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9월 초순.
천우네 집으로 문교부가 찾아왔다.
그들은 다소 파격적인 방침을 가지고 왔다.
"검정고시를 먼저 치르라고요?"
"어차피 천우군은 초등교육 자체가 무의미한 케이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해서, 중등 및 고등과정 검정고시를 쳐서 합격점을 받는다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나,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사상초유의 케이스였다.
문교부는 천우의 얼굴이 나온 신문기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상초유의 사태, 은행경시대회 7세가 대상 받다!]
[한은 경시대외 대상 최천우 군, 기네스북 등재 거론도···]
문교부 기획조정실장 임윤환은 약간 격양되어 있는 듯, 다소 높은 톤으로 말했다.
"전 세계가 주목합니다. 월반쯤이야 별 것도 아니죠."
"아아···."
"다만, 한 가지 걱정인 것은 앞으로 천우 군이 과연 올바른 길로 들어서 우리의 기대만큼 제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문교부는 이미 60년대와 70년대에 천재소년들의 조기유학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천우를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인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었다.
허나 그건 저들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저는 자신 있어요!"
"흠,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컬럼비아 대학교 경영대에서 초청장을 받았다고 했던가?"
"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가야지. 다만 그곳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다면 당장 연락하렴. 알겠니?"
"넵!"
임윤환은 자신의 자택번호까지 남긴 후에 일어섰다.
"올해 시험을 치면 내년 초에는 졸업장이 나올 겁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컬럼비아 대학과 자세한 일정을 조율하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천우 군을 부디 훌륭한 어른으로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임윤환은 천우를 단순한 천재가 아닌 사람으로서 걱정하고 있었다.
천우는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본가에서는 컬럼비아 대학을 가는 김에 한 사람을 만나보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필립 레이건]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싶었지만 천우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 생각을 접었다.
그보다는 조부 최충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필립 레이건의 이름은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회장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원래는 회장님 내외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다고 하십니다."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세요?!"
"거동이 어렵긴 하십니다만···.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랍니다."
천우는 최충의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마치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했던 행동들, 그리고 건강악화까지.
'마샤, 최충의 회장의 몰년은 언제로 되어 있지?'
-2001년 6월로 되어 있습니다.
확인해보니 다행이도 천우의 예상과는 달리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지금까지 느낀 것들은 막연한 불안감에서 나온 것들이겠지.'
천우는 우선 최충의의 병세를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허나 최충의는 이미 손자가 찾아올 것이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미국을 다녀온 이후에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컬럼비아 대학을 찾아가서 유학일정을 모두 조율한 이후에 본가로 찾아오시지요."
"···할아버지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다고요?"
"네, 도련님. 돌아오면 도련님 말마따나 소고기나 좀 쏘라고 하셨습니다."
조부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천우는 일단 미국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는 마샤가 가진 기록을 믿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천우는 한희연을 손을 잡고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존F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니 금발의 중년이 한글로 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천재소년 최천우!]
각진 얼굴에 엄청난 덩치까지, 영화에 나오는 터미네이터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천우는 한희연과 함께 남자에게 영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아, 네가 천우구나."
"할머니께서 동행하라고 말씀하셨었어요."
"오호, 영어가 유창한데?"
"헤헤, 할머니께 배운 거죠."
"우선 내 소개를 해주마."
천우가 전해 듣기로는 컬럼비아 총장과 잘 아는 사이고 경영대학장과 동기동창이라고 하였다.
그 이외의 정보는 전해주지 않았었다.
남자는 천우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장외주식 전담딜러회사 대표 필립 레이건]
"비상장주식 딜러세요?"
"그런 셈이지. 미국의 상장주식은 전미기업수의 0.1% 밖에 안 돼. 물론, 그 시장이 가진 자산비중은 44%에 달하지만 그 이외의 시장도 충분히 메리트는 있단다."
이 말, 천우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인물검색에 들어갔다.
-필립 레이건, 사모펀드 웨스트카라반의 설립자이자 애널리스트입니다. 전도유망 한 중견, 중소기업의 비상장주식을 끌어와서 OTC(장외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직접 투자하여 상장 이후의 로열티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아아! 그래,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웨스트카라반의 수장이었구나!'
웨스트카라반은 폐쇄적 투자집단으로서 개도국이나 신흥국에 공격적 투자를 감행하거나 부실채권을 인수해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사모펀드였다.
90년대 후반에는 아시아금융위기, 닷컴버블 등으로 호황을 누렸으며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에는 투자금융과 상업금융의 경계가 모호해지자, 이를 바탕으로 다국적 금융회사를 설립하여 문어발식 인수합병을 벌여 거대자본을 형성하기도 했었다.
천우는 혹시 동명이인인가 싶어서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아저씨는 고향이 어디세요?"
"나? 텍사스인데."
"그럼 혹시 부실채권도 취급하시나요?"
"하하, 그렇긴 하지. 뭐, 작은 사모펀드이긴 하지만."
그제야 천우는 오금자가 이 사람을 소개시켜 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렐 학파는 미국의 금융시장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미국의 금융시장이 무너진다면 그와 관련된 기업들까지 휘청거릴 것이다.
한마디로 부실채권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중에서 쓸 만한 것을 건진다면 천우에게는 엄청난 이득인 셈이었다.
'역시, 할머니는 최고야!'
단순히 자금을 불리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장기투자를 실현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미국은 천우에게 있어 기회의 땅인 셈이었다.
"아저씨도 카렐 학파세요?"
"그런 셈이지. 나도 체스터 카렐의 제자이니까."
