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미국에서 쌀을 사다가 일본에 창고를 지어서 쌓아놓는 거예요!"
"뭐? 어째서 한국이 아니고 일본이야?"
"투자는 부동산에도 하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잖아요."
"그, 그랬지."
"한국 땅도 좋지만 기왕이면 외국에 창고를 세우고 싶어요! 멋있잖아요!"
최호명은 멍해졌다.
그동안 엔화절상과 고금리로 인해 부동산시장이 다소 위축되었던 것 때문에 투자를 등한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먹혔나? 제대로 힌트를 받으셨어야 할 텐데.'
멍해진 건 최충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략 5분 간의 정막이 흘렀다.
천우는 두 사람이 입을 열 때까지 그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윽고 최충의가 아무런 말 없이 인터폰을 눌렀다.
"잠깐 들어와."
-예, 회장님.
수행비서 남혁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당장 천우 명의로 주식거래계좌 하나 트고 현금 1억 정도 넣어놔. 그리고 일반계좌 하나 터서 거기에도 1억쯤 넣어두고."
"예, 알겠습니다."
무슨 꼬맹이한테 2억씩이나 주나 싶었지만 최충의는 뇌물로 수 십, 수 백 억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업에 전 재산을 올인할 정도로 호탕한 면이 있는 그에게 손자의 종자돈 2억쯤이야 별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천우만 바라보던 최충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서 밥 먹어야지. 엄마가 기다리겠다."
"···조금 더 놀고 싶은데."
"회사가 그리도 좋냐?"
"네! 너무 재미있어요!"
"이제 네 마음대로 드나들거라. 이 회장이 허락하마."
"와아, 신난다!"
최충의는 비서들에게 천우를 데리고 먼저 나가라고 지시했다.
***
최충의 부자의 어색한 독대가 5분 이상 이어지고 있었다.
허나 두 사람은 연거푸 차만 마실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최충의였다.
"네, 아들 말이다."
"예···?"
"본가로 보내라. 아무래도 내가 맡아 키우는 것이 좋겠어."
최호명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멀쩡한 아들을 보내라니요."
"저대로 두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야. 나에게 보내라."
최호명은 그 즉시 자리를 박치고 일어섰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으시면 전 이만 물러갑니다."
"아직 안 끝났다. 일단 좀 앉아."
"됐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독대에서 나온 말이 고작 손자를 빼앗아 가겠다는 소리라니.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앉아. 누가 네 아들을 빼앗아 간다고 난리냐.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일단 좀 앉아."
최호명이 아버지라면 최충의는 할아버지다.
내리사랑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그동안 그가 천우를 묘하게 시험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최호명은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최충의는 설명 대신 질문부터 던져 놓았다.
"내게 숨기는 것이 있지 않느냐?"
"숨기는 것이라니요?"
"바른대로 말한다면 최소한 쳐내지는 않겠다."
순간, 최호명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뭔가 있었다.
아들을 데리고 오라던 아까 그 말, 최호명은 그것이 단순히 아버지의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비밀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계열분리 말씀이십니까?"
짜악!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따귀가 번쩍 날아들었다.
얼마 전부터 최호명은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길을 걷겠다면서 슬슬 계열분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계획은 꽤나 치밀하고 섬세하였으며 아주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다.
허나 최충의는 최호명보다 한 박자 빠른 사람이었다.
분노로 가득 찬 최충의의 눈동자가 최호명을 향했다.
"이런 멍청한 놈아! 네가 아무리 현보 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한다고 설쳐도 어차피 조의창 집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았느냐!"
"······."
"운이 좋아 내가 먼저 발견해서 일이 무마되었지, 만약 조의창이 먼저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느냐?!"
"죄송합니다···."
"이기주의도 정도가 있지, 넌 가문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게냐?!"
한결 철강은 최호명이 인수하고 최호명이 키운 그의 인생역작이라 할 만했다.
그런 한결이기에 이사회와 주주들이 최호명의 편이었고 막판 주주총회까지 간다면 계열분리가 이뤄지기엔 충분한 환경이었다.
허나 문제는 지주회사의 회장이 그 사실을 먼저 알았다는 점이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3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었던 건 과연 네가 얼마나 작품을 잘 만드는지 보고 싶어서였지."
"해서, 마음에 드십니까?"
최충의는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따악!
잘못하면 잔이 깨질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손이 다 데였겠지만, 그만큼 최충의의 심사가 뒤틀려 있다는 소리였다.
최호명은 이제 자신의 운명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대변하는 최충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저 두 것들이 왜 세무조사를 가지고 난리를 피웠겠냐? 얼마나 설레발을 치고 다녔으면 저쪽에서 이미 냄새를 맡았을까!"
"···죄송합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을 것이다. 조의창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끄응···."
"모자란 놈! 지금이라도 사태를 수습해서 조의창이 맡은 냄새는 그냥 똥냄새라고 알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모두 다 살아."
이를 테면 아들의 반란.
허나 만약 최호명이 계열분리에 성공했더라면 최충의는 그걸 그냥 눈감아주려고 했었다.
최충의는 최희명에게 지분이 넘어가면 조 씨 일가의 현보가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우호지분을 꽤 많이 나누어 준 것이고 범 현보가문의 조력이 없이는 절대 회장이 될 수 없도록 손을 써 둔 것이었다.
한결의 계열분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조 씨 천하를 막아보려는 최호명의 의지가 지금 이렇게 표명된 것이었다.
허나 그것도 집권여당에서 칼을 뽑아들면 그 즉시 썰려버릴 방패막이였다.
게다가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총선이 코앞이다. 안 그래도 우리가 갖다 바쳐야 할 돈이 산더미인데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죄송합니다."
