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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
천우는 오금자의 손을 잡고 삼성동 컨벤션센터를 찾았다.
그의 손에는 '은성해양조선'의 주식이 쥐어져 있었다.
오금자는 천우에게 필요한 건 지식보다는 경험이, 자금보다는 그를 이끌어 줄 인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 전부터 오금자는 천우에게 성공하는 경험보다는 실패할 경우, 회사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해서 그녀는 천우에게 상한가의 주식보다는 하한가의 주식을 주로 사주었다.
은성해양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최근 정부의 집중관리대상 150개 기업 중 하나에 들어가는 회사였다.
오늘은 은성해양조선의 매각절차를 논의하고 표결하는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현재 세계의 조선시장은 수지악화로 인해 하나 둘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과당경쟁, 덤핑수주 등으로 상태가 많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다른 업계 역시 마찬가지.
천우는 이제 하도 망하는 회사를 많이 봐서 그 패턴을 외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오금자는 주주총회에 오기 전, 천우에게 해당 회사의 재무제표를 주고 그걸 탐독하라고 숙제를 내어주곤 했다.
그를 통해서 회계의 기본을 배우고 회사의 몰락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한 것이다.
오금자는 주주총회장에 들어선 천우에게 물었다.
"은성해양조선에 대해 공부해두었니?"
"네! 은성해양조선은 최근 사우디와 개도국에서 받아온 선박을 대거 수주해서 7,000억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했어요. 하지만 은성 그룹의 노사분규가 가속화 되면서 2,000억에 가까운 순손실을 기록했지만 매출은 꾸준히 오르고 있어요."
오금자는 주주총회장을 찾을 때마다 항상 똑같은 얘기를 하곤 한다.
"천우야, 그럼 이 회사의 주식은 앞으로 사는 것이 좋겠니, 파는 것이 좋겠니?"
그녀는 손자가 천재라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육을 할 때에도 상당히 단도직입적이었다.
천우는 그런 교육법이 너무나도 좋았다.
"만약 지금 주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면 기다려야할 테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사지 않는 편이 낫겠죠!"
"어째서 그렇지? 뭔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는 손가락으로 차트 아래쪽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순이익을 가리켰다.
"이게 문제에요!"
회사의 건강상태는 이익이 많을수록 좋다고 말 할 수 있다.
아무리 총매출을 수 조원 벌어들였다곤 해도 순이익 폭이 적으면 말짱 황이다.
예를 들어서 5천억에 배를 수주해서 만들어 판다고 치자. 헌데 배 한 대를 만드는데 5천억이 넘게 들어간다면 과연 그게 남는 장사일까?
절대 아니었다. 그야말로 수지 안 맞는 장사인 셈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대부분 이런 상태였다.
오금자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옳지, 잘 봤구나. 물건을 만드는 원자재 값은 내려갔는데, 정작 그걸 수입해 오는 동안에 드는 비용은 증가했어. 게다가 조립을 해서 판다고 해도 문제야. 너나 나나 물건을 싸게 팔겠다고 나서니 배 값이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었거든."
"제로섬 게임!"
"그래, 맞아. 천우야, 앞으로는 이런 부분을 조심해야 한단다."
누구나 장래희망이라는 것을 가진다.
천우는 그 장래희망이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그쪽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로 보였다.
때문에 오금자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계 기업들의 고질병과 같은 문제가 있어. 박리다매 식 영업, 즉 물건을 거의 욱여넣듯이 팔고 있다는 점이이란다."
대한민국의 기술수준은 점점 세계 최고수준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허나 과당경쟁으로 인하여 수지는 악화되고 있었고 그만큼 이익금이 줄어서 자금의 재투자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품질경영, 현재 한국계 기업에 필요한 점이라고 누누이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었다.
앞으로 천우가 투자를 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강조될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종자돈이 모인다면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지 감이 오는군.'
천우의 깨달음은 AI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마샤는 업데이트를 시작하였다.
-AI마샤의 업데이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완료되었습니다. 기업 시뮬레이션 어플리케이션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기업 시뮬레이션?'
