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8화 (18/202)

9.

"그래, 어디 한 번 보자."

그는 기획안을 받아들곤 서랍에서 돋보기안경을 찾아서 썼다.

그리곤 기획안을 읽기 전에 천우에게 손짓했다.

"저기 작은 의자가 있을 거다. 그걸 가지고 와서 내 옆에 앉아라."

"네, 할아버지!"

손자를 옆구리에 끼고 기획안을 해설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그는 천우에게 의외의 명령을 내렸다.

"네가 한 번 읽어 보거라."

순간, 최호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제 여섯 살입니다. 무슨 기획안을···."

"잠자코 있어라. 네 아들을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그리고 네 속으로 낳았다지만 너를 내 속으로 낳았으니 이놈도 내 핏줄이다."

"끄응."

최호명 역시 천우를 대하는 최충의의 태도에서 뭔가 위화감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허나 천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최충의에게 인정만 받는다면 아버지를 서포터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략기획 총괄보고서! 달러화 과열 및 수지악화에 대한 정책을 구상, 위와 같이 정리합니다!"

"옳지."

"제 1 안, 현보 전자 생산 공장 네 곳의 생산라인을 추가로 동결시키고 총 생산량의 10%수준을 감산한다."

최충의 회장은 천우에게 위 문장의 의미를 물었다.

"감산이 뭔지 알고 있느냐?"

"네, 할아버지! 생산량을 줄인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한 번 읽어 보거라."

"네! 위 정책은 일본에서 들여오는 전자제품의 중요부품에 대한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내리는 결정으로서, 차후 미국의 달러화 인하정책이 실시된다면 그때 충분히 생산량의 증대를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당연한 전략이었다.

무역에 사용되는 기준 화폐는 달러다. 그런데 그게 올라버리니 제작단가가 높아져 결국 수지가 더욱 악화 된 것이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는 소리로군."

"그게 뭔데요?"

"때론 눈앞의 이득보다는 나중에 얻을 더 큰 이득을 위해서 한 발자국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아하! 그럼 결국 좋은 정책인 거네요?"

"흐음,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그건 커피를 파는 원리와 같다고 생각해요."

"커피?"

"저는 커피를 팔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커피가 안 팔리면 그걸 엄마가 다 먹곤 하죠. 그래서 엄마 말로는 뱃살이 조금 늘었데요."

"흐음, 그런 일이 있었어?"

"네! 그래서 장사가 안 될 것 같으면 커피를 조금 더 덜 만들어요. 그러면 엄마 뱃살이 늘 일이 전혀 없잖아요. 그리고 재료도 그만큼 덜 쓰게 되고요."

"장사가 안 될 때엔 차라리 장사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

"네!"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게 했지만 현실에서는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과연 최충의에게 충분히 어필이 되었을까?

최충의 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두 번째 기획은 유럽시장에 대한 집중투자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철강 및 전자회사의 떨어진 매출을 투자로 메우겠다는 것인데, 과연 최충의 회장의 생각은 어떠할지, 최호명은 사뭇 긴장이 되었다.

최충의는 천우에게 장사의 기본에 대해 물었다.

"방금 기획을 커피 장사에 비유했었지?"

"네!"

"그렇다면 다시 커피에 빗대서 묻자. 커피장사가 안 된다고 커피 대신 다른 걸 팔겠다면 과연 그건 옳은 장사일까?"

"아니요!"

"호오, 왜 그렇지?"

"할아버지, 제가 장사하는 골목에는 커피자판기가 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잘못하면 자판기에게 손님을 다 빼앗길 수도 있겠죠. 그쪽은 저보다 훨씬 좋은 기계를 가지고 장사를 하잖아요."

"시장지분을 빼앗기는 셈이네?"

"아아! 그런 건가요?"

천우는 뭔가 크게 깨달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였고 최충의 회장은 그게 참으로 재미있는 듯했다.

"아무튼 그래서?"

"아무튼,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다른 차를 팔지 않겠어요. 차라리 자판기 아저씨와 협상을 하고 말죠."

"협상?"

"제가 한 발자국 물러나서 장사하는 구역과 시간을 줄여주는 대신 커피자판기에 지분을 넣어달라고 하는 거죠."

순간, 최호명과 최충의 두 사람 모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이 놀란 건 천우의 수완이 여섯 살짜리 치곤 꽤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우가 아무리 천재라도 설마하니 적과 손잡고 차라리 그 사람과 지분을 나눠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우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엘니뇨현상으로 인해 곡물가격이 뛸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몇 번인가 최호명에게 그 정보를 흘려주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호명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현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자전략수정 및 사업의 다각화 밖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산과 함께 유럽시장을 공략하려는 것이었다.

'힌트가 빗나갔어. 젠장,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미국의 곡물생산량이 4%이상 감소했습니다. 이는 곡물가격이 조만간 폭등할 것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국의 곡물 쪽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럼 유럽은?'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기약한 3년 안에 아버님의 공약이 지켜지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의 겉보기야 런던 금융시장이 불황이라 달러화 폭주만 막으면 충분히 단기투자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86년도는 되어야 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젠장···.'

다 좋은데 최호명이 회사에서 무일푼으로 쫓겨날 3년 안에 교통정리가 안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천우의 속이 타 들어갔다.

제 아무리 최충의라곤 해도 미래의 일까지 알 수는 없었기에 그 부분을 지적해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금 더 좋은 아이디어를 짜냈어야해. 이대로는···.'