"수단을 바꿔. 아무래도 단순한 계열분리로는 안 되겠어."
"···네?"
"가는귀를 먹었냐? 차선책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잖느냐. 그나마 천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놈은 틀림이 없는 장손이니 우리 집안의 가산을 받아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다."
최호명은 최소한 검찰청에 끌려가 조리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호명이 차선책을 찾아보자고 하니 뭔가 좀 이상했다.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슨 말이냐 그게."
"저는 반역자입니다. 아버지의 지론대로라면 죽어 마땅합니다만."
반역도에게 반역의 차선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하는 왕이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허나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어차피 세상 떠날 판에 굳이 장남을 족쳐서 남는 게 뭐가 있겠느냐."
"죽는다니요?"
최충의는 아들의 앞에 암 진단서를 꺼내놓았다.
폐에서 자라난 암세포가 온몸 천지 전이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최호명으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기 싫은 일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이제 곧 내가 죽는다는 사망통지서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 하직할 사람이 이렇게 정정할 수 있습니까?! 뭔가 오진이 있었겠죠!"
"겉이야 멀쩡하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장이라는 걸 해봤다. 안색만 조금 바뀌어도 사람이 달라 보이더군."
"···그럼 지금까지 와병 중에도 회사에 나와서 계셨던 겁니까?"
"내가 이대로 죽으면 너는 어쩌라고."
"······."
"왜, 내가 이렇게 말하니 조금은 찔리냐?"
"···찔리긴 누가 찔린다고 그러십니까."
"양심도 없는 놈 같으니."
최호명은 가슴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까 맞은 따귀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뒤에서 반역을 획책할 때에 아버지는 나를 위한 미래를 생각하고 계셨구나···.'
최호명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있었다간 눈물이 주룩 흐를 것 같았던 것이다.
최충의도 그런 아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놈, 호명아, 네가 무슨 죄인이냐? 고개 들어. 그럼 이 아비가 천년만년 살 줄 알았더냐?"
"그래도 이건 좀···."
"네 엄마가 걱정이 많다. 앞으로 좀 잘해."
"···갑자기 어머니 얘기가 왜 나옵니까."
"이 아비가 죽으면 혈육이라곤 얼마 있지도 않은데, 이제 그만 네 엄마와의 관계만이라도 회복해라. 그게 너와 네 아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니겠냐."
최호명의 외가는 미국 최고의 투자가 집안이다.
가문비사가 엮여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외가만큼 최호명에게 힘이 될 곳도 없었다.
"그럼 제가 본가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건 안 된다. 조의창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손자의 수학을 할아비가 맡는 건 예로부터 꽤나 흔한 일 아니더냐. 천재 손자를 직접 키운다, 구색이 얼마나 잘 맞는 일이냐?"
이제는 아버지에게 효도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여생이라도 함께 보내고 싶었으나 최호명이 본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아버지의 주장.
그렇다면 최호명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
주말 저녁.
천우는 최호명의 차를 타고 본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빠, 정말 주말에는 본가에 가야해요?"
"왜? 싫으니?"
"뭐, 그건 아니지만."
최호명 부부는 최충의 회장의 제안을 절충해서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과 일요일에 본가로 천우를 보내기로 했다.
물론 한희연의 입장에선 아들을 본가에 보내는 것이 썩 마뜩치는 않았다.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어머니도 겨우 여섯 살 아들을 보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우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3년쯤은 꾹 참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한희연은 천우의 손을 꼭 잡았다.
"천우야, 가서 조부모님 말씀 잘 듣고 집사님 말에 잘 따라야해. 알겠지?"
"네, 알겠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곧바로 엄마한테 전화하고."
"알았어요. 바로 전화할게요."
"···그래, 착하지 우리 아가."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천우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허나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주말에만 가는 것이니 오히려 한희연에게도 재충전의 시간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우는 일부러 두근거리는 척을 했다.
"헤헤, 본가에는 책이 많아요! 천우는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매일 책을 읽을 거예요."
"···책이 좋아?"
"네!"
"걱정하지 마세요! 척척박사가 되어서 돌아올 테니까!"
천우의 곁에는 세인트버나드 형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희연은 천우를 혼자 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해서 이렇게 충식이 형제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천우가 나간 통에 개들까지 없으면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이 천우를 철통같이 지켜줄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충식이 형제는 똥오줌 다 가라니까 방에서 키워도 될 거야. 할머니도 허락하셨고."
"으음, 하지만 얘네들이 답답해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혼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잠시 후, 드디어 연남동 저택에 도착했다.
집 앞에는 벌써부터 집사들 두 명과 가사도우미 두 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그래요, 잘 지냈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저희들이 직접 작은 도련님을 모시러 갈 테니 굳이 고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천우는 충식이 형제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컹컹!"
"쉿, 조용히 해야지."
낯선 사람을 보고 짖어대는 충식이 형제에게 천우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녀석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허나 여전히 천우의 곁에 딱 붙어서 보디가드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한희연은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는 듯, 웃었다.
"···그래도 영 혼자는 아닌가봐."
"천우를 믿어. 당신 아들이잖아."
이제 드디어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천우와 한희연은 서로 포옹하고 입 맞추며 이별을 고했다.
그런 후, 최호명은 아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이제 덩그러니 남은 천우.
'흐음, 생각지도 못한 전개인데 이건.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유산이 아예 없는 상태와 한 푼이라도 있는 상태는 시작점이 아예 다른 법이다.
천우가 하기에 따라서 그는 아예 남들과는 다른 출발선에 설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앞으로 어른이 되었을 때에 그를 받쳐 줄 기반을 지금 만들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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