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26화 (26/202)

13.

6월 중순.

서울 이태원에 있는 고급호텔 블루마운틴 연회장으로 외제 고급차들이 물 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우는 그 고급차 행렬 한 가운데 있었다.

"할머니, 여긴 어디에요?"

"사교모임이란다."

"사교모임이요?"

"네 진외증조할아버지께서는 한 때 강단에 선 적이 있단다. 그때 문하에서 수학했던 학생들이 지금은 투자전문가가 되어서 재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 그 사람들이 1년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갖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증조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가 그 회 차가 거듭되면서 사교모임 형식으로 바뀐 거야."

천우는 오금자의 손을 잡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그는 로비 현관에 걸린 플레카드를 보고 나서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체스터 카렐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모임]

체스터 카렐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 사람들이 장성해서 이 자리에 모이고 있으니 한마디로 지금 이곳은 별들의 잔치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였다.

오금자가 들어서자, 단숨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오오, 카렐 씨! 어서 오십시오!"

"올해도 선친을 기리기 위해 모여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스승님을 기리는 자리에 제자가 빠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무튼 너무 반갑습니다!"

오금자는 천우에게 필요한 것이 인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정보력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증조부의 후광만 덧입혀준다고 끝이 아니라 그 후광을 등에 업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체스터 카렐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심지어 그 제자들조차도 이름만 대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거물이었다.

미국 자산규모 2위의 록 베넷, 투자은행의 거물 마이클 호프만 등, 그 업적들 역시 쟁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이 스승 체스터 카렐의 영원불멸한 가르침 덕분이라고 칭송하고 다녔다.

그런 대단한 증조부를 두었지만 단순히 그 후광만 믿고 까분다면 반드시 망하고 만다는 걸 오금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신문으로 보셨을 겁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큐를 가진 천재소년 최천우, 들어보셨죠?"

"물론입니다. 멘사에서도 탐을 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아! 이 소년이 바로 체스터 카렐님의···."

"증손자지요."

"오오!"

어떤 집단에 녹아드는 가장 좋은 수단.

바로 관심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 그런 천재가 투자의 전설 체스터 카렐의 증손자라니!

저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판은 깔렸다.

이제부터는 천우가 하기 나름이었다.

일단 천우는 사람들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데 성공했다.

그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말을 걸었다.

"요즘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니?"

"환율이요."

"환율? 외환을 말하는 거니?"

"네! 요즘 같은 시기에는 돈이 돈을 번다고 들었어요."

"돈이 돈을 번다···?"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었다.

허나 이들은 최고의 엘리트집단이다.

아무리 스승의 증손자라곤 하지만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건, 명사의 자손이건 이들에게 있어선 그저 관심을 끄는 이방인일 뿐이었던 것이다.

"돈이 돈을 버는 건 맞지만 그에 따른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투자의 근거!"

"그래, 근거 말이야."

천우는 이쯤에서 뭔가 하나 툭 던져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한 가지를 절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가진 호재를 여기서 풀어놓으면 제 밑천은 바닥이 날 텐데, 저도 뭔가 받는 것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뭐···?"

"그게 도리라고 배웠는데."

저들이 천우를 이방인으로 생각한다면 천우 입장에서도 저들은 이방인이라는 소리다.

이방인이 쇼를 보려면 관람료를 지불해라, 그런 뜻이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 같았다.

"좋아, 호재라. 만약 네가 호재를 풀어놓는다면 우리도 뭔가 하나씩은 정보를 내어주마."

"그렇다면야!"

천우는 행사장 인원들을 체크하기 위해서 놓아둔 칠판에 있던 글씨를 모두 지웠다. 그리곤 그 곳에다가 뭔가 그림을 그려나갔다.

사람들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허나 대략 1분 후, 그들은 저것이 중동의 지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동에서는 이란과 이라크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물경 50만의 병력이 대치 국면에 접어들고 있데요. 장장 3년 4개월의 전쟁이 이제 정말 파국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죠."

"호오···."

"뿐만 아니라 드루즈파 회교도의 레바논 타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시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데요. 이 두 가지 사건이 시사 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죠.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시로 북진하는 동안 기독교도들이 진격 로를 열어주었고 그것은 자칫 극단주의 회교도들을 다시 한 번 자극하는 일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런 일이 있기는 하지."

"만에 하나 잘못해서 이라크의 수니파와 같은 급진주의 회교도가 기독 권과의 싸움을 다시 재현해내기라도 한다면 제 3차 오일쇼크가 도래할 지도 모르죠. 이러한 페르시아 만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원유를 비축하려는 움직임도 늘어날 것이 분명해요."

"흐음, 네 말이 맞긴 하구나. 헌데 그건 호재가 아닌 것 같은데?"

천우는 전쟁의 진행상황을 실선으로 표시해두었다.

어디서 어떻게 충돌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말이다.

그는 실선을 따라서 달러화의 시세를 적어두었다.

"전투가 일어나면 원유가격도 올라가지만 달러도 같이 올라가요. 이때 샀다가···."

한참 올라가던 상승곡선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아래로 약간 떨어졌다.

바로 휴전이었다.

"갈등국면이 해소된다면 달러화의 질주도 주춤하겠죠."

"달러화가 주춤한다···. 말은 쉽지만 휴전을 어떻게 증명해낼 건데?"

천우는 칠판에 미국의 원유수입 그래프를 그려냈다.

그래프는 3일 전부터 하향곡선이었다. 그것도 꽤나 큰 폭으로 말이다.

"미국은 그 누구보다 정보력이 빠르잖아요?"

"아아!"

오펙의 증산발표도 없는데 오일쇼크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미국이 원유수입을 줄인다는 건 뭔가 좀 이상한 일이었다.

