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28화 (28/202)

14.

8월 중순.

이제 계절은 흘러서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천우의 달러화 자산은 벌써 300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지금까지 마르크와 프랑을 사들였다 팔면서 얻은 이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천우가 회사 로비에 들어서니 이사진들이 최충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 왔다.

"감축 드립니다. 회장님! 미국 투자가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어디 내 공인가. 총괄이사 공이지."

최충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말고 불현 듯 14층에 멈추어 섰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금세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획총괄본부]

아들이 있는 곳을 한 번 스윽 들여다보고 올라가려는 것이었다.

14층은 축제분위기였다.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축하는 무슨. 다들 고생 많았고 앞으로도 쭉 힘냅시다."

천우의 선물옵션은 6월 만기였지만 현보 그룹의 정산은 8월에 마무리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2~3.2배의 수익이 곳곳에서 터져 나와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었다.

"가지."

"예, 회장님."

최충의는 천우를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어지간해선 잘 웃지 않았던 최충의가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웃는다 싶은 천우였다.

"왜 그러세요?"

"저걸 보니 뭔가 기분이 좋지 않냐? 저거, 절반은 네가 한 거 아니더냐."

"헤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투자의 재료를 아무나 줄 수 있다면 모두가 네 외증조부님과 같았어야 할 게다."

그는 가방에서 천우에게 뭔가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주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올려다보니 최충의가 답을 주었다.

"선물이다. 투자회사의 지분 97%가 들어 있지."

"네에?!"

"뭐 그래봤자 그냥 회사일 뿐이다. 재산이라고 해봤자 네가 가진 계좌의 돈 뿐이겠지."

"아아!"

"외국계 회사에 지분은 신탁이 되어 있다. 내가 죽으면 지분은 유산과 함께 네게 상속되고 회사도 정상화 될 게다."

천우는 순간, 뭔가 불안한 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까.

"할아버지···?"

"내 비서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포섭해두었다. 그 친구가 구해놓은 사람들도 믿을 만하니 걱정할 거 없어."

천우는 자신의 직감이 현실이 될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해졌다.

최충의는 천우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천우야, 세상사란 모두 대자연과 함께 흘러간다. 모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니 행여 노여울 만한 일이 있어도 순리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 알겠느냐?"

"네···!"

결국 어딘가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허나 천우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엔 그 티를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네가 사는 거냐?"

"저번에도 제가 샀는데요."

"이놈아, 벌면 좀 써라. 무슨 자린고비냐?"

"흠. 어쩔 수 없죠. 그럼 오늘만 제가 살게요."

"이놈, 지갑 한 번 열기 엄청 힘들구나."

"헤헤, 벌 때는 개처럼 벌어도 쓸 때는 선비처럼 써야죠."

"그래 너 잘 났다 요놈아."

덤덤하게 넘기고 있었지만 천우는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과연 조부와의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을까.

***

최호명은 아버지 최충의와의 독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뭘 어쩌신다고요?"

"미국 금융권과의 스킨십을 늘려놓으라고 했다. 더욱 자세히 말한다면 곡물펀드로 번 돈을 자금시장에 투자하라는 소리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하지만 회장님, 달러화는 포화시장입니다. 우리가 엘니뇨현상으로 한 턱 제대로 얻어먹었다곤 하지만 이대로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최충의는 회장집무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는 넌지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최호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미국의 금융시장이 위기라는 것은 저도 충분히 절감하고 있던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인 것이지."

"투자를 해서 뭘 어쩌시려고요?"

"은행, 네가 인수해라."

"네···?! 설마 노망이 나신 건 아니시죠?"

"···이놈이 진짜 실성을 했나."

최충의는 이번에야 말로 주먹으로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퍼억!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호명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그를 의심한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나, 아직 멀쩡하다. 최소한 벽에 똥칠하다가 죽을 정도는 아니란 소리다."

"헌데 미국계 은행을 인수한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 은행을 인수하는 거다. 메이저 시장으로 나아가라. 그래야 아무도 너를 건드릴 수 없어. 제 아무리 저 빌어먹을 놈의 국회의원들이 설친다고 미국의 은행까지 어쩔 수 있겠냐?"

"허어!"

"다만, 어중간한 의지로는 절대 은행을 인수할 수가 없다. 문제는 네가 얼마나 총알을 장전할 수 있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수할 배짱이 되느냐, 바로 그것들이겠지."

"그럼 은산분리는요?"

"방법은 네가 생각해야지. 차라리 밥을 씹어서 넣어달라고 하지 그러냐."

CD로 천억 대 자금만 있어도 위기의 은행권을 인수하는 건 무리가 없을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리스크를 감수할 배짱과 은산분리를 뚫을 아이디어였다.

"지분과 채무, 우리가 모두 떠안는다. 다만, 그 대신에 우리가 미국에게서 받아낼 것이 좀 있을 거다."

"아버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상을 하고 계신 건지 알고는 계십니까?"

