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오금자의 교육법은 보통의 교육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회사 내부를 구경하면서 실무의 감각을 익힌다던지 은행이나 종금사 등을 돌기도 했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감각'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렇게 정기적으로 경제 및 금융에 관련된 기관을 돌면서 견학하고 현장에서 학습한다는 것이 오금자의 방침이었다.
이론과 원칙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무에서는 생각과 많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방식 그대로 이론과 실무의 괴리감을 없애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오금자의 이런 방침이 마샤의 진화를 엄청나게 촉진시키고 있었다.
경험이 없는 지식, AI의 치명적인 단점을 오금자가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여의도 증권거래소를 찾았다.
웅성, 웅성···!
장이 열리기 5분 전.
아직 거래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신문을 손에 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흔히 뉴스에서 보았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실제로 보는 것과 전해서 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증권거래소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주식시장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주식시장이라는 거구나!"
"어떠니? 공부하던 것과 직접 보는 건 확실히 느낌이 다르지?"
2010년대의 주식시장은 인터넷, 혹은 스마트폰 하나로 주식을 사고 팔 수가 있었다.
허나 80년대의 주식시장은 달랐다.
주식시장의 모든 것은 수기로 돌아갔고 사람이 직접 장에 나와서 거래를 해야 했다.
사람과 사람이 거래를 하다 보니 당연히 실수도 많았다.
그에 따라서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증권맨들은 손해전용 계좌까지 만들어 돌리기도 했었다.
허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전부 수기로 돌아가던 것이 전자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인류가 발전하면 주식시장도 같이 발달한 것이라,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천우는 마샤의 차트와 주식의 차트가 일치하는지 확인해보았다.
3월 현재, 주식시장의 등락폭이 차트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호오, 좋군!'
아주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현보가 철강업에서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사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래도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주식시장의 생동감이 AI를 자극했다.
-AI마샤의 업데이트가 진행 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주가검색과 비교분석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세동향 및 투자호재 팝업 기능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투자호재 팝업? 그게 뭔데?'
-이를 테면···.
천우의 시야 사이로 주가차트와 호재정보 알림 메시지 창이 팝업 되어 올라왔다.
마시 3D시뮬레이션처럼 말이다.
'허어, 이런 기능도 사용할 수 있어?'
-나노머신은 뇌하수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주인님의 신체 전반에 걸친 모든 능력에 개입합니다. 각종 정보를 시야로 제공하거나 청각을 증폭시킬 수도 있죠. 주인님께서 자동 번역기능을 통해 남의 나라 말을 해석해서 들으실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좋은 기능인데! 개발자 역시 AI가 이렇게 쓰일 줄은 상상 못했겠지?'
-단순히 군사용도로 팝업 기능이나 홀로그램 기능을 만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몰랐겠지요.
마샤는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제 천우는 가만히 앉아서 차트를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의 홀로그램 차트는 지금부터 계속해서 주식이 상승곡선을 그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의 증권거래소 분위기는 그야말로 '과열직전'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2월 현재, 주식의 거래량은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천우는 의아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네. 국제수지가 이렇게 안 좋은데 왜 이렇게 거래량이 많지?'
-그건 홀로그램 차트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차트의 곡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그 시기에 있던 호재가 부연설명처럼 말 주머니 형태로 뻗어 나왔다.
지금은 여당의 주택대책에 대한 호재가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당장 며칠 후에는 올림픽 특수와 함께 각종 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었고 정부의 주식투자 육성유도정책이 곧 발표될 것이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상승세를 이어나간다고 되어 있었다.
'이거, 거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죠.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의 주식시장이 자칫 과열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지적했으니까요.
헌데 지금은 과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85년도부터는 주식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른바 '삼저호황'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85년도부터 삼저호황과 더불어 해외주식의 일부 구매허용정책, 국가기반산업 세금혜택 등이 맞물리면서 주식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지금은 그 물꼬가 점점 트이는 시기인 것이죠.
'국내주식의 구매도 좋은 투자수단이 되겠는데?'
단기투자로 돈을 벌기에 가장 시기가 바로 1년 후였다.
차트를 손에 쥐고 있는 천우로선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약간 멍해져있던 천우에게 오금자가 물었다.
"어떠니? 흥미가 좀 생기니?"
"네! 너무 좋아요!"
"특히나 어떤 점이 제일 좋아?"
"할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던 걸 눈으로 보니 제일 좋죠!"
"후후, 그래. 이론과 실제는 이렇게 다른 거야. 천우도 벌써 투자를 해봤지?"
"네!"
"작년에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2억을 가지고 말이지. 그걸 어디에 썼더라?"
"일본 부동산하고 미국의 곡물시장에 투자했어요."
"그래, 그랬지. 헌데 천우는 왜 두 가지 종목에 투자를 한 거야?"
"그건···."
그녀는 투자의 목적에 대해 물은 것이다.
아무리 감이 좋아도 직감 하나만으로 투자를 한다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할미가 너무 어려운 걸 물었나?"
"으음."
대답을 못할 것도 없었다.
그 이유가 너무나도 간단하지 않던가.
"호재 때문에요!"
"호재···? 일본의 부동산은 여전히 냉각기인데?"
"냉각기?"
"부동산의 투자대비 수익이 오히려 증권이나 금융수익보다 낮다는 뜻이야."
"아하! 그럼 지금이 투자하기엔 제일 좋은 시절 아닌가요?"
"어째서?"
"쌀 때 사서 비싸게 파는 건 장사의 기본이잖아요!"
오금자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너무나도 원초적인 답변이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그래, 그게 시작과 끝이지. 호재···."
오금자는 곧 곡물 값이 오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곡물시장을 뒤흔드는 '검은손'들 때문이었다.
