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30화 (30/202)

15.

지금까지 총 12회의 통화정책 경시대회가 있었다.

허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독면접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

그만큼 천우의 포트폴리오가 대단하다는 소리였다.

그는 한은의 현재 통화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통화바스켓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한마디로 한국은행을 흠씬 두들겨 팰 생각으로 경시대회에 참가한 것이었다.

천우는 미래의 흐름에 따라서 생겨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맹점을 속속들이 모아서 참교육의 몽둥이를 만든 것이었다.

먼저 그는 통화바스켓을 갈아치우라고 지적했다.

국제무역에서 각 국가 간의 거래에 기준이 되는 것을 기축통화라 부르는데, 이 기축통화가 오르고 내리는 가중치를 묶어 놓은 꾸러미를 바스켓이라고 부른다.

통상적으로 통화바스켓은 한 국가의 화폐가치를 결정하는데 쓰이는 만큼 각자 국가마다 사용되는 통화바스켓의 형태도 다르다.

천우는 이런 한국의 통화바스켓에 지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자네는 현재의 복수통화바스켓이 결국엔 금융위기를 초래하게 만들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네, 맞아요. 특히나 지금과 같이 환율이 불안정할 때엔 더더욱 그럴 수 있죠."

"으음."

"생각해보세요. 한국의 통화바스켓은 주요 무역 국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조잖아요. 특히나 교역량의 50%나 차지하는 미국의 달러화가 고속질주를 하면 한국은 고스란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죠. 지금의 수지악화는 원화 절상에서 왔다고도 볼 수 있잖아요. 다들 인정하시죠?"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10년만 흘러간다고 쳐보자고요. 한국은 뚜렷한 통화정책도 없죠, 그렇다고 외환보유고가 풍부한 것도 아니죠, 부채비율도 높잖아요. 향후 10년 안에 한국이 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어요?"

엄청나게 신랄한 비판이었다.

특히나 대한민국 통화정책의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현재의 대한민국, 아니 미래의 대한민국까지도 일정한 목표가 없는 통화정책으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휘청거릴 뿐이었으니까.

"크음···!"

"한마디로 위기에 봉착해도 그걸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한 가이드라인조차 없다는 소리죠."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한은이 통화바스켓부터 가이드라인까지 아예 전부 다 싹 뜯어고쳐야 한다는 소리지?"

"네, 맞아요. 그러지 않고선 대한민국은 언젠간 침몰하고 말아요."

천우는 달러, 엔의 그리고 EC국가들의 통화가중치를 적절히 조합한 통화바스켓을 내어놓았다.각각 45%, 20%, 35% 정도의 비율이 좋을 것으로 제안했는데, 이정도면 심각한 환율리스크는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제야 심사관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천우를 의심했던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앞서 의심한 일, 사과하겠네."

"괜찮아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도록 하지. 자네가 보았을 때 무엇을 목표로 삼으면 좋겠는가?"

"적정한 물가정책이죠. 지금처럼 무조건적인 물가하락 정책은 현안을 타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일정 기준을 잡고 그를 목표로 인플레 정책을 끌고 나가야지, 고달러 과잉생산 시대에 무분별한 인플레이션 억제 전략은 투기조장 및 부채상승이라는 악재를 낳을 거라고요. 특히나 기업여신의 여건을 적절히 조절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것 같아요."

더 이상 할 말이 있을까.

비판과 대안제시,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답안을 제출한 천우였다.

타악!

심사관들은 일제히 채점노트를 접었다.

"더 할 말들 있나?"

"뭐···."

천우는 심사관 중 한 명에게 명함을 받았다.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장 - 안유혁]

마샤는 즉시 인물검색에 나섰다.

-현재 한국은행 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총재보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 실제로 1998년도 국민의 정부 시절 한국은행 총재를 지내게 됩니다.

'미래의 한은총재를 만난 격이로군.'

안유혁은 천우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괜찮다면 우리 통화국 산하 정책연구부와 함께 일해 볼 생각 없나?"

"나중에요?"

"자네가 커서도 우리 한은에 관심이 계속 남아 있다면 단순 협력관계라도 좋으니 함께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본격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단순협력관계라면 천우도 당연히 오케이였다.

"일단 제가 조금 더 성장하면서 경험을 쌓은 다음에요!"

"그래. 앞으로 자네가 나아가는 길에 우리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한은장학생으로 등록해 둘 테니 집에 가는 길에 연락처 하나만 남겨두고 가주시게."

"네!"

"씩씩하군."

그는 천우에게 금장이 박힌 상장을 건네주었다.

[한은 경시대회 대상]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제가 대상인가요?"

"그럼 누가 대상을 받겠나."

대회정책에는 경시대회 대상에 한하여 한은장학생 특전을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헌데 상장을 펼쳐보니 한은 장려금에 명예연구원 증서까지 들어 있었다.

과감하게 한국은행을 두들겨 팬 것이 오히려 천우에게 득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천우가 한은에서 상을 받은 후,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본가로 과외수업을 받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찰칵, 찰칵!

마치 개미떼처럼 기자들이 몰려들어 천우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최천우 군! 한은 경시대회 최연소 우승자라고 들었습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소감이요? 그냥 할 말 몇 마디 해준 것뿐인데요."

"대단합니다! 항간에서는 국교 월반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있던데, 그럴 의향이 있으십니까?"

원래는 인근 국민학교와 교육청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월반을 신청하고 거듭 상의를 거쳤어야 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무려 한은 명예연구원 타이틀을 얻지 않았던가.

