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실 안.
총장 장 이블랭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한은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탔다는 그 천재소년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선배님."
장 이블랭은 체스터 카렐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를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필립 레이건과는 같은 투자학회를 다니며 친해졌다.
그는 필립에게 몇 번이고 한국에 천재가 있다는 소리를 했었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컬럼비아 경영대 최고의 인물이었던 체스터 카렐의 진외증손자라는 소리를 듣곤 금세 마음을 바꾸었다.
허나 그는 아직도 천우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학장의 천거로 일단 입학을 허가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검증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게."
"검증이라."
"아무리 천재라지만 그게 진짜 우리 학교를 빛낼 정도의 재능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는 뜻일세."
천우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장 이블랭은 이방인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만큼 배타적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최소한 자기주장이 외압에 의해 흔들릴 사람은 아니라는 소리로군.'
앞으로 천우가 장 이블랭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시간은 충분하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간에 저 소년을 내후년 9월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지. 어차피 그쪽에서 검증할 것도 있다면서. 86학년도 신입생으로 최천우 군을 받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검증이 끝나는 대로 서류를 보내도록 하죠."
장 이블랭은 천우에게 악수를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네, 총장님!"
"그나저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
"뭔데요?"
"자네가 바라보는 이 컬럼비아 대학은 어떤 곳인가?"
상당히 심오한 질문이었다.
허나 천우에겐 그리 심오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훈련소랄까요."
"훈련소?"
"총을 가지면 뭐하나요. 쏠 줄 모르면 말짱 황인데. 최소한 분해결합은 해보고 전쟁에 나가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허참, 특이한 비유로군."
장 이블랭은 다른 건 몰라도 천우가 뭔가 좀 특이한 아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허나 과연 저 특이점이 천우를 어떤 인물로 만들어 갈 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카렐 학파는 천우가 컬럼비아 경영대학 입학을 확정했다는 소식을 듣곤 크게 기뻐하였다.
필립은 한희연에게 천우를 데리고 미국 카렐학파 모임에 나가자고 제안했다.
"다들 천우를 보고 싶어 합니다. 스승님의 추모행사에 나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거든요."
천우는 한희연에게 필립의 말을 해석해서 전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흔쾌히 천우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럼 천우를 맡아주세요. 저는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왜요? 엄마는 같이 안 가요?"
"엄마는 호텔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편해."
행여나 자신이 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한희연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아들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어머니의 걱정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래. 아저씨 말씀 잘 듣고."
"네!"
천우는 모임이 있는 호텔에 방을 잡고 한희연을 모셔둔 후에 연회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필립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내려가는 길.
그는 넌지시 필립에게 물었다.
"아저씨,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뭔데?"
"이번에 프레던스 은행이 무너지면서 부실채권이 많이 생겼다면서요."
"으음, 그러긴 했지. 하지만 정부에서 회수 중이라 건질 게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럼 다른 은행은요?"
"다른 은행이라면 건질 게 있을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뭐 그리 좋은 매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더구나."
"그건 뒤져봐야 아는 일이죠."
"으음?"
"꺼진 불도 다시 보라는데 명부를 몇 번 더 뒤져보면 좋은 물건이 있지 않을까요?"
"그놈 참 알뜰하군. 좋아, 그럼 시장에 나온 공매물중에 괜찮은 것이 있나 한 번 봐줄게."
천우가 미국에 온 진짜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에게 있어선 지금이 대목인데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필립은 로비로 내려가서 전화를 한 통 넣었다.
"인수 가능한 부실채권 목록 좀 쭉 뽑아서 팩스로 보내줘."
짧은 지시 한 마디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프론트로 팩스가 도착하였다.
천우는 마치 설날에 세뱃돈이라도 받는 아이마냥 좋다고 달려갔다.
"헤헤, 왔다!"
"은근히 욕심이 있는 녀석이로구나."
"욕심이 자본을 만드는 법이잖아요!"
"하긴, 욕심 없이 큰 돈 벌기는 어렵지."
부실채권 목록에는 투자하기 좋은 부동산들이 꽤 많았다.
허나 천우는 부동산보다는 회사채에 집중했다.
금융권은 회사채를 구매했다가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부실채권으로 정리해버린다.
천우는 그걸 사들이려는 것이다.
'으흐흐, 정크본드보다 더 좋은 투자수단이 어디 있겠어?!'
지금은 미국계 은행들이 더 이상의 가치상각을 막기 위해서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정리하는 시점이었다.
특히나 오하이오 은행과 같은 회사들은 이미 해외자본의 러브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부실채권을 더더욱 빨리 쳐 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부실채권을 사들인다는 자체가 상당한 무리수이긴 했다.
한마디로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회사의 채권을 산다는 건 거의 도박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천우의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다.
미래에 도생할 회사들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도박이 될 수 있겠는가.
천우의 눈에는 돈이 보였다.
'이야, 이건 뭐 거의 노다지나 다름이 없구나! 땡큐, USA!'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부터 미국은 벤처산업에 대한 대대적 지원을 시작하였다.
이 정책으로 미국에 수많은 신흥부자들이 생겨났고 그 청년 갑부들이 미국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벤처산업지원금이 순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원금의 종류에는 순수 지원자본도 있었지만 국가지원대출도 있었다.
이 대출로 인하여 벤처기업은 자신의 덩치보다 훨씬 큰 자본을 등에 업고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헌데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해당 대출의 금리까지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잘 나가던 회사들이 졸지에 쪽박을 차게 생긴 셈이었다.
