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다.
만약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인정하기 힘들겠으나, 천우는 자신의 실력을 일가친척이 다 모인 가운데 아주 시원하게 꺼내놓은 셈이었다.
그가 최충의 회장의 생일을 노린 건 바로 이런 파급효과 때문이었다.
"천재라더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군."
"이거 참, 우리 집안에 이런 괴물이 다 나오나?"
다들 천우가 천재라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천우가 보여줄 것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그는 저 노인들의 취향을 저격시킬 콘텐츠를 계속 꺼내들었다.
"할아버지, 질문이 있어요!"
"질문?"
"어째서 달러화가 비싸지면 사업하기가 힘들어지는 건가요? 얼마 전에 신문에서 읽었는데 아직 혼자서 그걸 알아내는 것이 쉽지 않아서요."
최충의는 너무나도 의외의 질문에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걸 어린아이에게 당연하게 설명하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최충의의 표정이 일순간 살짝 일그러졌다가 이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내부에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기분을 상하게 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한희연이 그걸 캐치하곤 천우를 말렸다.
"천우야, 할아버지께 그 무슨 결례니?"
"아니다. 결례는 무슨. 손자가 할아비에게 질문하는 것이 결례더냐."
웃음도 아니고 격노도 아니고 그 중간의 아주 애매한 표정이었다.
만약 호탕하게 웃었다거나 호통을 쳤다면 조금 덜 이상했겠지만 이런 애매한 표정에서 천우는 이 노인이 자신을 시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설마하니 이 노친네가 나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저 노인의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천우에게 손짓했다.
"우선 할아비 옆으로 와서 앉아라."
"네!"
그런데 천우는 당장 의자에 앉지 않고 술병을 들곤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도대체 무슨 속내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주변의 분위기부터 띄우겠다는 심산이었다.
"한 잔 따라드릴게요!"
"흐음···?"
"질문을 하는 값이에요."
순간, 최충의와 천우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그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 속에 가려진 진심, 천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허나 그게 무엇이든 간에 분위기는 상당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 한 잔 따라봐라. 살다보니 내가 손주에게 잔을 다 얻어 보는구나."
"헤헤, 그럼 건배할까요?
"어린놈이 벌써 건배를 할 줄 알아?"
"어른들은 술잔을 받으면 건배하잖아요. 비록 제가 어른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어른이시니까 그만큼 대접을 해야죠. 책에 그렇게 나와 있었어요."
"재미있는 녀석인데."
종친들도 천우의 능청스러움에 어느 새 녹아들고 말았다.
아무리 막장 주주총회 방불케 하는 생일잔치라곤 하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형제들이니 이런 능청에 웃음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놈 참, 진짜 뭘 아는구먼."
"건배하세!"
각각 술이 한 잔씩 돌아간 후, 천우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최충의가 설명을 시작했다.
"달러가 비싸지면 왜 사업하기 힘드냐···. 그건 조금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아주 간단한 원리에서 그리 되는 것이란다."
"간단한 원리요?"
"미국이 세계의 자본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
"지배! 그럼 미국이 지구의 왕인가요?"
"왕?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어쩌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왕인지도 몰라."
왕이라는 말에 종친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왕이라는 말이 맞지. 미국이 자본주의국가들을 쥐고 흔들면 그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저놈이 아주 비유도 찰지게 잘하는구나."
이들은 사업가다. 술자리에 모여서 하는 얘기가 뻔하고 그 공감대를 형성해준다면 천우는 예쁨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종친들은 천우에게 급 관심을 보였다.
천우가 그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미국이 달러화를 싸지게 만들면 어떻게 되요?"
"싸지게 만든다?"
"화폐가치가 높아진다고 뉴스에서 들었어요. 그럼 반대로 가치가 낮아진다면요?"
"그야···."
"우리가 살기 힘들어지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아마 무리일거야. 그 안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엮여 있거든."
"아하! 미국이 왕이니까 그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바로 보았구나."
지금의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압박해서 적극적인 달러화 절하정책을 쓴다는 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기조가 보이긴 했으나 플라자합의와 같은 충격포탄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생각까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천우가 굳이 달러화의 절상화 절하에 대해 질문한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결국엔 과연 최충의 회장이 미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 살핀 것이었다.
그는 답을 얻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판은 천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셈이다.
달러화 가치가 낮아지면 개도국의 자금사정이야 훨씬 나아지겠지만 대한민국과 같은 신흥공업국, 즉 수출주도형 중진국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무역수지가 떨어져서 결국 물건을 팔아봐야 손해만 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달러화 절하의 역풍을 일본이 맞아준다면 판은 뒤집힌다.
엔화절상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는 하겠지만 결국 엄청나게 오른 일본제품 대신 한국제품이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후후, 그리고 엔화절상은 생각해도 저금리정책은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늪에 빠진 일본을 상상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최충의 역시 사람이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천우의 재롱과 같은 질문으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다.
최충의 회장은 술을 한 잔 넘기더니 이내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말이 없던 최충의, 그는 무려 5분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천우 아범, 천우 어멈."
"네, 아버님."
