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이른 아침.
약간 쌀쌀한 바람과 함께 햇살이 창을 통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천우는 한양 최 씨 일대기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햇살은 좋은데 바람이 좀 차네. 먼지도 좀 많은 것 같고."
그는 80년대의 대기 질이 2010년대보다 좋을 것이라 기대하고 문을 열었지만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사태가 심각했다.
지금은 미세먼지에 대한 기준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88년도쯤 차랑 2부제를 도입하고 목욕탕의 석탄규제 등을 도입함으로서 점차 대기오염 개선을 시작했던 것이다.
개발도상국가, 혹은 신흥공업국가의 경우 가장 심각하게 문제 되는 것이 바로 환경오염이었다.
2010년대 중국의 대기오염 상태를 생각해본다면 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문제였다.
유난히도 추운 아침, 천우는 한양 최 씨 일대기를 벌써 열 번째 반복해서 읽는 중이었다.
"도대체 금은보화를 어디에 묻어둔 것일까?"
금에 대한 단서를 얻고자 정독하기를 열 번.
허나 일대기 안의 내용에는 금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다만, 누가 금을 묻었는지, 얼마나 묻었는지에 대해서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40년대에 황금을 거의 톤 단위로 묻어두었다, 이거지?"
허태용은 전란 직전에 금은보화가 매장되었다고 했다.
그는 끈질기게 단서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때쯤 마샤가 유익한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AI마샤가 알려드립니다. 금일 대한민국 서울의 평균기온은 영하 16도 수준으로, 평년보다 많이 낮겠습니다. 이른 오후에는 기습 폭설이 내리겠으며 도로교통이 혼잡하여 차량운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상당히 맑은데?"
-통계에 따르자면 금일은 정오를 기점으로 날씨가 급변하여 1시쯤에는 함박눈이 내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넌 그걸 다 어떻게 알아? 지금은 인터넷도 없잖아."
-일기는 차트에 기록됩니다. 저는 그걸 바탕으로 예보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
바로 대자연이었다.
어떤 행동이건 간에 그것은 반드시 나비효과를 낳는다.
그건 천우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전생과는 다른 어떤 행동을 한다면 분명 나비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허나 아직 어린 천우의 작은 행동 하나 때문에 벌어지는 나비효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도 많았다.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의 대맥처럼 말이다.
"이봐, 마샤. 날씨는 나비효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잖아?"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레이거노믹스라든지 엔고효과 등도 절대 변하지 않는 건가?"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한 인간이나 단체가 전 세계의 시장흐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천우가 가진 지식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쓸모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대맥이 바뀌지 않는다면 외화를 환매해서 이익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장에 변화가 많이 없다면 환율차트는?"
-아마도 그것도 변하지 않겠지요.
"허어, 그럼 내가 환율등락을 아예 줄줄이 꿸 수 있다는 소리잖아?"
-물론입니다.
"그럼 주식은?"
-주식도 마찬가지지요.
"혹시 그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
-물론입니다. 어떤 분야든 차트가 만들어졌다면 제게 없을 리가 없습니다.
"···개이득인데 이거."
예를 들어서 달러화가 700원일 때 샀다가 710원에만 팔아도 이득이 된다.
외환딜러에게 들어가는 수수료가 대략 1% 남짓이니까 달러화를 700원에 샀다가 703원에 파는 셈이라도 이득이다.
헌데 지금은 환율이 수시로 등락을 거듭하는 시대다.
단적인 예로 엔화가 불과 2주일 만에 30%나 넘게 오른 적도 있었고 달러화는 일주일 만에 15% 넘는 등락을 보이기도 했다.
미래의 가상화폐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환율은 그만큼 미친 듯 널을 뛰었다.
잘만하면 떼돈 버는 건 시간문제라는 소리였다.
"좋아, 외화환매를 좀 해보자."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는 미국 곡물시장에 1억을 투자해두었다.
현재의 환율은 거의 700원 대에서 등락을 보이고 있으니 대략 14만 5천 달러정도 미국에 들어간 셈이었다.
선물옵션에 70%가 투자되어 있었는데 천우는 4월 20일경에 환매가 될 예정이었다.
만약 그때까지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대략 2~2.5배에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샤가 말했듯 날씨에는 변수가 없다.
전체적인 곡물시장의 판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했다.
엘니뇨현상으로 유례없는 흉작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설탕이나 청과 등은 폭락했다.
거의 25~30%에 가까운 낙차를 보였고 여전히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여 가격이 크게 떨어진 것이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디플레이션 속에서 옥수수와 밀, 쌀 등, 곡물부문에서 엄청난 급등이 있었다.
사상최초의 이상 현상 속에서도 곡물관련 상품펀드만 급성장 한 셈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발행된 신문과 미국에서 발행된 신문을 전부 구독하고 있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흐흐, 돈 좀 만지겠는데?"
-앞으로 2개월이나 남았지만 미리 축하드립니다.
"다 네 덕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외화환매는 아직 손을 대 본적도 없고 실전경험을 쌓을 기회도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마샤는 또 다시 한 번 성장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번엔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계획은 계획이고 천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내어 놓았다.
"뭐, 아무튼 간에 오늘은 눈이 온다 이거지?"
-네, 주인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릴 겁니다.
천우는 최호명이 출근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신발장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출근시간에 맞춰서 나온 최호명은 평소보다 한껏 멋을 낸 듯했다.
마치 선이라도 보러 나가는 노총각처럼 말이다.
