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29화 (29/202)

14.(2)

완연한 여름의 끝자락.

한국은행 로비가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제 1차 아시아개발은행 주최 통화정책 경시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희연의 손을 잡은 천우가 로비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꽤 많구나.'

천우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물론, 그건 공식적인 일정이었고 사실은 미국에서 최대한 재산을 증식하고 경험을 쌓아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길어야 15년이다.

천우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담금질해서 대한민국, 아니 세계 최고의 기업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마샤와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상당히 짜임새 있게 설계하였다.

어느 곳에 어떻게 투자할 것이며 학교에서 무엇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인지 까지 다 정해두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발을 떼는 날이었다.

77년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국교를 월반해서 1년 만에 졸업한 학생이 있었다.

결국 교육청에서는 그의 월반을 무효로 처리했으나 대법원에서는 월반을 인정하여 졸업처리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교육청은 이따금 두뇌가 비상하거나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주기적으로 월반시키고 있었다.

다만, 그 폭이 좁고 횟수가 제한적이라서 보통의 두뇌로는 월반이 어려웠다.

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아시아개발은행 통화정책 경시대회였다.

대부분이 경상계열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로서 보통은 학과장의 추천을 받아서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의 참가요건에는 지도교수의 유무를 반드시 기제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만약 없다면 관련 학과 교수의 추천서를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희연은 모집담당자에게 필요서류를 제출하였다.

"참가신청 좀 하고 싶어서요."

"어라? 탤런트 한희연 씨 아니십니까?"

"네, 맞아요."

"경시대회에 참가하시려고요?"

"제가 아니고 제 아들이요."

"아아, 아드님께서···. 어엉?!"

무심결에 서류를 처리하려던 담당자가 깜짝 놀라서 천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희연이 제출한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았다.

"존 헤네시 교수님···. 컬럼비아 대의 경영대학 교수로 계시군요?"

"네, 맞습니다."

주최 측은 존 헤네시에게 연락을 취하였고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천우의 재능을 인정한다는 추천서를 추가로 작성해서 보내주었다.

단순히 지능만 높은 것이 아니라 재능까지 겸비하였다는 것이었다.

경시대회에는 다른 전재조건이 없었다.

해당 학과의 교수가 써준 추천서만 있다면 누구라도 참가가 가능했다.

"···일단 참가신청은 되었습니다. 헌데 정말 이 아이를 대회에 참가시키시려고요?"

"제가 좀 유난스러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걱정이 돼서요."

한희연은 쓰게 웃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아이의 재능을 묵혀둘 수는 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군요."

담당자는 천우에게 한국은행 로고가 박힌 참가자 번호표를 건네주었다.

이걸 받았으니 일주일 후에는 예선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예선을 통과하면 그날 본선을 치르고 본선에서 대상을 받은 자는 아시아개발은행 표창을 받아 국제 경시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수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일주일 후.

한국은행 본 건물 지하 강당에서 경시대회 예선이 열렸다.

대학생들은 통화정책 포트폴리오를 잔뜩 따서 출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의응답에 응하여 점수를 받는 형식이었다.

천우 역시 포트폴리오를 짜왔다.

그는 최대한 사실적이며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기업 시뮬레이션 어플리케이션에서 얻은 포트폴리오 전반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하였고 그것을 경시대회에 제출하였다.

천우는 대학생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신기한 눈으로 천우를 쳐다보았다.

"넌 몇 살이니?"

"7살이요."

"어이쿠, 아직 국교도 입학 못한 아이가 경시대회에 나왔어?"

"컬럼비아 대학에서 추천서를 써줘서요."

"허어, 허풍이라고 해도 아주 달변가인데?"

"허풍 아닌데."

콰앙!

바로 그때.

경시대회장 문이 열리면서 감독관 중 한 명이 달려 나왔다.

"187번 학생!"

천우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전데요?"

"···자네가 187번?"

"네, 맞는데요."

