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7월의 한 여름.
올해는 기록적인 폭설만큼이나 더위도 엄청났다.
모 신문사는 저번 달부터 30도가 넘는 이른 폭염으로 인해 청량음료가 벌써 천만 상자 이상 팔렸다고도 하였다.
특히나 작년부터 올해까지 에어컨의 판매량이 두드러진 경향이 있었다.
지금까지 팔린 가정용 에어컨의 양만해도 100만 대, 이제 가전시장이 그만큼 팽창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0시 30분.
최충의는 월요일마다 천우를 데리고 외환거래에 나서주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영업용 에어컨을 가리켰다.
"천우야, 저 에어컨이 어디서 온 것 같으냐?"
"메이커는 한국 메이커인데요. 그럼 한국에서 온 거 아닌가요?"
최충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겉은 그래 보이지. 하지만 안을 뜯어보면 죄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온 부품들이야. 심지어 에어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컴프레서까지도 수입해다 쓰는 실정이지."
"아하!"
"결국 아직까지도 기술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현재 한국기업들이 겪는 역마진의 이유인 것이지."
그는 천우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명심해라. 돈이라는 건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거야. 무조건 너보다 나은 인재를 회사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사람이 돈을 만든다!"
"이렇게 생각해봐라. 투자전문가 한 사람과 일반인 백 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결국 수익은 어느 쪽이 많이 나겠냐?"
"전문가 한 사람이죠."
"하지만 비용은 어느 쪽이 더 싸겠냐?"
"백 사람에게 줄 월급에서 1/10만 떼어서 줘도···."
"투자전문가는 높은 연봉을 받아서 능률이 오를 것이고 수익은 더 커지겠지?"
"아아, 그런 거구나!"
최충의는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최충의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걸어온 이 사업가 인생에서 얻은 노하우나 격언 같은 것을 설파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것이 자신의 밑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자신의 끝이 정해진 이 마당에서 천우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최충의의 건강이상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천우로서는 그저 '좋은 말이구나'하고 새겨들을 뿐이었다.
"쿨럭, 쿨럭!"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괜찮다. 어제 창문을 열고 잤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허나 이것만으로 천우가 최충의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의학적 지식은 있으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색이 별로···."
최호명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은 어떻게 환매를 하고 있냐?"
"원화로 마르크와 프랑을 사서 오르면 팔고 있어요!"
"이득은 많이 봤고?"
"헤헤, 벌써 3억 가까이 모았는걸요!"
"오호! 꽤 모았구나. 그럼 계속해서 유럽 외환을 사서 오르면 팔 생각이냐?"
"그렇긴 한데 가능하면 달러를 최대한 많이 모으고 있어요."
"달러?"
천우는 최충의에게 슬그머니 귓속말을 전했다.
"···이건 비밀인데요! 이제 곧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한데요!"
"긴축을 실시한다고? 가뜩이나 달러화가 폭주하는 지경인데?"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카렐 학파들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최충의에게도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최충의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놈 봐라. 이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최충의가 젊었던 시절, 그는 첨단기술의 현지화를 이루겠다는 목표 하나로 미국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오금자를 만나 열애하였고 결혼승낙을 받으려 오송익과 대담하게 되었다.
그때 최충의가 받았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었다.
'대세에 따르려고 하면 어찌하나? 대세가 될 생각을 해야지. 포화에도 언제나 틈새는 있어. 그걸 노리지 못하면 실패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처가와의 사이는 멀어지고 말았다.
체스터 카렐이 죽으면서 그를 둘러싼 재산싸움이 벌어져 최충의와 오금자가 장외로 쭉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때 최충의의 사업도 꽤나 타격을 많이 받았었다.
그들이 분 입김이 한국까지 날아와 최충의의 사업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충의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뇌물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지.'
그는 이제 뇌물이 아닌 자신의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미국금융시장의 몰락이었다.
레이거노믹스는 분명 미국 경제를 구제하긴 했었다.
허나 그 이면에는 상당한 맹점들이 있었다.
달러화의 폭주와 그로 인한 경상수지적자, 세금감면 등으로 인한 재정적자 등, 어쩌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정책일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입장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사실상 실패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단 하나, 미합중국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져다 대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만약 사실상 레이거노믹스가 실패한 정책이라고 해도 미국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상쇄시킨다.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초일류국가가 무너질 것이라곤 전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정말 아주 만약에 미국이 극심한 금융타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극심한 타격을 받아 은행권이 주저앉는다면···?!'
줄도산이었다.
제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최충의는 지금이 바로 빙부 오송익이 말했던 그 '틈새시장'이 생길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타격을 받은 금융권에 뛰어든다, 그리고 거기서 외국계 금융회사를 손에 넣는다.
그게 바로 최충의의 마지막 한 방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한방은 아들을 위한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최충의의 생각대로 최호명이 따라줄 것인가, 바로 그 점이었다.
두 부자는 워낙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대안은 있다.'
최호명은 천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믿음직하고 똘똘한지, 심지어 이대로 자신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요즘 천우에게 관심이 많다.
"그나저나 요즘 서고에 자주 드나든다면서?"
"네! 한양 최 씨 일대기를 읽고 있어요."
"최 씨 일대기라."