"우와, 아빠! 오늘 출근 안 하세요?"
"이따가 오후에 주주총회가 있거든."
"주주총회? 주주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 말인가요?"
"응. 그 주주총회가 있어. 얼마 전 미국에 대한 투자현황을 주주서한으로 보냈는데, 아무래도 투자에 대한 불만을 가진 주주들이 꽤 많았나봐."
"그렇구나."
천우 입장에서는 정말 별 걱정을 다한다 싶었지만 돈을 투자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가 않은 법이다.
그들에게 '진짜 수지맞게 해드릴 테니 걱정 마쇼'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천우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최호명은 천우의 머리를 정성껏 쓰다듬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아들의 진심이 표정을 통해 다 드러나 있었기에 약간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간에 오늘도 유치원 잘 다녀오고 친구랑 잘 지내렴. 아빠는 간다."
최호명은 신발장 앞에 차키를 걸어두곤 했다.
그걸 챙겨서 나가려는 최호명,
천우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아빠, 차키 놓고 가세요."
"뭐? 아침부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오후에 눈이 올 거래요. 지하철을 타세요."
최호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놈아. 이렇게 날이 좋은데 무슨 눈이 온다고 그래? 일기예보에서도 오늘은 대체로 맑음이라고 했단 말이야."
"일기예보는 때론 믿을 것이 못되기도 하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아빠가 생각하기엔 이런 날씨에 눈이 오는 건 어림도 없는 일 같아. 그럼 이 아빠는 간다."
나비효과가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존재.
대자연의 섭리를 줄줄이 꿰고 있다고 해도 그걸 예측했다고 말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온다면 주주총회에 늦을 지도 모른다. 오늘은 투자에 대한 방향성을 설명하는 자리인데 그 장본인이 결석한다면 당연히 비난이 쏟아질 거야.'
현보그룹의 투자성공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현보 그룹의 행보는 내수시장을 포기하고 일본과 미국 등지로 나아갈 교두보를 준비하는 행위라 비난하기도 했다.
허나 현보 그룹은 내수시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최근 기울어지는 내수경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해외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최호명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해두었지만 주주의 성향이 100% 다 같을 수는 없다.
허나 총괄이사로서 그들을 설득하고 안정시키는 건 최호명의 의무이기도 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반드시 주주들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는 최호명의 자질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만약 최호명이 지각을 하거나 아예 도착할 수 없게 된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아버지가 평소처럼 행사를 준비하고 그 시각에 맞춰서 움직인다면 100% 행사에 참석할 수 없을 거야.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천우는 진심으로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아빠, 제 말을 한 번만 믿어보면 안 돼요?"
"응? 뭐가?"
"오늘 정말 눈이 올 거라니까요? 차라리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세요. 어차피 회사에서 주주총회장까지는 지하철로 30분이면 가잖아요. 하지만 폭설이 내리는 날에 차를 타고 이동하면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고요."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제발요! 저를 믿으세요!"
아들이 이렇게까지 때를 쓴 적이 있었던가.
갈등하는 최호명.
"아빠! 저를 믿어주세요!"
"···흐음. 그렇게도 불안하니?"
"네! 이러다간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판이라고요! 아빠가 걱정되어서 변비에 걸리면 어떻게 해요?"
"그놈 참."
결국 최호명은 지하철로 출근하기로 했다.
아들이 아빠를 이렇게 걱정한다는데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지 않던가.
최호명은 언제나처럼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오늘만 걸어가지 뭐. 아들, 고마워!"
"헤헤, 아빠 힘내세요! 파이팅!"
결국 그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걸어서 지하철까지 이동했다.
실로 오랜만에 걷는 느낌이었다.
아침공기를 맞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뭐, 기분전환이라고 생각하자."
하나 둘 샐러리맨들이 지하철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류가방을 들고 지하철에 오른 최호명은 생각에 잠겼다.
'천우가 오늘따라 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일까.'
아무리 어린 아이라곤 하지만 천우는 사리분별이 빠른 천재소년이었다.
그의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아들이 허투루 그런 소리를 했을 리 없다, 최호명은 그리 생각했다.
덜컹, 덜컹···.
그는 흔들리는 지하철을 따라서 좌우로 파도를 탔다.
'운전대를 놓으니 의외로 홀가분한데?'
365일 걸어 다닌다면 몰라도 이렇게 가끔 지하철을 타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최호명은 자리에 앉아서 주주총회에서 발표할 보고서를 검토했다.
'미래지향적 투자, 그것이 기업을 존속시키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될 거다. 그렇게 설득시켜야만 해.'
보고서에 이어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점검하고 멘트를 몇 번이고 고쳤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잘못된 부분을 연필로 표시하며 수정해나갔다.
그러자, 자료가 거의 낙서장이 되어버렸다.
집중력이 올라가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근시간이 도래해서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집중이 잘 되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집중이 잘 되지?'
그 이후로도 최호명은 꾸준히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잠시 후,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최호명은 자신이 왜 이렇게 집중력이 높아졌는지 알 것 같았다.
최호명도 분명 회사생활을 막 시작한 초년생 시절이 있었다.
그때 최호명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는데, 입사초반에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느꼈던 긴장감과 적막, 그것이 지금 최호명의 초심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 덕분에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다니···.'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좋았다.
허나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와 철길을 건널 때에도 하늘은 아주 청명하기만 했다.
그는 쓰게 웃었다.
결국 아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마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그는 잃어버렸던 초심을 되찾았으니 이득을 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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