"그럼 제가 미국의 금융시장이 휘청거리면서 나올 부실채권을 매입해달라고 부탁한데도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으시겠네요?"
"하하,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냐. 굳이 카렐 학파의 미국금융시장 위기론이 아니더라도 장외주식이라든지 부실채권에 투자할 수는 있어. 내가 하는 일이 그런 일이잖아?"
"헤헤, 그런단 말이죠?"
마침 달러화 환매로 돈도 꽤나 벌었겠다, 투자회사도 받았겠다, 천우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나 다름이 없었다.
***
오후 세 시.
콰앙!
최호명의 집무실이 거칠게 열렸다.
"이사님! 이것 좀 보십시오!"
부하직원이 가지고 온 것은 제이미에게서 온 팩스였다.
글은 상당히 짧았다. 허나 그 내용은 참으로 강력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했음]
공매도가 성공한 것이었다.
"좋았어···!"
"이사님,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우선 블랙하워드 뱅크에 전화를 넣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올 테니."
기회가 왔다. 하지만 최호명은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금융계는 극심한 타격을 받아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금리인상 직후 10월.
미국계 대형은행인 프레던스 은행과 오하이오 은행의 도산위기에 몰렸다.
프레던스 은행과 오하이오 은행은 유수의 역사를 가진 매가 뱅크로서 여수신 비율이 상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1금융권 은행 두 개가 나란히 위기에 봉착한 셈이었다.
특히나 프레던스 은행의 경우에는 미국의 벤처기업 특별대출자금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도산할 경우, 무너질 중견기업 및 중소기업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최호명은 10월에도 가만히 기다렸다.
블랙하워드 뱅크와 마찬가지로 프레던스 은행과 오하이오 은행은 함께 고정금리부자산에 대대적 투자를 감행했었다.
사실상 미국의 금융시장은 거의 방임상태, 이들은 부동산에 투자를 확대, 업무영역을 문어발식으로 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역풍이 지금 막 시작된 셈, 허나 연준은 금리의 추가인상을 선언했다.
"이사님, 기준금리가 또 올랐습니다! 더 늦기 전에 블랙하워드 뱅크의 인수를 시작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이미 상업은행의 수신이자가 투자수익률을 능가하기 시작하고 은행들의 정상가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갔다.
경기예측착오로 인한 역마진이 은행을 구제불능으로 만든 것이다.
최호명은 11월까지 기다렸다.
"이사님! 오하이오 은행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답니다!"
"호오, 그래요?"
오하이오 은행의 경우에는 2/4분기 순이익이 3,100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만, 3/4분기에 들어서 적자만 1억 5,000만 달러를 기록합니다. 아예 존립자체가 불가능해 진 것이다.
"프레던스 은행은?"
"그쪽도···."
위기는 프레던스도 마찬가지.
최호명은 슬그머니 웃었다.
"후후, 이제 막 미국에서 은행 국유화를 진행하겠군요."
"아무래도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초대형 은행 아래 중소은행들은 이미 매물로 많이 나와 있겠죠?"
"일본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엄청난 인수합병전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너나 나나 골드러시 한 번 해보겠다, 이거군요?"
미국정부는 구제 금융을 해주는 대신 FDIC기금, 연방준비자금, 민간은행부담을 끌어들여 사실상 은행을 국유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저들 은행이 일으킨 손실은 총 16억 달러, 겨우 두 개의 은행이 만들어낸 순손실이었다.
최호명은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시작합시다. 저들도 이제 슬슬 손절을 생각할 텐데, 재무부가 움직이기 전에 상무부와 입 맞추었던 대로 움직여야지요."
같은 시각.
55개의 은행들이 수신마비현상으로 인한 예금인출을 경험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해졌다는 소리였다.
블랙하워드 뱅크의 록 하워드 회장은 어제 아침부터 계속되었던 대량인출현상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은행권이 도탄에 빠진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설마하니 미국의 금융시장이 이토록 녹다운이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더군다나 블랙하워드 뱅크는 국내외 유수의 기업들에게 꽤 많은 차관을 해주었고 그 이자만 해도 은행의 흑자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허나 그것이 문제였다.
차관으로 나갔던 금액이 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블랙하워드 뱅크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콜론으로 감당할 단계는 아주 예전에 지나갔다.
남은 카드는 어떻게 해서든 은행에서 건질 수 있는 것만 건지는 것뿐이었다.
똑똑.
회장 집무실에 노크가 들렸다.
"회장님, 상무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돌려줘."
그는 집무실의 블라인드를 전부 다 내린 후, 전화기를 잡았다.
전화기 속 인물은 제이슨 골드너였다.
-그쪽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물어 뭐합니까. 최악입니다. 당장 은행 문을 닫아야 할 판입니다."
-그럼 현보 그룹과의 거래가 성사된 것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아아!"
그제야 아주 잠깐 잊고 있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최호명.
록 하워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연방준비자금이라도 좀 끌어와서···."
-구제금융 지급순위에 당신은 없습니다.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당신은 결국 그걸 놓치고 말았죠.
"아아···!"
도무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제이슨의 말처럼 언제고 금융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 회사의 투자규모를 축소하고 국내수신에 집중했다면 수익은 줄어도 내실은 튼튼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그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거머쥐지 못했다.
-그럼 계약을 진행하시죠. 만약 두 회사 간의 합의만 잘 이루어진다면 상무부에서는 당장 인가가 내려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끝이었다.
록 하워드는 허망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잡았다.
"···현보 그룹 총괄이사 집무실에 전화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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