"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 너의 가장 큰 적이 누구냐?"

"···외람되지만 동생이겠죠."

"그래, 동생이지. 그런 그놈이 한국계 국회의원을 등에 업었다고? 그렇다면 네놈은 조금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우리가 미국에 먹히면요? 아무리 우방이지만 미국이 조국은 아니잖습니까."

최충의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놈아, 그리되지 않도록 네가 불철주야로 뛰어 다녀야지. 언제까지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살 수 없다고 설치던 놈이 그런 약한 소리를 해서 되겠냐?"

"그야···."

"내가 어려서부터 뭐라고 가르쳤느냐?"

"···현실보다 큰 이상을 꿈꿔라."

"그래, 아직 기억하는군."

최호명은 보다 큰 이상을 꿈꾸라고 배워왔다.

그 이상을 가르친 최충의는 이제 최호명에게 그 교육을 참된 뜻을 실현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이 실현될 리 없다고, 최호명은 그리 생각했다.

"아버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은행인수라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최충의는 답답하다는 듯, 탁자를 두드렸다.

탁탁탁!

"쯧, 이런 밸도 없는 놈. 그런 물러터진 각오로 이 재계에서 살아남겠다고 생각했더냐? 만약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업을 접고 네 내자와 같이 커피나 만들어 팔아라."

"하지만 방법이 없잖습니까."

"방법은 아까도 말했다."

"고작 비자금으로 뭘···."

"고작 비자금? 이놈, 호명아. 최대한 크게 봐라. 미국의 금융위기가 터지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단 말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 지금처럼 큰 이득은 못 보겠지. 하지만 당장 1년, 5년, 10년만 보는 그런 짧은 식견으로 과연 앞으로의 30년, 50년을 준비할 수 있겠냐? 아니,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다."

"50년···."

"길게 봐라. 최대한 길게 보란 말이다. 지금의 굴욕? 잠깐의 실패? 굴욕과 실패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수도 없이 넘어질 각오를 해라. 나도 이 자리까지 오는데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경험했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 해서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흠."

"보통의 기회는 위기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빛을 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절대 조급해 하지 말고 네가 만든 씨앗을 아들에게 뿌린다고 생각해."

최충의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최호명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되돌리기엔 너무나 멀리와 버린 길, 최충의는 그걸 되돌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명아, 지금 네가 미국으로 간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 가문에도 기회는 있어. 지금은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시절부터 박정희, 전두환까지, 참 길게도 이어졌지. 어쩌면 또 다른 독재자가 나올 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딱 그런 상태야. 하지만 내가 말했지? 정점이 있으면 낙점이 있는 법이라고."

"정권이 교체된다면 우리 그룹은···."

"망할 수도 있다."

"······!"

최충의는 다음 정권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뇌물로 쌓아올린 기업, 언젠가는 정계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민주화운동권 인사들이 벌써 정치계의 거물이 되어가고 있는 판이다. 앞으로 10년만 더 있으면 그들이 대거 등판하게 되겠지. 그런 정치판에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냐?"

"허어!"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라. 다만, 현보가 망해도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다시 현보를 먹어치워라."

"제가 그럴 능력이 되겠습니까?"

"안 된다면 네 아들에게 기대를 걸어봐야지."

"천우!"

"그놈은 천재다. 네가 기반만 잘 닦아준다면 그놈은 우리보다 족히 수 십 배는 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최호명에게 지금은 인생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이라.'

허나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슬프지만 아버지라는 커다란 벽이 사라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며칠 후 저녁.

천우네 가족은 저녁을 먹다가 말고 아주 심각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

"미국이요?"

"내가 저번부터 당신에게 말했었지. 회사에서 독립할 거라고.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미국에서는 가능하데요?"

"노력을 해봐야지."

"으음."

"천우야, 네 생각은 어떠냐?"

그제야 천우는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무슨 생각이신가 했더니 한결을 미국으로 가지고 나가시려는 것이구나.'

마치 사후를 준비하는 듯했던 할아버지의 행동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천우로선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저는 좋아요!"

"정말이야?"

"네! 마침 컬럼비아 대학에서 저를 오라고 하기도 했었잖아요."

존 헤네시는 정식으로 천우에게 초청장을 보냈었다.

이런 식으로 5~7세의 천재들이 초중고 과정을 생략하고 대학에 들어간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다만, 약간의 검증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건 천우에게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허나 한희연은 천우가 걱정되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우가 적응을 못해서 고생하면 어쩌나 싶어···."

"엄마, 저는 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저는 앞으로 위대한 투자가가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위대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니겠어요?"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면야 한희연도 별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아들에게 그녀가 NO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희연도 천우가 컬럼비아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가족은 뜻을 모았다.

"좋아요, 한 번 가 봐요 우리!"

"그래. 당신은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

"아싸! 이제 나도 증조할아버지를 따라서 공부할 수 있다!"

세 가족은 당장 내일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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