-우리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던 차트는 이미 완성된 시나리오입니다. 허나 은성해양조선처럼 망하는 회사에 주인님께서 대량의 자금을 투자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나리오가 바뀌겠군!'
-주인님이 A라는 기업에 투자할 경우, A기업이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 계산하여 해당 모의실험에 대한 결과를 알려주는 장치가 바로 시업 시뮬레이션 어플리케이션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녀는 어플리케이션의 인터페이스를 천우의 눈앞에 펼쳐주었다.
일종의 계산기처럼 생긴 이 어플리케이션에는 회사를 선택할 수 있는 탭이 있고 거기에 투자금과 투자기간 등을 장입할 수 있는 홈이 있었다.
어플리케이션에 투자금과 기간을 장입시키니 그 결과가 한 장의 시나리오로 출력되었다.
-은성해양조선의 경우엔 100억을 투자하고 3년을 기다리면 10억의 로스가 발생합니다만, 10년을 기다릴 경우엔 25억의 이윤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네요. 정부의 국가기반산업장려정책에 의해 세금혜택과 지원금을 꽤 많기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호, 좋은 기능이군 그래. 하지만 이게 100% 맞는다는 보장이 있긴 한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리오 끝에는 상항 퍼센트 게이지가 붙습니다. 그걸 참고하고 최종결정을 내리는 건 주인님의 몫인 것이지요.
'어렵군.'
-세상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본인의 인생루트를 결정하는 문제도 그렇지요.
오늘 천우는 꽤 좋은 어플리케이션을 얻었다.
허나 이 '꽤 좋은 어플리케이션'이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지는 천우나 마샤 본인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
이른 아침.
일요일이었던 어제, 본가에서 하루를 지내고 오늘은 천우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최충의는 밥을 먹고 있던 천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6월이잖냐."
"네?"
"둘 째 주가 만기일인 것으로 아는데. 벌써 3일이나 지났잖느냐."
"아아, 투자금 말씀이신가요?"
"그래. 얼마나 벌었느냐?"
최충의는 천우의 투자 금이 이제 반환될 시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었고 최충의는 자신이 만들어 준 계좌이기에 그 잔액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손자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지금까지 꾹 참고 기다린 것이었다.
천우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2억 3천 만 원이요!"
"호오···. 제법 수지맞았는데?"
"헤헤, 운이 좋았어요!"
"운도 실력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복권을 긁는 것 같은 게 아니고선 대부분의 행운은 본인의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인 거지."
"그런 거였나요?"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손자에게 직접 들으니 카타르시스가 더 컸다.
최충의는 이제 천우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그래, 이제 그 돈으로 뭘 할 거냐?"
"외화를 사고 팔 거예요!"
"뭘 판다고?"
"외화요! 외국 돈 말이에요."
최충의는 황당해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천재라곤 하지만 외화를 사고판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화환매는 투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걸 하겠단 말이냐?"
"저는 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도대체 뭘 믿고 환매를 하겠다는 건데? 환매에도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남들만 따라했다간 깡통 차기 딱 좋은 것이 바로 외화환매라는 거다."
그는 투자에 근거를 물었다.
천우는 너무나도 당연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근거는 많잖아요! 차트도 있고 호재도 있고!"
"분석만으로 환매수익을 거두겠다···. 그 말인 것이냐?"
"네!"
84년 6월 현재, 원화는 1달러 당 700~790원, 100엔 당 350원 선에 책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엔 달러 환율은 1달러 당 210엔 수준, 원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규모에 비해 엄청난 강세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화폐가치를 산정할 때 주 무역대상국에 대한 화폐가치 가중치를 참고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니 달러의 상승가중치에 따라서 원화도 같이 절상된 것이었다.
천우가 판단했을 때, 원화강세인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라 생각된 것이었다.
반면 최충의는 달랐다.
'변동 폭이 너무 크다. 아무리 천재라도 한 사람의 머리로는 될 게 아니야.'
현재의 외환시장은 정말 파도타기가 연상될 정도로 변동이 심하다, 그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천우는 언제나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하긴, 천재의 두뇌가 어떻게, 얼마나 발달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최충의는 밥을 다 먹은 후, 천우에게 손짓했다.
"가자. 이 할아비가 직접 환전해주마."