"법적으로 문제만 안 된다면야."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미국으로 갈 거예요!"

"이민 말입니까?"

"아니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형 골드만삭스나 버크셔헤서웨이를 만들 거예요."

"오오!"

기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한국에도 걸출한 인물 하나 나올 것이라며 말이다.

***

8월 중순, 현보 그룹과 미국계 은행 블랙하워드 뱅크와의 접선이 있었다.

물론 비공식 접촉이었다.

이번 접촉에 현보 그룹이 가지고 나온 자금은 무려 한화로 2천억 이상, 보스턴과 시애틀, 마이애미에 걸쳐 있는 블랙하워드 뱅크의 지점들이 가진 순수자본금에서 대략 1500억쯤 빠지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이 금액의 무려 절반이 무기명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었다.

쿠웅!

"말씀드렸던 비자금입니다."

최호명은 이게 비자금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수트케이스를 떡하니 올려놓았다.

블랙하워드 뱅크의 회장인 록 하워드는 최호명이 건넨 비자금들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진심입니까? 정말로 미 연준이 통화긴축을 선언할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이제 곧 연준이 통화긴축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블랙하워드가 투자하고 있는 고정금리부자산을 비롯하여 개도국 차관, 석유시추사업 투자 및 차관이 언젠가는 반드시 은행을 망하게 만들 것이라 예언했다.

록 하워드는 천억 원 상당의 원화를 비자금으로 준다면 당연히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허나 문제는 최호명이 내건 조건이었다.

"천억 원을 비자금으로 드리고 천억을 공식투자금으로 드리겠습니다. 단, 은행이 만약 도산위기에 몰렸을 경우엔 비자금이 인수자금을 대신하는 겁니다. 우리는 천억을 투자하였고 추가로 천억을 비자금으로 주었으니 이정도면 은행인수자금으로는 썩 괜찮은 금액 아닙니까?"

이를 테면 공매도.

도대체 미국 은행가의 패망에 공매도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록 하워드는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은행을 인수하겠다고요?"

"망한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허참, 황당한 양반일세."

최호명은 일부러 록 하워드 회장을 도발하였다.

블랙하워드는 무리한 유전개발로 인하여 거의 파산 직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최호명이 돈으로 성질을 긁으면 발끈해서 홧김에라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다.

"좋습니다! 그럼 나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만약 은행이 망하지 않으면 천억 원은 내가 먹는 겁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금융위기가 없다면 그건 당신 돈이라니까요?"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이대로 만약 블랙하워드 뱅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공돈을 날리는 셈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은행이 망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모 아닌 도, 여기에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이미 미국 상무부로도 이정도 규모의 자금이 넘어갔다.

제이슨이 말하길, '상무부에서도 오케이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기업유출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은행유출만 없다면 이제 물밑작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블랙하워드 은행이면 미국 내에서도 꽤나 머리가 굵은 기업이다. 이미 판은 다 벌어졌어!'

이제 그는 운명의 날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같은 시각

제이미 골드너가 상무부차관을 설득하고 있었다.

미국 상무부 차관은 제이미 골드너의 신박한 의견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뭘 어쩐다고?"

"블랙하워드 은행이 망하면 한국계 사업가가 돈을 싸 짊어지고 넘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어떤 미친놈이 그런 억지공매도에 수 억 달러를 쓴다는 말이냐고. 그런 놈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 않나."

톰 스미스는 자신이 손수 키워왔다 자신할 수 있는 제이미 골드너의 '미국 금융위기론'을 듣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상당히 곤란해 하던 중이었다.

사실, 미국의 금융위기론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대두되어 온 이론이긴 하지만 그걸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초일류 국가 미국의 금융이 그리 쉽게 망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제이미는 마치 미국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 금융위기가 터진다면 금융계가 만들어 낼 손실만 10억 달러 수준을 넘길 겁니다. 행여나 해외차관금액까지 회수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실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적어도 은행 몇 개는 건질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날 군비증강에 돈을 때려 부으면 뭐합니까. 내실이 탄탄해야지요."

"허참, 이 친구 좀 보게. 그 발언, 백악관에 정통으로 반한다는 걸 알고 있나?"

"제가 틀린 소리를 한 건 아니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저들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시지요. 제 선택이 아마 미국의 몇 개 주를 되살리는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미국이 위기에 몰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은행권으로 들어가는 투자금만 받고 끝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괜찮은 조건이었다.

상무부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톰 스미스는 미친 척 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당분간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최종승인만 기다리겠습니다."

톰 스미스는 제이미 골드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둘은 도대체 왜 이렇게 공매도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이봐, 골드너. 진실을 말해봐. 왜 굳이 한국인 사업가의 공매도를 도와주는 건가? 개인적인 친분인 것인가?"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벌이는 일이었다면 오히려 저는 그를 말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에 나서주는 건가?"

"그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해두지요."

"가능성이라."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까지나승승장구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하지만 실패를 통해서 뭔가 배울 수 있다면 그 또한 그 친구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일이 될 것이라,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톰 스미스는 실소를 지었다.

"한국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고 하더군. 단순 친분 때문에 벌이는 일이 맞는 것 같은데."

"그래 보입니까?"

"자네 친구는 아주 좋겠어. 자네 같은 지기를 두었으니 말이야."

"글쎄요. 누가 더 좋은 입장인지는 조금 더 지나봐야 알겠지요."

사실상 공매도는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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