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천우의 새로운 출발지점.
"도련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사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알겠어요."
"그럼 개는···."
집사가 개를 만지려하자, 충식이 형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으르르릉···!"
"··직접 데리고 가시는 편이 낫겠네요."
어지간한 성인만한 덩치의 세인트버나드다.
아마 이 녀석들보다 더 든든한 보디가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천우는 충식이 형제에게 간식거리를 내어주었다.
"잘했어, 고마워 얘들아."
"촵촵···. 헥헥!"
새로운 환경에서 주인을 지키려니 아마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천우는 충식이 형제를 살살 달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천우는 최충의가 화려함을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화려함의 극치, 저택의 거실로 들어서니 천우의 친할머니인 오금자가 서 있었다.
이국적인 이목구비와 다소곳한 자태,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귀부인을 보는 것 같았다.
대외활동이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심지어 친손자인 천우에게도 정보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천우야, 할머니야. 기억나니?"
처음으로 들어보는 할머니의 음색이었다.
참으로 부드럽고 교양이 넘쳐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어떤 말을 해줘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게 잘···."
"그래, 이 할미가 자주 찾아갔어야했는데. 미안하구나."
"헤헤, 아니에요. 이젠 일주일에 한 번은 볼 수 있잖아요.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죠!"
"우리 아가는 마음씨도 곱구나."
그녀가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천우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평온한 시골마을 고향집에 온 느낌이랄까.
'뭘까, 이 느낌은.'
흔히 핏줄이 당긴다고들 한다.
오금자가 손자를 아끼는 마음이 마치 오라처럼 퍼져 천우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우의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오금자의 온기가 천우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올라가자꾸나. 네 아빠가 쓰던 방을 치워놓았어. 필요한 걸 사다놓긴 했는데 그게 마땅할지 모르겠네?"
"아빠가 쓰던 방이라니! 신기하네요!"
"네 아빠도 분명 어린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아빠는 너와 똑같은 모습이었단다."
두 조손은 손을 꼭 잡고 3층에 있는 10평 규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에는 '오늘 쉬면 내일은 달려야한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고 방 안쪽에는 사방이 온통 경제서적에 경영학 서적뿐이었다.
그 흔한 만화책 한 권이 없었고 전부 전공서적에 자기개발서적들 밖에는 없었다.
'지독한 공부벌레셨구나.'
사람들은 최호명을 타고난 인재라고들 말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노력형 인간이었다.
이런 산더미 같은 책들을 보고 있자니 천우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약간 퀴퀴한 총각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느낌이 나서 천우는 묘하게 기분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그건 충식이 형제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녀석들은 최호명이 쓰던 침대 위에 올라가더니 자리를 잡곤 턱을 궤고 누워버렸다.
"편한가 봐요."
"아마 주인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여러모로 묘한 방이었다.
올라와 짐을 풀고 나니 곧바로 배꼽시계가 신호를 보냈다.
꼬르르륵!
천우는 머쓱하게 웃었다.
"에고, 배가 고픈가봐요. 헤헤···."
"아참, 내 정신 좀 봐. 애를 데리고 와선 굶길 뻔했네. 우선 내려가자꾸나. 할머니가 특별히 고향 음식을 해놓았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전 아무거나 다 좋아요! 지금은 얼룩말이라도 통째로 씹어 먹을 판인걸요?"
"호호, 그래. 어서 가자꾸나."
뭔가 상당히 들떠 보였다.
오금자는 오랜만에 아이를 돌보니 잠시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외적인 활동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식을 상당히 소중히 여겼던 그녀는 이따금 소식이 뜸한 아들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바쁘다고 일찍 끊기 일쑤였다.
천우는 둘 사이에 뭔가 풀지 못한 응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자식 간의 연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으니 할머니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그녀는 신이 나서 식탁 위로 요리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헌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 종류가 15~16개쯤은 되는 것 같았다.
