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22화 (22/202)

11.

"미국의 상품시장이 흥할 것이라는 건 그렇다 쳐도 일본의 부동산이 뜰 것이라곤 어떻게 장담할 수 있냔 말이다."

"그거야···."

처음엔 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가 싶었다.

허나 천천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만약 상무부가 일본을 조금만 압박해줘도 엔화는 올라갈 거고 달러화는 상대적으로 내려갈 텐데···. 그리 된다면 부동산 시장이 흥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네?"

"···내 정신 좀 봐라. 내가 애를 데리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미안하다. 내가 요즘 좀 피곤해서 헛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이건 분명 최충의의 넋두리였다.

때론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곤 한다.

최충의도 회장으로서, 또한 가장으로서의 엄청난 무게를 견디느라 정신적으로 너무 고단한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진정한 우정에는 국경도 없다고 한다.

아직 우정을 거론하기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지만 그래도 천우는 최충의를 진심으로 대해주기로 마음먹었었다.

"CNN에서 그랬어요. 수지가 안 맞으면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한다고."

"돌파구라."

"미국은 왕이라고 그러셨잖아요. 곳간을 열라면 열고 봇짐을 풀라면 풀어야겠지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최충의가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제 곧 미국 상무부가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충의도 예상은 할 것이다. 다만 확신이 없을 뿐.

허나 이 확신을 갖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 그게 때론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곤 하지. 하지만 잘 풀릴 겁니다.'

천우는 최충의의 서재에 가방을 가지런히 놓은 후, 책상 위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건네주었다.

"선물이에요."

"선물? 무슨 두루마리 휴지를 선물로 준단 말이냐."

"헤헤, 앞으로 모든 일이 휴지처럼 잘 풀리라고요."

상당히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모습.

천우는 그런 그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최충의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허어, 그놈 참. 그냥 물건인 줄 알았더니 요물이었구나."

"헤헤, 칭찬이죠?"

"반반이다, 이놈아."

말을 맺은 후, 최충의는 책상 위에 서류를 펼쳐놓고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천우는 그런 그의 곁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최충의가 물었다.

"뭐하는 게냐?"

"구경이요."

"구경?"

"헤헤, 이것도 공부의 일환이에요."

"공부라. 경영 말이냐?"

"네!"

"오호라, 네놈이 경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로구나."

"헤헷, 그런 셈이죠."

"좋다, 옆에 와서 앉아라."

"와아, 신난다! 할아버지, 그럼 제 스승님이 되어주시는 건가요?"

"네가 배울 자세만 되어 있다면."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회장의 서류가방이 이렇게 무거운 이유.

천우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저 안에 기업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겠지!'

기업을 굴리는 노하우, 천우는 그것을 배울 기회를 거머쥔 것이었다.

***

12월 초순.

이제 막 83년도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현보 그룹 전략기획실 회의가 토요일 밤까지 계속되어 있는 중이다.

"···정말이야?"

"네, 실장님. 미국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내년 초엔 상무부에서 일본에 대한 푸시가 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고 그와 함께 유럽계 자본들이 자본시장 개방을 본격적으로 요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EC(유럽공동체)는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일본에게 현시점에서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대응책을 강요받고 있었는데, 가장 큰 대맥은 일본의 경제개방이었다.

"EC수뇌부에서 나온 첩보에 따르면 엔화의 국제와, 금리의 자유화, 금융상품의 탄력적 확대, 금융자본 시장의 확충, 대일직접투자의 제한환화 등이 거론될 것이랍니다."

"푸시가 대단한데?"

"그만큼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요."

이미 얼마 전에도 EC는 일본의 CD(양도성예금증서)발행단위의 인하, 은행 간 예금금리의 자유화 등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밖에도 무역적자축소를 위한 관세인하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고 일본은행의 외국은행에 대한 재할인한도를 대혹 확대하도록 압박했다.

허나 그럼에도 일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등장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년에 미국이 일본을 압박했을 때 구체적 조정안의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상무부는 기대하고 있답니다."