"네? 할아버지는 바쁘시잖아요. 그냥 엄마랑···."
"아니다. 같이 가자. 출근길에 잠깐 들르면 되는 걸 뭐 하러 어멈까지 불러들이느냐."
천우도 최충의와 함께하는 시간이 꽤나 유익하고 즐거웠다.
이제 두 사람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기업집단의 회장으로서 최충의는 사회적 지위가 있었기에 같이 밖을 돌아다니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최충의도 그걸 잘 알고 있기는 했다.
허나 그에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외환은행장이 나랑 잘 아는 사이다. 네가 앞으로 낼 환전수수료를 내가 좀 깎아주마."
"허얼···.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거 뭐 있냐. 내가 저 은행에 가져다 준 돈이 얼마인데."
철저한 GIVE&TAKE와 남자다운 화끈함.
사실 최충의의 이런 면은 천우도 약간은 동경하고 있었다.
'역시 화끈하시군.'
최충의는 천우를 데리고 외환은행 본점을 찾아갔다.
외환은행 창구에서는 최충의 회장이 왔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가 이런 출근시간에 대놓고 은행 본점을 찾아왔다는 것에 약간 놀란 것 같았다.
외환은행 은행장 조석규는 깜짝 놀라서 최충의를 맞으러 나왔다.
"회장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내 손자가 외화를 환매하고 싶다고 해서 말이오."
"아아, 손자가 환전장사를···."
"계좌 하나 틉시다. 가능하오?"
"물론입니다. 본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어디 있긴. 여기 있지."
최충의는 잡고 있던 천우의 손을 그대로 앞으로 쭈욱 밀었다.
그러자, 천우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게 되었다.
"최천우에요!"
"으음, 그래. 이 아이가···. 으응?!"
조석규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허나 그는 별안간에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 소문의 천재소년이 바로?"
"그렇소."
모든 건 한 마디로 일축되었다.
그건 바로 천재.
조석규는 알아서 수수료까지 깎았다.
"수수료는 최대 0.5%까지 밖에 못 빼드립니다. 이해하시지요?"
"조금 더 안 되나?"
"정계나 언론의 시선도 신경을 써주셔야지요."
"그럼 0.4%로 못을 박읍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관계가 조금 더 긴밀해 질 것 같은데."
"흐음···. 회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무리해서라도 해드려야지요."
"고맙소."
"하하, 별 말씀을. 그나저나 오늘 상의하기로 하셨던 용건은···."
"그건 조금 있다가 차근차근 얘기합시다."
최충의는 천우를 일부러 외환은행에 데리고 온 것이다.
오금자와 마찬가지로 최충의는 천우에게 필요한 건 자금이나 지식이 아니라 인맥과 경험이라 생각했다.
조석규는 꽤나 오래도록 스킨십을 유지해 온 최충의의 끄나풀이다.
이런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천우에게 붙여주려는 것이 최충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 할아비가 이따금 비즈니스에 너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때마다 아주 그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쾅쾅 찍어두어라. 그들에게 능력 좋은 떡잎임을 알려주란 말이다."
"네!"
내리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간이라도 빼어줄 것 같은 심정, 최충의는 회사를 못 주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우는 최충의의 말대로 여기저기 눈도장을 쾅쾅 찍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지. 마샤, 현재 세계의 환율은 얼마지?'
-그래프로 보여드릴까요?
'음, 그것도 좋은데 그래프와 함께 차트도 함께 보여줘.'
마샤는 천우의 눈동자에 환율그래프를 만들어서 띄워주었다.
[한국의 주요무역국의 환율변동 그래프]
[마르크: 2.723에서 3.132 - 변동 폭 약 15%]
[프랑: 8.3338에서 9.5958 - 변동 폭 약 15%]
[······대 유럽대비 대한민국의 환율 변동 폭은 약 7%]
전 세계 환율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앞에 차트가 떠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흐음, 원화가 확실히 많이 올랐네.'
-지금이 환매에는 적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정도 변동 폭이라면 환매수수료쯤이야 별 것 아닌 수준이겠지요.
'그럼 어디 한 번 할아버지 지인들을 한바탕 뒤집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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