때론 전 세계 무기시장을 틀어쥐고 흔드는 것보다 곡물시장을 틀어쥐고 흔드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러한 미국의 곡물시장을 틀어쥔 사람들이 있는데, 흔히 그들을 '곡물 마피아'라고 부른다.
곡물 마피아의 수법은 이러하다.
사람이 먹든 가축을 먹이든 곡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걸 직접 수출입하는 업자들은 정해져 있다.
이들 곡물 마피아는 수출입권을 손에 쥐고 곡물가격을 올리고 내리는 협상을 하러 돌아다닌다.
예전 70년대 곡물파동이 있었을 당시에도 곡물 마피아의 저력은 대단했다.
극심한 식량비축난이 일어나자마자 그들은 곳간을 걸어 잠가버렸다.
이건 국가가 개입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곡물배급을 국가에서 관장하는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이상에야 무역 권을 손에 쥔 사람들이 이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유래 없는 풍년이 들지 않는 한, 한 번 올라간 곡물가격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천우는 타고난 감각이 있어.'
올해는 그 검은손들의 개입이 유난히도 거셌다.
때문에 엘니뇨현상이라는 재료가 검은손들의 개입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낸 것이었다.
오금자는 그럴 리 없지만 혹시 천우가 곡물시장의 검은손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까지 해보았다.
'설마하니 곡물 마피아까지 감안한 건···.'
그럴 리는 없었다.
마샤도 곡물마피아의 존재만 알지 그들의 행동패턴까지는 파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가격변동 차트만 가지고 있었을 뿐, 악재까지 맞춘 건 아니었다.
아무튼 어떤 목적을 갖고 투자를 했건 간에 천우의 안목이 뛰어난 건 분명했다.
'···이 아이는 뭔가 특별해!'
그녀가 보기에 천우는 투자이론도 철저히 지키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단순히 시장분석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천우는 미래의 차트만 보고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오금자는 과연 천우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천우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진외증조할아버지처럼 위대한 투자가가 되고 싶어요!"
"투자가?"
"네! 나중에 위대한 투자가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주회사를 만드는 거예요!"
"지주회사?"
"단순히 주식을 사는 게 아니라 기업을 사는 거죠!"
천우는 자신만의 투자회사, 즉 투자전문가집단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당차게 피력했다.
오금자는 그런 천우의 포부를 높게 샀다.
"꿈이 참 원대하구나."
"헤헤, 그저 증조할아버지를 따라가는 것뿐인 것을요."
"하지만 그러자면 배울 게 참 많을 텐데? 지주회사를 만들자면 기업과 경영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거야."
"우리 할아버지는 한국 최고의 기업가잖아요! 꾸준히 배우고 있어요!"
오금자는 아주 중요한 걸 하나 깨달았다.
천우에게 필요한 건 돈이나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게 필요한 아이가 아니야.'
***
그날 오후.
비서실에서 회의 자료를 완비했다며 최호명에게 보고를 올려왔다.
"자료는 완벽합니다. 행사 30분 전에 출발할까요?"
최호명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은 행사시작 두 시간 전이었다.
그는 불현 듯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기습 폭설이라?'
최호명은 아무래도 아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걸어갑시다."
"···네?"
"여기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역에서 행사장까지 걸어가자고요."
"아니, 이사님. 회사에 차가 있는데 굳이 왜 지하철을···."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오늘은 눈이 온다네요."
"에이, 이사님! 농담도 참!"
"진짠데. 오늘은 좀 걷자고요. 기분전환도 좀 할 겸."
"···진심이세요?"
"갑시다."
실무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 실리만을 좇는 최호명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하철이 웬 말인가.
그것도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말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보스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회사라는 조직 아니겠는가.
철컹, 철컹···.
지하철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마침 지하철에 사람도 별로 없어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막상 팀원들도 지하철을 타니 새롭고 좋았다.
"원래 지하철이 이렇게 조용했나?"
"막간에 회의나 좀 할까요?"
"예, 이사님. 준비해 온 자료를 다시 한 번 점검하시지요."
다들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던가.
아마 그들이 엄청난 워커홀릭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막간에 일을 하니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교통체증이 없으니 스트레스도 없었다.
-이번 정류장은 금강 호텔 역입니다···.
지하철문이 열리자, 뭔가 약간 습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은 지하철로 내려오면서 연신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뭔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어라?"
"진짜 밖에 폭설이라도 내리는 모양인데요?"
일행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눈이 미친 듯이 내리고 있었다.
일동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어! 이사님, 정말 눈이 옵니다!"
"거의 10cm는 넘게 쌓인 것 같은데요?!"
30분 만에 눈이 10cm나 쌓였다는 것, 거의 재앙수준의 폭설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해는 밝았지만 유난히도 추웠던 아침, 그런 햇살에 눈이 녹았다 다시 얼면서 길거리가 죄다 빙판이 되어버렸다.
차들은 거북이걸음이었고 교통체증수준이 마치 설날 귀경길을 보는 듯 꽉꽉 막혀 있었다.
놀라는 건 최호명도 마찬가지.
"···진짜로 눈이 왔네."
차를 끌고 나왔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실무진들은 엄지를 척 들었다.
"대단하십니다! 이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말했잖아요. 아들이 알려줬다고."
"아드님께서 요즘 기상청으로 견학을 다니시나요? 아니면 나사에?"
"하하, 그러게요."
"천재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이사님, 차라리 이참에 그냥 외국으로 보내시지요. 그런 천재는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니, 그러고 보니까 천재라고 해서 날씨까지 맞출 수 있나?"
덕분에 위기일발이었다.
신묘한 일이었다. 이런 기록적 폭설을 예견하다니 말이다.
'단순한 천재가 아니다. 그 녀석, 진짜 뭔가 있어.'
세삼 아들이 다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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