학생들은 천우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면접관은 천우에게 손짓했다.

"자네 잠깐 이쪽으로 와보게."

"무슨 일이신데요?"

"들어와 보면 알아."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넥타이를 맨 중년들이 모여서 뭔가 심각하게 논의를 주고받고 있었다.

중년인들이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이 된 것일까.

그중에 가장 늙은 남자가 말했다.

"꼬마야, 정말 이걸 네가 작성한 거니?"

"네. 일일이 손으로 다 써놓은 건데요."

"아니···."

천우는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허나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오류가 있었다.

바로 일반화였다.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고 쳐도 현 한은 수뇌부나 생각할 수 있을 법한 답안을 내어놓는다고?"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 다른 법이잖아요. 하지만 그 생각이 겹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죠."

"···그렇다고 7살 꼬마가 통화바스켓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보완정책을 한은 수뇌부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솔직히 말해봐. 이 답변, 어디서 난 거지?"

이제는 천우를 의심까지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 되었다.

"그럼 제가 반대로 물을게요. 한은 수뇌부나 할 법한 생각을 글로 풀어낸 이 답변, 어디서 구할 수 있죠?"

"그건···."

"구할 수 있다면 제가 부정행위를 하셨다고 생각하는 그 입장,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설마하니 7살 꼬마가 이런 답변을 할 줄은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때쯤이었다.

중년들 사이로 젊은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부장님들, 이걸 좀 봐주십시오."

"이게 뭔데?"

"최천우 군의 지능지수 테스트 결과랍니다."

"지능지수?"

"IQ가 190이상이랍니다. 그것도 6세에 말입니다."

"···뭐?"

"멘사에서도 인정했답니다. 이정도면 의심할 나위 없는 상위 0.1%라고요."

"허어, 이것 참."

너무 뛰어난 답변이 들어왔지만 그것을 제출한 사람이 한참이나 어리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일단 면접부터 한 번 보기로 했다.

"단독면접을 보자고."

"예? 하지만 그건 규정에···."

"규정이고 나발이고 만약 저 소년이 작성한 포트폴리오가 진짜라면 예선이고 본선이고 다 필요 없어. 저 소년이 무조건 1등이야."

호들갑을 떠는 것이 당연했다.

천우가 내어놓은 답안이 한은의 엘리트들보다 나았으니 말이다.

***

늦은 밤, 경남 거제로 제이슨 골드너가 찾아왔다.

그는 상무부의 대한 무역협상 업무 차 한국에 왔다가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기 위해 서울에서 거제까지 온 것이었다.

최근 미국 상무부의 덤핑판정 및 직물수입관련 규제 등으로 한국계 기업들의 고심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수지는 점점 악화되는데 재고는 쌓이지, 거기에 수지까지 악화되니 아주 딱 죽을 맛이었다.

그 때문인지 최근 CD(양도성예금증서)가 품귀였고 정부의 석유비축으로 인해 유개공(석유개발공사)의 채권 및 석유관련 상품이 인기였다.

한마디로 돈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비교적 환급이 쉽고 손해 폭이 적은 투자수단을 선호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대한민국의 국제수지방어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제의 한 횟집에는 그의 친구 최호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친구!"

"이 사람, 오랜만이군!"

"어째 상무부로 넘어가니 더 만나기가 힘든가?"

"이놈의 상무부는 서류와 씨름하다보면 며칠이 훌쩍 지나가 있어. 심지어 우리 사무실에는 창문도 없다네."

"하하, 농담도 참."

"아무튼 간에 다시 만나니 너무 좋군. 그럼 소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해볼까?"

미국인이 소주를 들먹이니 뭔가 좀 이질적으로 보이긴 했으나 그의 제스처가 아주 자연스러운 걸 보면 당사자에겐 아주 익숙한 광경인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도미 회에 소주를 한 잔 곁들이기 시작했다.

술잔이 오갔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밀린 인생얘기를 늘어놓았다.