"우와, 이걸 다 혼자서 준비하신 거예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내가 양식 밖에는 할 줄 몰라서 말이야."
"헤헤, 저는 좋아요!"
할머니 댁에선 얼굴이 두 배로 불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천우는 그걸 여실히 공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양식을 만드는 실력이 대단했다.
"할머니는 서양요리를 전공하셨어요?"
"후후, 아니. 이 할미는 미국 재미교포란다. 어려서 네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이탈리아계 미국인 외증조할머니를 만나서 이 할미를 낳았거든."
"아아! 그럼 저도 1/10은 이탈리아 사람이겠네요?"
"그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그럼 원래 성함은 오 씨가 아니었나요?"
"미국식 이름은 줄리아나 카렐이야."
"아하! 그렇구나!"
어쩐지 약간 서구적으로 생겼다 싶었는데 혼혈이었던 모양이다.
두 아들의 이목구비가 유난히 또렷했던 건 아무래도 외가의 유전자가 섞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천우는 미국식 미트파이와 이탈리아식 화덕피자 등, 미국과 이탈리아의 퓨전요리들을 두루 맛 볼 수 있었다.
"우와, 맛있어요!"
"정말이니? 애들 입맛에 맞추는 건 오랜만이라서 걱정이 되었는데."
"헤헤, 좋아요!"
몸은 어린이지만 영혼은 어른이기에 천우는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을 좋아했다.
헌데 오금자의 손맛은 그런 입맛을 전부 뛰어넘을 정도로 신묘했다.
천우는 토마토소스가 주류인 음식에 수제 레모네이드를 곁들여 마시며 거의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식사를 했다.
그런 후, 요거트로 만든 푸딩에 수제 사탕으로 입가심을 했다.
"할머니 너무 맛있어요!"
"고맙구나. 이 할미도 네게 요리를 해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단다."
"헤헤, 감사해요."
그나저나 그녀는 그 먼 미국 땅에서 왜 한국까지 온 것일까.
게다가 딸을 이렇게 번듯하게 키워낸 걸 보면 진외증조부도 보통이 아닐 텐데, 천우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외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음? 내 아버지 말이니?"
"네! 엄청 멋있는 분일 것 같아서요."
오금자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멋있긴 했지. 한국에서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와 투자로 큰돈을 버셨으니 같은 동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단다."
"우와, 정말요?!"
"네 외증조할아버지의 회사가 미국에 있어. 지금은 뉴욕에서도 꽤나 유명한 회사가 되었지."
"대단해요!"
"그래, 대단하긴 했지. 하지만 너무 일만 하셔서 일찍 돌아가셨어."
"···아아!"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니 약간 먹먹해지는 듯했다.
허나 이내 화제를 돌려버렸다.
"시간이 된다면 할미와 미국으로 가보자꾸나. 내가 어려서부터 처녀시절까지 살던 집이 아직도 있거든."
"우와, 좋아요! 이탈리아, 이탈리아도 가보고 싶어요!"
"호호, 그래. 그러자꾸나."
식사를 마친 후에는 집사들이 사온 천우의 물건을 본격적으로 풀고 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금자와 집사들이 함께 짐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엔 천우가 아버지 방을 구경하러 다녔다.
방에는 대부분 경제학과 경영학에 대한 책만 가득했기에 오금자의 말처럼 아이가 읽기엔 썩 좋지가 않았다.
허나 천우는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 관련서적이 있으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오옷! 전에 내가 읽었던 교양서적인데?'
시대가 지나도 읽히는 책은 있다.
비록 전공서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과거 미국의 사업가들에 대한 일대기를 모아놓은 꽤 유명한 책이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일대기의 주인공들과 그 약력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크흐, 오랜만이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서적이었다.
천우는 책을 펼쳐 주인공들의 약력이 적힌 부분을 펼쳤다.
투욱.
헌데 그 안에서 사진이 한 장 발견되었다.