그러고 보면 허태용과 최충의는 거의 동년배이니 연대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우는 그에게 황금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안에는 황금이 있어요?"
"그건 왜 묻는 거냐."
"그냥 궁금해서요. 진짜로 황금이 있다면 할아버지가 그걸로 사업밑천을 삼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최충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내가 그걸 다 쓰면 후대에 남은 너희들은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그걸 썼다면 회사가 지금보다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그는 아주 짧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업은 돈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종자돈이 많다면 사업이 쉽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업이 더 번창하는 건 아니고 종자돈이 결국 성공했을 때 가진 재산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야."
"아아, 그렇구나!"
최충의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뭐, 그렇다곤 해도 황금이 내 눈앞에 있었다면 조금은 욕심이 났겠지?"
"그럼 결국 금은 존재하는 건가요?"
"글쎄. 과연 어떨 것 같으냐?"
아마 금을 손에 쥐고 있어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마치 땅 짚고 헤엄치는 것과 같은 이치, 그것보다는 헤엄치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낫다고 최충의는 생각한 것이었다.
최충의가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도 돈을 꽤나 잘 벌잖냐."
"헤헤, 그런가요?"
"이놈아, 그럼 투자한 사람한테 최소한 밥이라도 한 끼 사야하는 거 아니냐?"
"어라? 증여도 투자인가요?"
"···이놈 봐라?"
"헤헤, 농담이에요! 그럼 할아버지, 소고기나 좀 먹으러 갈까요?"
"지금?"
"할아버지 집무실까지 따라갔다가 점심에 나가서 먹으면 되죠!"
원래 최충의는 집무실에 누군가와 동행하는 걸 꺼려하는 스타일이었다.
허나 사람은 한 순간 변하기도 한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그럼 외화장사를 할 때엔 할아비와 같이 하루 종일 있자꾸나."
"저야 좋죠! 헌데 회사에서 매일 그래도 괜찮아요?"
"뭐 어떠냐. 그게 죄는 아니잖냐. 이정도 노인우대도 안 해주면 내가 회사에서 나올 거다."
"역시! 헤헤, 할아버지는 화끈해서 멋있어요!"
"놈, 아부 떨기는."
천우는 속으로 조부가 참으로 많이 바뀌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허나 여전히 그 이유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
총괄이사 집무실 안.
최호명은 부하들이 가져다 준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사님, 회장 집무실에 아드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출근한다는 게 진짜입니까?"
"으음···? 그랬던가."
"비서실에서 애들이나 먹는 과자와 사탕을 사오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작은 도련님이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부하들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회장님도 이제 연로하셨나? 많이 누그러지셨네요. 이런 모습,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최호명은 그들의 장단에 맞춰서 웃어주었다.
허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진짜 많이 안 좋으시긴 한 모양이네. 평생 안 하던 짓을 다 하시고.'
그는 짐짓 무거운 마음으로 보고서를 끝까지 읽어냈다.
그런 후, 부하들에게 되물었다.
"이 보고서의 내용 말입니다, 진짜 제대로 검증한 거 맞아?"
"네, 이사님. 명함을 주셨던 아키야마 노리히코 씨에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노리히코가 그리 말했다고···?"
"거의 확정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고철매입세력을 추적했던 최호명은 한 가지 의문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 왜 고철을 15%나 더 주고 매입하려 했던 것일까.
허나 이번 EC와 미국 재무부의 일본 압박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건 바로 일본의 엔고시대의 개막이었다.
재무부에서도 달러화 폭주의 위험성을 인지하였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세우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기준금리 인하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달러화 폭주를 막으려면 만년 절하로 이득을 보는 엔화를 위로 끌어 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엔화가 절상되면 미국과 유럽 모두가 안정된다.
물론, 일본의 무역수지가 개판이 될 테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미국의 도생, 그것만이 이 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엔화가 절상되면 금리를 내린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현 정권에서는 엔화절상의 대책으로 통화완화를 생각하고 있답니다."
화폐가치가 오른다고 금리를 내리고 통화를 푼다고 해서 가치가 내려갈까?
최호명은 상당히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허나 그렇다고 그것이 최호명의 선택을 흔들 리는 없었다.
"어쨌든 금리가 내려간다면 우리에겐 땡큐지. 부동산과 채권을 매입하도록 하세요."
"이제 막 일본이 사무라이 본드를 푼다고 했으니 양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요?"
사무라이 본드는 70년 12월에 아시아개발은행이 발행한 엔화표시 채권인데, 미국의 양키본드, 영국의 불독본드와 더불어 해외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채권이었다.
현재 사무라이 본드의 규모는 3조 6천억 엔, 허나 석유파동 등으로 수지악화가 계속되면서 채권시장은 사실상 닫힌 상태였다.
일본이 자본시장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세요. 살 수 있는 최대한 사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동산은 어느 쪽에 투자를 해볼까요?"
"도쿄를 중점으로 해보세요. 시부야나 하라주쿠 같은 곳 말입니다."
"자금은 얼마나 투입할까요?"
"맥시멈 얼마까지 투입할 수 있죠?"
"대략 1500억에서 2000억 사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상당한 무리가 따를 텐데요."
"괜찮아요. 하세요."
최호명은 그야말로 투자에 목숨을 걸었다.
허나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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