"여름에는 원유수입을 줄이는데, 그건 평시에나 가능한 일이죠. 헌데 미국은 지금 딱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밖에도 여러 가지 징후가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미 휴전이 가까워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는 천우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 천우를 보았을 때처럼 환호성을 지르거나 탄성을 내뱉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감탄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깍쟁이들이 내 말에 혹했을까?'

과연 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넌지시 한 가지 더 물어볼 뿐이었다.

"그럼 꼬마야. 달러를 팔 거니?"

"아니요!"

"어째서?"

"달러화가 하향곡선이긴 한데, 그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에요. 결국엔 다시 오르겠죠. 만약 매수를 한다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요!"

"떨어질 때 산다?"

"이제 곧 미국이 금리를 올릴 지도 몰라요. 책에서는 그걸 긴축이라고 하더라고요."

순간, 일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국의 금융업계나 투자업계나 달러화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연준이 통화긴축카드를 대놓고 쓸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미국 금융업계에 혼돈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미 연준은 자국의 은행 몇 개를 날리는 것과 무역수지적자를 서로 바꾸는 극약처방을 내리고 만다.

대부분은 이 일을 예견하지 못한 채 역풍을 맞았지만 오로지 한 집단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바로 체스터 카렐의 제자들이었다.

이른 바 '카렐 학파'만이 이 일을 예견했기에 이 당시에는 카렐의 거품이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었다.

카렐 학파는 진심으로 경탄했다.

"오오···! 꼬마야, 넌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니?"

"증조할아버지께서는 금리변동의 법칙을 세우셨잖아요. 그걸 따른다면 대략적인 예측이 가능하죠."

"···지금은 달러화가 고가행진이라 역마진이 계속 발생하는데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달러화를 대외정책을 통해 상대적으로 낮추는 것이 현명하지 당장의 저금리 전략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학파도 일종의 이념이다.

이념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절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끈끈한 유대관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한 집단을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큰 결점이 될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모순까지 생각할 단계는 아니었다.

짝짝짝!

"역시, 스승님의 증손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군!"

"우리 학파에서 조만간 걸출한 인물 하나가 탄생하겠어!"

사람들은 기대와 관심을 가졌다.

여기저기서 명함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중에 연락 한 번 주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구나."

"네, 감사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고."

"네!"

수많은 명함들 중 한 사람이 등장하니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는 바로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의 경영대 교수 존 헤네시였다.

"반갑다. 이 모임을 30년 째 다니고 있는 존 헤네시란다. 서른에 시작해서 이제는 예순이 되었구나."

"컬럼비아 대학이면···."

"그래. 네 증조할아버지의 강단이 있었던 곳이지."

천우가 존 헤네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미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투자집단의 수장을 역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증조할아버지를 따라서 공부 해 볼 생각은 없니?"

"컬럼비아 대학에서요?"

"그래.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다보면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릴 지도 모르잖니."

좋은 기회였다.

허나 조기유학은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였다.

천우가 대답을 망설이자, 존 헤네시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나중에 나이가 차서 컬럼비아에 들어와도 괜찮고. 다만, 네가 찾는 궁극적인 무언가가 우리 대학에 있다는 건 꼭 명심했으면 하는구나."

"네! 알겠어요."

천우는 어쨌건 정보의 장에서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천우는 충분히 만족했다.

***

늦은 밤.

최충의는 제 2 비서실장 이유성을 불러들였다.

이유성은 최충의에게 몇 장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최충의는 이유성에게 미국의 금융시장을 심도 있게 관찰하라고 지시해두었었다.

최충의는 보고서를 아주 꼼꼼하고 자세히 살펴보였다.

"···정말이야? 이 보고서의 내용들이 사실이냐고."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간 곳이 55개, 확실합니다."

그는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허나 이내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간당 간당하군.···."

"이대로 금리가 0.3%만 올라도 휘청거릴 은행들이 수두룩합니다."

"뭐야, 그렇다는 건 정말 미국의 금융업계가 한 방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이미 70년대부터 미국의 무리한 통화긴축으로 연준의 기준금리가 21%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때 받았던 타격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잘못하면 파탄이라는 소리?"

"예."

70년대 오일파동 이후, 미국의 연준의장은 급작스러운 통화긴축으로 기준금리를 21%까지 올려버렸다.

이때의 타격으로 오일파동의 극심한 저성장 및 경기침체 속에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있었다.

경제공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 및 통화긴축의 재조정이 실시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기준금리 3%대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달러화 상승 정책을 썼다.

자국화폐의 무분별한 절하는 국가경쟁력을 상실시킬 수 있다는 의견에서였다.

결국 저금리, 고달러, 미국의 금융계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은행권은 돈을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

그로 인해 개도국 차관, 석유시추사업 투자 및 차관 등 무리한 지출이 많았다.

허나 문제는 대부분의 은행권이 최근 달러화 폭주로 인해 미연준이 금리인하를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생각들이 지표로 나와 있었다.

고정금리부 자산에 소위 '몰빵투자'를 한 은행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최충의는 결심을 세웠다.

"좋아, 슬슬 준비하자고."

그는 이유성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었다.

"이 사람에게 연락해서 변호사들을 보내달라고 전해."

"실례지만 누가 보냈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누구인지 알릴 필요도 없어. 그 명함은 가족에게만 전달되는 거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연락을 취해서 스케줄을 조절하겠습니다."

명함에는 '이스트우드&카렐 컴퍼니'라는 직인이 찍혀 있었고 그 밑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덜렁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들놈 뒷바라지 하는 것도 참으로 힘들구먼."

최충의는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빛바랜 가족사진을 꺼내보았다.

어린 아들들, 그때보다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때 생각이 자꾸 났다.

아마도 손자 때문인 것 같았다.

"사진 한 장 다시 박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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