사진 속에는 아주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과 중년의 여인, 그리고 그 아래 10살 남짓한 소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키가 180cm쯤 될 법한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의 여인은 지금의 오금자와 상당히 비슷해서 그저 얼굴만 봐도 이것이 그녀의 가족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할머니의 가족사진···."
"가족사진? 아하, 네 아빠와 진외증조부, 조모님과 찍은 사진인 것 같아."
천우는 사진을 보니 최호명이 외탁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오금자와 닮은 구석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외조부와는 거의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정도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렇게 보니 진외증조부의 얼굴이 상당히 낯에 익었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체스터 카렐,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가치투자자의 대표적 인물,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을 가치투자의 증권분석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라고 인물사전에 나와 있네요.
'에엥?! 에이, 아니겠지. 뭔가 잘못 본 거 아니야?'
-기계는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이상이 있지 않는 이상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뭐야, 그렇다면 할머니가 체스터 카렐의 딸이란 말이잖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가 했더니 천우의 진외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안이었다.
무려 현대적 투자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체스터 카렐이다.
지금의 월스트리트를 만들었다고 칭송받을 만큼 엄청난 업적과 재산을 남긴 체스터 카렐이 진외증조부였다는 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할머니 진외증조부님이 경제인물사전에 나오시는데요!···?"
"그래, 아마 그랬던 것 같구나. 체스터 카렐, 네 진외증조부의 성함이란다. 한국식 이름으로는 오송익이라는 함자를 썼단다."
놀라움을 넘어서는 경외, 세상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천우는 그녀가 굳이 대외적 활동을 고사해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의 명성과 남편의 사업, 이 두 가지에 자신이 엮이면 흠집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오와, 대단해요! 저는 그럼 위인의 자손이에요?!"
"후후, 위인까진 아니고. 아무튼 네가 자랑스러워하니 이 할미도 기분이 좋구나."
"책에 보니까 위대한 투자전문가라고 했어요. 그럼 할머니도 투자를 하실 줄 아세요?"
"음. 뭐랄까, 반쪽짜리 투자가라고나 할까? 할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주식시장에서 살았단다. 하지만 실전감각만 익히다보니 사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약간 떨어지는 면이 있단다."
"아아···!"
"아참, 아기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미안, 할미의 한국어가 완벽한 게 아니라서."
"아니에요! 책에서 그 정도는 알려주니까요!"
"후후, 그래.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천우는 그녀를 최대한 배려해주기로 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영어로 말했다.
"할머니, 불편하시면 제 앞에서만큼은 영어로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아참, 네가 영어를 잘 한다고 했던가?"
"혹시 그것도 불편하시다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셔도 괜찮고요."
"이탈리아어도 할 줄 알아?"
"약간요. 헤헤, 하지만 어지간한 말은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모든 언어가 자동번역 되는 천우에게 한계란 없었다.
오금자는 크게 놀라면서도 그를 대견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역시, 뛰어나긴 하구나. 하지만 얘야, 한국에선 한국어를 써야해."
"하지만 언어라는 건 안 쓰면 잊어버리는 거잖아요. 책에선 그걸 퇴화라고 했어요."
사실, 천우는 듣는 귀가 활짝 열렸지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해서 말하다보니 약간의 의역이나 오역이 있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민은 사용하지 않는 어휘나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오금자는 방금 전의 말에서도 원어민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몇 개 잡아냈다.
"으음, 좋아. 그럼 할미와 아침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점심에는 한국어를 쓰자꾸나."
"헤헤, 신난다! 저는 외국어가 좋아요!"
"앞으로 이 할미가 되는 대로 알려주마. 단, 한국어도 제대로 배워야해. 알겠지?"
"네!"
바로 그때였다.
마샤의 AI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던 외국어번역 기능에 생활패턴과 원어민의 관습 등을 추가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AI들은 한 차례 더 진화했다.
-AI마샤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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