청에게 물었다.

"이 돈을 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글쎄요. 별 말은 없었습니다만. 그저 잘 봐달라고만 했었지요."

"무려 50억을 쏴줬는데 저의를 모른다···."

"무슨 걱정을 그리 하십니까. 어차피 장사치가 조공 조금 바친 걸 가지고 말입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뒤가 좀 찝찝했다.

한 편, 정민당도 같은 양의 금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야 최충의가 정신을 차렸다고 안심했다.

"이놈들이 아주 정신 줄을 놓은 줄 알았습니다. 선거 막바지까지 돈을 토해놓지 않다니."

"그래요. 잘못하면 괜히 수술방 하나 잡을 뻔했잖습니까."

시선은 자연스레 조의창에게로 쏠렸다.

이제야 좀 면이 선다는 듯, 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뭔 수술 방까지 잡습니까. 아무튼 이걸로 해결 된 거죠?"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저번 총선에 건네주었던 돈보다는 확실히 규모가 작았다.

허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의창의 보좌관이 손님을 맞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의원님, 사돈께서 오셨습니다."

"최 회장이?"

"아니요, 총괄이사 말입니다."

"총괄이사가?"

최호명은 조의창이 있는 선거캠프로 직접 찾아왔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당연히 일동의 고개가 좌로 살짝 기울어져 버렸다.

"우리 사돈이 등산을 좋아하셨나?"

"등산은 싫어합니다."

"하하, 공수특전사 출신이 등산을 싫어한다?"

"젊은 객기에 입대한 거지, 제가 좋아서 입대한 건 아닙니다."

"아무튼, 다 저녁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최호명은 배낭을 벗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쿠웅!

꽤나 묵직했다.

"이게 다 뭡니까?"

"양도성예금증서 30억입니다. 그리고 성의가 좀 모자랄 것 같아서 현금으로 1억을 더 넣었습니다."

"어이쿠, 현금으로 이걸 다?"

"큰 일 치르시는데 이게 도리 아닙니까?"

때론 비자금의 금액보다 시각적인 효과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모두의 입이 떡 벌어져버렸다.

"···이야, 화끈하시네!"

"쏠 땐 확실히, 그게 이치라고 배웠습니다만."

"하하, 한국의 미래는 아주 밝아!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조의창의 어깨에 바람이 꽉 차버렸다.

비자금을 건네주며 최호명이 말했다.

"그럼 총선 이후에 저희 현보에게 주택사업을 팍팍 밀어주시는 겁니까?"

"허참, 그걸 말이라고. 이정도 했는데 적어도 성의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자금에는 손을 대본 적이 없었던 최호명이었다.

허나 재계에서 당장 살아남자면 손에 더러운 것 묻히지 않고선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쫙 빨아들이고 한 방에 치고 빠지자!'

최호명은 미국으로 떠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중이었고 블랙하워드를 인수하고 남은 자금을 시원하게 여야의 아가리에 꾹꾹 욱여넣었다.

아마 이정도 받았으면 정치권에서 현보가 주택사업을 독점한다고 절대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타이밍에 내부거래로 한결을 크게 키워준다면 1년 안에 덩치가 족히 두 배는 불 것이니, 입에서 다소 군내가 날지라도 비자금을 만질 수밖에는 없었다.

정치권 역시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만 조의창 입장에서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최호명이 왜 이렇게 돌변했냐는 것이었다.

'더럽다고 장인으로 삼기도 싫다던 놈이 갑자기 왜 저러지?'

처음에 조의창은 최호명이 특전사 출신이라고 좋아했지만 정작 최호명은 조의창이 쿠데타 5공의 주축이라면서 상당히 싫어했다.

그것도 못 마땅한데 비자금까지, 최호명과 조의창은 극과 극의 사람들이었다.

헌데 조의창은 내내 얼굴도 안 보이던 그가 비자금을 싸 짊어지고 온 것을 보면 분명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지?'

면은 섰지만 상당히 찝찝해서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최호명이 다녀간 후, 조의창은 최희명을 불러들였다.

"최 서방, 자네 형을 좀 잘 감시하시게."

"형이요?"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해···. 그룹에서 자네 형이 30억대 추가 비자금을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나?"

"···30억이요?"

공적 자금으로 30억이면 그리 큰돈이 아니었지만 비자금으로 30억이면 얘기가 다르다.

때에 따라선 가산까지 탈탈 털어야 가능한 일, 최희명은 형에 대한 의심의 칼날을 세웠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주시게."

"그리고 장인어른, 저번에 말씀하셨던 검찰 쪽 선수 말입니다. 언제쯤 소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왜 그러나. 가문에 누구 칠 사람이라도 있어?"