-일을 그르친다고 해도 주인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끄응.'

천우의의 예상대로 최충의는 기획안을 덮어버렸다.

슥슥슥!

그리곤 곧바로 꽤나 호탕하게 기획안에 날인하였다.

진심으로 개탄한 천우였다.

'아아, 결국···!'

이번에는 천우의 생각과는 반대로 일이 흘러가버렸다.

"됐다. 이정도면 기획이 꽤 괜찮은 것 같다."

"예, 회장님. 그럼 이대로 진행하도록···."

"헌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최호명과 천우, 두 부자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우는 행여나 이대로 기획안이 뒤집힐 수도 있겠다 싶어 약간의 기대감을 가져보았다.

최충의는 기획안을 뒤집어서 마지막장에 나와 있는 구절을 손으로 집었다.

"다 좋은데 투자 금을 출자를 하는 쪽이 한결이더군."

"예, 그렇습니다. 한결을 도생시키는 건 다시 말해서 그룹 내 총매출을 회복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에 대한 자금은?"

"저번에 지시하셨던 범 현보가의 내부거래에서 건진 자금 50%를 투자하면 됩니다."

범 현보일가가 존립하는 이유가 내부거래에 있는 만큼 그곳에서 나오는 이익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다만 그 자금을 빼돌려 한결을 되살린다는 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흐음, 결국은 돌려막기라는 소리 아니냐."

"3년 안에 도생시키겠다던 장담, 허투루 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겁니다."

천우는 이쯤에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부거래로 만들어진 이익을 최호명의 자리보전에 사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허무하게도 최충의는 내부거래자금을 한결로 집중시켜 유럽시장에 투자하는 것을 용인해주었다.

"그래, 좋다. 한 번 해봐라."

'으음···? 갑자기 왜 저렇게 부드러워졌지?'

이제는 천우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일이 급진전되었다.

최호명은 회장의 앞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최충의는 대답 대신 천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적의는 없지만 조부의 정이랄 것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 천우였다.

오히려 그건 보스가 부하를 다루는 느낌과 비슷했다.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의 최충의가 천우에게 말했다.

"천우야, 이 할아비가 오늘 네 덕에 아주 머리가 맑아진 것 같구나."

"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뭐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갖고 싶은 것이요?"

"네가 갖고 싶은 것이라면 뭐든지 하나는 주도록 하마."

"헤헤, 정말요?"

"물론이지."

너무나도 의외였다.

최충의는 손자나 손녀들에게 단 한 번도 사사로이 뭘 줘본 적이 없었다.

그건 최충의가 자손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는 스스로 뭘 쟁취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교육방침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천우가 이례적인 선물을 받는 건 가문을 통틀어 처음인 셈이었다.

'이 노인네가 갑자기 왜 이래? 흐음,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이 방을 나가기 전에 실수를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천우는 최대한 투자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고자 했다.

"갖고 싶은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건 있어요!"

"그게 뭐냐?"

"투자요!"

"투자? 주식이나 부동산 말이냐?"

"네! 저도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투자를 해보고 싶어요! 단순히 할아버지 선물이나 아빠 선물로 사는 주식 같은 거 말고 제가 가지고 있을 주식이요."

정말이지 또래 아이들로선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이 나와 버렸다.

설마하니 투자라는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기에 최충의는 그만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으허허허! 이놈이 진짜 물건이긴 하구나! 너, 투자가 뭔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지?"

"회사가 케이크 열 조각이라고 친다면 그 열 조각 중에 몇 개를 사서 지분을 갖는 거죠."

아주 간단한 논리였지만 제법 정확한 설명이었다.

최충의는 천우의 선택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허허허! 그래, 그래! 오냐, 투자를 하고 싶다면 해봐라! 이 할아비가 아주 성심 성의껏 밀어주마!"

"와아, 감사합니다!"

"이놈, 아주 물건인데?"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 그중에 최고는 욕심이라고 생각하는 최충의였다.

만약 그가 욕심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의 현보는 아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우의 작전이 절반쯤 먹혀든 셈이었다.

"헤헤, 감사해요! 그런데 할아버지, 투자는 꼭 한국에있는 주식에만 해야해요?"

최충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해외에 투자하고 싶은 거야?"

"네! 해외의 옥수수나 쌀 같은 것에 투자하고 싶어요! CNN을 보니까 요즘 엘니뇨현상 때문에 미국이 온통 흉년이래요."

순간, 최충의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이런 표정은 어지간해선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천우의 충격요법이 잘 통했다는 뜻이었고, 잘하면 다시 기회가 올 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엘니뇨가 뭐냐고 유치원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온난화현상이래요. 지구가 따뜻해져서 농사가 망한 거라는데, 잘 이해가 안 돼요. 하지만 농사가 망했으면 쌀값이 오를 거잖아요?"

"그래,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쌀값이 별로 안 올랐는데? 오히려 농작물의 가격은 내려갔어."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쌀 때 샀다가 올랐을 때 팔면 이득 아닌가요? 책에 보니까 투자라는 건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거래요. 쌀을 사서 창고에 넣어놨다가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요?!"

지극히 원초적인 발상이었다.

허나 최충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건 최호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발상이 없다면 이건 절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 고달러 시대에 누가 미국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도 한참 디플레이션 시대에 농작물 따위에 말이다.

허나 그 역발상이 머리를 약간 자극하기만 해도 답은 나오기 마련이다.

"허어! 그런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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