"···말이 압박이지 몇 번이고 얘기해서 말을 안 들으면 망치로 때리겠다는 얘기잖아."

"상대가 미국 아닙니까."

"흐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상품투자가 좋겠는데."

"상품이요?"

"최근 엘니뇨현상 때문에 흉작이 심하다더군.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값이 오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가격이 오를까요? EC의 개방 압력을 받고 있으니 차라리 금융에···."

"으음, 아니야."

국제수지가 점점 악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뭘까.

최호명은 그걸 3개월 동안이나 분석했었다.

그리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건 바로 과잉공급.

최근 3년 전부터 달러화가 계속 올라서 무역수지는 개판인데 물건은 남아도니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러던 도중에 아들의 엘니뇨 얘기를 들었다.

매우 흥미로운 얘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엘니뇨가 터진다고 곡물 값이 오를까?

공부를 너무 많이 한 사람은 지금의 상황에서 곡물 값이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최호명도 처음엔 그랬다.

허나 그는 아들의 천재성에 주목했고 곡물시장의 차트를 끈질기게 뒤졌다.

그러자, 답이 나왔다.

"곡물은 반드시 올라."

"예···? 어째서요?"

"가공식품은 모르겠는데 곡물은 올라. 엘니뇨가 터지면 곳간을 걸어 잠그는 놈들이 꼭 있거든."

"그건 그저 풍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풍문이 아니야. 곡물 값이 오를 때엔 반드시 전조증상이 있어. 70년대에는 오일쇼크가 있었고 지금은 달러화 폭주라는 악재가 있지."

"허어, 하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최호명은 달랐다.

그는 차트 안에서 일정의 법칙과 전조증상 등을 발견함으로서 곡물 시장의 '검은손'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해. 그곳에 투자하자고. 선물 쪽에도 돈 좀 걸어놔."

"···예?!"

"절대 실패할 리 없어. 나를 믿고 한 번 해보자고."

확고하지 않으면 절대 선물옵션에 돈을 걸 수는 없다.

최호명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국내 고철을 매집하던 세력을 뒤쫓던 매입전략팀에서 보고를 올렸다.

"전월에 지시하셨던 사안 말인데, 이제 윤곽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

"윤곽이 잡혀? 어떤 놈들인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부쪽과 줄이 닿는 것 같더라고요."

"정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비밀리에 고철을 매집하던 자원상사를 추적해봤더니 그 꼭대기에 '토스'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토스를 추적해보니까 회사등기는 있는데 실질적으로 본거지가 없습니다."

"페이퍼컴퍼니란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토스라는 이름 말고는 도대체 수소문이 안 됩니다."

"정체가 상당히 모호한데···. 자금의 출처도 불분명하고?"

"매입상인들에게 뒷돈을 줘봤는데도 그건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뭐야? 이것들."

"문제는 저놈들의 목적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만, 최근 들어 15% 웃돈을 주고 철을 거래하는 발길이 뚝 끊어졌답니다. 저번 주를 기점으로 일제히 매입가격을 낮추었다고 하더군요."

"물량의 완급조절에 들어간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제 슬슬 매입에 브레이크를 걸어볼까요?"

최호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계속 매입해. 가격은 시세에 맞추고 물량은 평년수준으로 유지하고."

"감산정책은 사용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건 일단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말이야. 일본 쪽에도 사람을 보냈었잖아. 그쪽에선 뭐 건진 거 없어?"

"아직까지 특별한 건 없습니다."

"흐음, 그래?"

"다만, 사무라이 본드를 다시 판매할 수도 있답니다."

"채권 말이야?"

"EC에서 하도 압박을 하니 당근으로 던져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채권은 금리가 낮을수록 수익률이 좋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저금리 시장인데다 화폐가치고 상당히 절하되어 있었다. 그러니 대량의 유럽자본이 들어 올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채권에 투자하게 줄 좀 서볼까요?"

"아니, 잠깐."

"······?"

"부동산 쪽에 사람을 좀 보내봐."

"예? 갑자기 부동산은 왜···."