그런 회사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아저씨, 이거 제가 가져도 되요?"
"물론이지. 너 때문에 받아온 건데."
"헤헤, 감사합니다!"
천우는 아직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연회장 구석에 앉아서 구미가 당길 만한 기업들을 체크해나갔다.
체크를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만큼 은행권이 부실채권을 서둘러 정리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천우는 대출이라도 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최대한 멀리 보자. 지금 최대한 지분을 확보한 이후에 점점 더 보유분을 늘려가는 식으로 해야겠어.'
계속해서 체크를 하면서 우선순위를 선정하였다.
대략 30분 동안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나열해보았더니 우선매입순위 1순위 회사가 정해졌다.
바로 '나노 소프트'였다.
'나노 소프트의 회사채가 부실채권으로 나오다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다!'
미국의 S/W재벌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윌리엄 게리슨 2세.
75년 처음으로 회사를 설립해서 각종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히트를 쳤다.
당시에는 S/W의 상표권이나 특허권에 대한 개념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윌리엄 게리슨은 우수한 S/W를 가진 회사를 찾아가 직접 특허권을 사들이고 그것을 재개발해서 팔았다.
그러던 도중에 미국 유명 컴퓨터제조사인 MBI에게서 운영체제제작을 의뢰받았고 그것을 85년도에 최종 보급함으로서 전 세계 80%가 윌리엄 게리슨의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되었다.
허나 그가 갑부반열에 오르기 직전, 주거래은행이던 프레던스 은행과 이스트리버사이드 은행이 나란히 도산을 맞으면서 회사가 휘청거렸다.
지금이 딱 그 시기인 셈이었다.
'마샤, 현 시점으로 나노 소프트의 기업 재무 상태는 어때?'
-특허권 분쟁으로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 MBI의 신형 소프트웨어 탑재 보류로 인해 자금사정이 상당히 팍팍한 상태입니다. 허나 은행가가 나노 소프트의 회사채를 정리하던 시점에서 MBI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다시 시행함으로 인해 위기를 넘기게 될 겁니다.
'과도기라는 소리군?'
-네, 그렇습니다.
만약 나노 소프트가 그렇게 흥할 것을 알았다면 다 망해가는 은행권이라도 회사채를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세상일을 미리 다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후후, 하지만 예견할 수 있다면 다르지!'
천우는 나노 소프트의 회사채를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나노 소프트에 별표를 친 후, 몇 번 더 리스트를 스캔해보았다.
그러다가 또 다른 매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유통회사 '비스트코'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스트코도 회사채를 돌렸다가 부실채권으로 평가를 받았구나.'
2018년을 기준으로 매출액 170조, 전 세계 총 매장 수 880개에 달하는 엄청난 물류기업으로서 세계 1위인 웰마트에 이어 유통업계 시가총액 2위에 달했다.
비스트코는 1978년 미국 워싱턴 주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이듬해인 79년에 시애틀에 첫 번째 대형매장을 입점 시키고 그곳을 본점으로 삼았다.
비스트 코는 1981년도까지 무서울 정도의 급성장을 보였다가 미국의 국제수지악화와 함께 사장될 뻔했는데, 1985년도 플라자합의와 함께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
지금의 1달러가 과연 10~20년 후엔 얼마가 될지 모르는 회사라는 소리였다.
그밖에 면도기 회사인 젤리트와 침대회사 에몬스 등이 있었고 이들 회사 역시 미래가 상당히 탄탄했다.
천우가 가진 재산의 총합은 한화로 60억쯤 된다.
외환을 사서 시세차익을 남기는 장사가 워낙 쏠쏠해서 수익률이 좋았고, 그렇게 쌓은 자금이 지금은 60억까지 불어난 것이었다.
만약 지금 자산을 나누어 투자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 저, 매입 의뢰 좀 할게요!"
"음? 뭘 말이냐."
"부실채권이요!"
"아까부터 팩스용지만 붙잡고 있더니 벌써 매물을 찾아낸 거야?"
"네! 헤헤, 아주 좋은 매물들이 있어요!"
"흐음,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볼까?"
필립은 천우가 지목한 회사들의 이름을 한 번 쫙 훑어보았다.
그는 천우가 비상장회사의 부실회사채를 매입하려 한다는 것이 주목했다.
일반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투자는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나노소프트는 본격적인 호재가 터지기 전이고 기껏해야 MBI의 호환프로그램을 만들어주는 하청업체 쯤으로 취급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거리에 나가 나노 소프트를 아냐고 물어보면 태반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회사라고 답할 것이었다.
비스트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애틀의 창고형 매장, 그 중에서도 덩치가 제법 큰 회사일 뿐, 그 이상의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허나 필립은 달랐다.
'호오, 제법인데?'
그는 천우의 역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매입해주지!"
"와아, 감사합니다! 헌데 아저씨, 매입 전에 부탁 한 가지 더 해도 되요?"
"허참, 까다로운 손님이네."
"헤헤, 기왕지사 매입을 하는 김에 좋게 매입하면 더 좋잖아요. 저는 솔직히 정크본드로 단기이득을 취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주식으로 전환시키고 싶거든요."
"장기투자를 하겠다는 얘기야?"
"네!"
천우의 단기투자는 외화 하나면 충분하다.
그는 지금부터 부실채권으로 초장기 투자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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