집안이 어떻고 자식은 어떠며 하는 일은 어떤지, 대부분이 한탄이요 동정의 탄식뿐이었다.

그러다가 제이슨 골드너의 입에서 은행 얘기가 나왔다.

"그나저나 얼마 전엔 왜 은행 얘기를 한 거야?"

"은행을 하나 인수하고 싶어서."

"은행을 인수한다고? 아아, 그런···."

너무 자연스러워서 제이슨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모르고 그만 다른 얘기로 착각해버렸다.

순간, 제이슨은 자신의 귀를 다시 의심해보았다.

"뭐, 뭐라고? 뭘 인수한다고?"

"은행 말이야. 미국계 은행을 인수하고 싶어."

"어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미국이 기업의 천국이라곤 해도 자국의 회사를 빼앗아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그렇긴 하겠지. 하지만 쉽다곤 생각하지 않았어."

"허어, 진심이야?"

"당연하지."

"이 친구가 정말···."

"자네가 방금 그랬지? 자국의 기업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건 미국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이야."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고. 만약 지금의 달러화 폭등시장에서 고금리정책이 결정되어 금리가 한 방에 확 오른다고 가정하자, 그럼 미국 금융시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

"망하지 않겠어?"

"자네, 설마하니 이제 곧 금융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기는 이미 시작된 것 아니었나?"

최호명 역시 미국의 금융시장이 매우 불안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미국은 오일쇼크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서 무려 10년 동안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수지악화를 억제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던져오기까지 했었다.

레이거노믹스로 인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이것은 미국의 암세포나 다름이 없었다.

겉으로는 어찌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 속으로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장기가 넘쳐나고 있다는 소리였다.

최호명은 그에게 무기명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 다발을 내어놓았다.

"뭐하는 건가?"

"총알이야. 한 번 보라고."

"총알?"

무기명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는 수취인의 성명이 들어가 있지 않다.

한마디로 이름 없는 돈이라는 뜻이었다.

비자금의 가장 좋은 수단들이 최호명과 제이미의 앞에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에 CD가 품귀야. 왜 그런 줄 아는가? 뒤에서 누군가가 엄청난 양을 매입하고 있기 때문이지."

"허어! 설마하니 자네가···."

"그래, 미국 은행가들 입에 아주 제대로 총알을 쑤셔 박아 줄 참이야."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제이슨은 친구의 부탁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난 후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은행을 뒷돈으로 인수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그건 마치 자네가 재계의 흑막이 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흑막이 되어야 한다면 그리하겠네."

"진심이야?"

"물론."

"자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알아. 미국 상무부차관의 왼팔이지. 내 얘기를 들어주기엔 너무 높은 위치까지 가버렸어."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이런 부탁을 하는 건가?"

"은행권이 붕괴하기 시작한다면 나의 이런 선택이 결국 미국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걸세."

"은행권의 붕괴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제이슨은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미국의 금융시장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이 돈으로 우리가 미국계 은행의 대주주가 되도록 해줘."

"자네가 원하는 건 그게 다인가?"

"물론. 아아, 그리고 오해할까봐 얘기하는 건데 미국계 은행은 한국으로 유출되지 않아."

"···뭐?"

"미국계 자본을 뭐 하러 한국으로 가지고 와서 오염시키나? 그대로 미국계 은행은 스테이, 자네는 금융시장의 일부분을 되살려낸 공로를 인정받으면 되지 않겠나?"

"허참. 자네 참 통도 크시군 그래."

"뭐, 살다보니 그리 되었네."

제이슨은 소주를 한 잔 넘겼다.

꿀꺽!

"크흐! 젠장,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런 굵직한 건수를 그냥 지나치기엔 물러 터졌거든."

"후후, 그럴 줄 알았네!"

"다만 오늘 일은 자네와 나, 우리 둘 밖에 모르는 걸세. 아무도 알아선 안 되네."

"물론."

두 사람은 오랜만에 다시 의기투합하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