최호명은 불현 듯 아들이 일본에 곳간을 짓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지금의 저금리가 엔화 절상 이후에도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최호명의 상상이 만들어낸 생각이었다.

허나 만약 그게 사실이 된다면 부동산시장은 엄청난 호황을 맞게 될 것이다.

그는 뭔가 영감이 머리를 슥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 번 자세히 조사해봐. 부동산과 더불어서 금융시장도 함께."

"예, 알겠습니다."

아까부터 다들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허나 최호명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역발상에 머리가 트이는 것 같았다.

***

1월 1일, 신정이 되었다.

올해로 천우는 일곱 살이 되었고 내년이면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될 것이다.

천우는 여전히 본가에서 수학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키도 많이 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샤도 함께 쑥쑥 자라났다.

불과 해가 한 번 지났을 뿐인데 성능 자체는 1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일주일에 두 번씩 본가에서 자고 시간이 남는 대로 찾아왔다.

지금부터는 본가에 머무는 시간이 천우에겐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조부모와 같이 식탁에 앉은 천우가 라디오를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85년 총선을 불과 1년 앞둔 가운데 여야의 민심잡기 공약상정에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취재기자를 연결해보겠습니다, 정상기 기자?

-네, 정상기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신대한당 정책위원회 앞에 나와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전해주시죠···.

아침을 먹는 가운데 최충의가 천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천우야."

"네, 할아버지!"

"정치얘기가 나오는데 지루하지 않으냐? 넌 경영이나 투자에 관심이 있잖아."

"조금 그렇긴 한데 뉴스는 언제나 재미있어요!"

"CNN 틀어주랴?"

"헤헤, 국내방송도 재미있어요!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경영에는 정치가 빠질 수가 없다고요!"

"음, 그래. 녀석,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구나."

"다 할아버지, 아니 사부님 덕분이죠!"

이젠 조부와도 꽤 많이 친해졌고 정도 꽤 쌓였다.

아마도 최충의와 보내는 퇴근 이후의 그 짧은 시간이 천우에게나 최충의에게나 많은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뉴스는 현 여당의 공약에 대해 설명했다.

-임대아파트를 1천호 건설하고 서민주택 20만호, 임대주택3만호 확대 공급하겠다고 신한국당 대변인은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 정책과 연계되는 좋은 공약이지만 현실적으로 20만호 건설은 좀 무리수라고 지적했습니다···.

81년부터 시작되었던 주택문제 해결방안이 85년을 기점으로 탄력을 받게 된다.

총선이라는 변수를 만난 것이다.

주택보급 관련 법안 상정 및 정책시행이 본격화 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시점, 84년도였다.

천우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오호, 계획대로 되고 있어.'

88년 완공을 목표로 여당의 대규모 아파트 건립계획이 공표되었다.

이는 보통의 신도시 한 개를 건설하는 규모가 아닌, 현보가 잘하면 철강특수를 맞이하게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그동안 각종 정치문제라는 암초에 걸려 신도시 건설이 좌절되었었다.

그러다가 84년 1월, 본격적으로 추진에 들어가 철강업계가 호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잘 버티셨으니 앞으로는 꽃길만 열리겠군.'

한결은 얼마 전까지 계속해서 평년수준의 고철매입을 고수하고 있었고 감산정책 역시 보류상태로 계류 중이었다.

그러다가 1월 1일부터 호재를 만난 것이었다.

한마디로 최호명의 필사즉생의 버티기가 빛을 본 셈이었다.

전생의 최호명은 여기서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지만 천우의 기재로 위기일발 하였으니, 그의 계획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충의는 밥을 먹다가 말고 천우를 흘깃 쳐다보았다.

"천우야."

"네, 할아버지!"

"집안에 좋은 일이 좀 생기겠구나."

"정말요?!"

이제 시작이다.

아주 작은 호재 하나일 뿐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싶었다.

'흐흐, 아직 곡물 값 호재는 터지지도 않았는데요?'

천우는 미국 곡물시장에 투자하면서 선물옵션에도 돈을 좀 걸어두었다.

과연 그것이 터지면 얼마나 오를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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