"기왕지사 칼잡이를 소개받은 김에 제 형이 설치면 당장 목부터 치려고 합니다."

"자네가 직접 형을 치겠다?"

"원래 왕위는 그렇게 계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칼자루를 달라, 조의창은 최희명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휘두르고 싶으면 휘둘러. 하지만 어설프게 칼 썼다가 자기 손 다치는 일 없게 해."

"명심하겠습니다!"

최희명은 권력을 등에 업으면 그걸 어떻게 쓸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모자란 수완을 커버할 수 있는 잔머리, 그게 최희명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재벌 총수들 한 번 쫙 털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작품 한 번 잘 짜봐. 이번에야 말로 현보를 자네만의 왕국으로 만들어야지."

"예, 장인어른!"

온전히 조 씨를 위한 현보, 그래도 그 안에서 왕노릇을 할 수 있다면 최희명은 그걸로 만족했다.

***

새해가 밝았다.

올해 4월에 검정고시를 치른 후, 내년 9월에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로 최종 합의가 되었다.

작년 9월, 천우는 60억의 자산 중 50억을 할애해서 미국계 부실채권에 투자했다.

그동안 나노 소프트와 비스트코 등과 몇 번의 협의를 거쳐서 회사채를 상장 이후 주식으로 전환하는 계약을 채결하였다.

천우가 회사채를 취득했던 당시, 나노 소프트의 자산합계 총액은 한화로 2천억 규모였다. 회사채 30억이면 총자산의 1.5% 수준이었고 만기상환 이율에 부실채권으로 할인되었던 비율까지 따진다면 대략 1.55%~1.6%쯤 될 것이었다.

필립은 천우와 상의해서 만기가 대략 2년쯤 남은 이 채권을 1.55%의 주식으로 돌려받는 약정을 채결하였다.

85년도 1월에 MBI가 다시 프로젝트를 가동시키면서 나노 소프트의 신용도가 약간 올라갔기에 0.05%를 양보한 것이었다.

딩동!

"우편이요!"

"아싸, 왔다!"

오늘은 미국에서 약정서가 도착하는 날이다.

아마 1등 당첨이 확정된 복권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이런 느낌이 들 것이 틀림없었다.

천우가 우편으로 약정서를 받았을 무렵,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필립이었다.

-약정서는 잘 받았니?

"네, 아저씨!"

-위기의 순간에 부실채권을 잘 사들였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헤헤, 감사해요."

-천우야. 한 가지 상의할 것이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비스트코의 회사채 말이다. 증권 상환을 논의하고 있는데 동업자가 갈라서네 마네 말이 많더라고. 그래서 아마 전환이 조금 더딜 것 같아.

"만약 둘이 갈라서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는 거지 뭐. 아마 이 경우엔 연준이 통화정책을 어떻게 변경하느냐에 따라 애기가 조금 달라지겠지?

비스트코의 회사채가 부실채권으로 분류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자금사정도 좋지 않은데 경영권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크게 화두가 되는 건 환율급등으로 인한 손해였다.

이 회사도 환율 때문에 풍비박산이 나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3개월 후에 다시 얘기하자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3개월이라···. 전 괜찮아요!"

-그래. 그럼 3개월 후에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네!"

환율은 계속 출렁이고 있었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변동이 훨씬 더 심할 것이었다.

영국의 현재 기준금리는 12%, 작년보다 거의 1%가까이 오른 수준이었다. 여기에 콜금리가 10.75% 수준으로 올라 이제는 연방은행이 달러화를 덤핑하는 맞불작전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달러화를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한화 10억 수준을 달러화로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엔화와 유럽계 화폐에 분산해서 투자했다가 회수하기를 반복했다.

최근 환율은 하루에도 3~4%씩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10억을 가지고 하루,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돈놀이를 하면 한 탕에 2~3천 만 원이 남았다.

그걸 계속해서 반복하니 월에 7~8억 정도의 수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돈놀이를 뻑적지근하게 할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는 않았다.

'시장이 걸레짝이 되기 때까지 한 번 해보자!'

얼마 전에 외환은행을 통해서 알아보니 천우의 계좌에 한화로 37억쯤 되는 잔고가 남아 있었다.

천우는 크게 한 방씩 노려보기로 했다.

"아저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

"믿을 만한 은행 하나만 소개시켜 주세요!"

-하하, 이번에는 또 무슨 기상천외한 짓을 하려고?

"저번에 제가 선물옵션에 돈을 걸어서 이득을 봤잖아요?"

-그래, 그렇다고 들었다.

"이번에는 달러화로 엔화를 사들이는 선물에 돈을 좀 걸어보려고요."

-···뭐? 환투기를 하겠다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