"다음 달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천우를 데리고 회사 견학을 올 수 있도록 해라."
"견학이요?"
"장사를 하고 싶다면 메이저에서 한 번 해봐야지."
"하지만 천우는 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놈은 떡잎부터 다르다. 보통의 아이들이 받는 교육으로는 빛을 보기 힘들어. 대학? 유학? 그딴 거 필요 없고 실전부터 배우도록 하자."
이제는 천우를 인정하다 못해서 옆구리에 끼고 진짜 엘리트 교육을 시키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종친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종손인데 당연히 엘리트 교육을 받아야지."
드디어 저 꼰대들이 천우를 인정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말이다.
다만, 아까 허태용이 했던 말이 걸렸다.
'아니야. 이 노친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예뻐할 리가 없어. 뭐가 다른 수가 있겠지.'
저 안에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다는 건 이미 검증된 얘기다.
우선 현보와 같은 대기업을 세운 사람이 아니던가.
과연 대기업 수뇌부에 들어간 여섯 살 배기에게 무슨 교육을 할지, 천우는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허나 확실한 건 이것이 천우에게 있어선 절호의 찬스라는 점이었다.
***
1983년 8월.
세계 7대 석유회사인 갤럭시 오일컴퍼니는 미국 내 유전사업만으로도 수익성이 충분하다고 판단,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 일제 철수를 진행하였다
현재 세계 원유시장은 공급과잉과 잉여생산으로 인해 기름 값이 급락하는 추세였고 미국은 자국 내 유전만으로도 향후 인프라 유지에 자신이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 대신 갤럭시 오일컴퍼니는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의 인프라를 미국으로 옮기고 오히려 신 유전 지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하여, 갤럭시 오일컴퍼니는 영국 및 스칸디나비아 등에서도 철수, 이제는 중동 신유전의 지분확보에 문어발식 지분투자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가운데 달러화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미연준의장은 달러화 절하를 돌파하는 일환으로 통화긴축 및 고금리정책을 펼쳤고 불과 1년 만에 달러화가 20%까지 오르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달러화 절상은 멈추지 않은 채 폭주기관차처럼 독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갤럭시 오일컴퍼니가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은 이런 달러화 절상에 맞물려 원유의 과잉공급이 수지악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수지악화는 한국기업들에게도 엄청난 문젯거리였다.
바야흐로 혼돈의 9월.
천우의 첫 번째 견학이 시작되었다.
수지악화의 수렁에 빠진 현보 그룹은 어떻게든 돌파구 마련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달러화 과열 시장에서 과잉생산과 수지악화라는 악제를 어떻게 돌파할 지가 관건이었다.
보고서를 들고 회장집무실로 가는 최호명, 그의 곁에는 회사 견학을 나온 천우가 함께 하고 있었다.
최호명의 얼굴이 많이 상한 듯했다.
'근심이 크신가보네.'
이럴 때일수록 천우는 자신이 힘을 북돋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 장사를 배운다고 온 첫 날이잖아요? 너무 떨려요!"
"후후, 그래. 하지만 넌 천재잖아? 잘 할 수 있을 거야."
"헤헤, 그런가요? 그럼 저도 아빠처럼 멋있는 기업가가 될 수 있어요?"
최호명의 푸석푸석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아들은 아빠를 닮고 싶어?"
"네!"
"녀석, 고맙다. 하지만 넌 아빠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아니요! 아빠보다 훌륭할 수는 없어요! 아빠는 슈퍼맨이잖아요!"
"······."
이런 힘겨운 시기에 아들의 따뜻한 한 마디가 들어오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훅 하고 올라오는 최호명이었다.
그는 회장집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아들을 안고 그 부드러운 볼에 자신의 거친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아이고, 내 새끼!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우우웅, 우우웅···."
아버지의 스킨냄새, 따뜻한 숨결까지.
천우의 찹쌀떡 같은 얼굴이 최호명의 볼을 타고 제멋대로 출렁거렸지만 천우의 기분은 한껏 좋아졌다.
"으흐흐, 귀여운 것!"
"헤헤, 나도 아빠가 좋아요!"
아버지의 애정표현은 항상 이렇게 투박하고 열정적이다.
수염이 약간 따갑긴 했지만 천우는 아버지의 이런 거친 애정표현이 아주 좋았다.
천우는 이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충의는 일주일에 한 번, 회장집무실과 총괄이사 집무실을 오기면서 천우에게 장사에 대해 배우라고 명령했다.
그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아버지와의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 천우로선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잠시 후, 최호명이 회장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총괄이사, 결재 올리겠습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며 중후한 멋이 깃든 최충의 회장집무실 전경이 천우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어두운 톤의 원목장식이 묵직함을 더해주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최충의의 카리스마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최충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사석에서보다 회사에서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엄청난 중압감이다···! 아버지는 이런 사람과 어떻게 대면하면서 매일 지내시는 거지?'
심지어 최호명은 이런 최충의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지 않던가.
세삼 최호명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천우였다.
천우는 집무책상에 앉아 있던 최충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할아버지! 기체만강 하셨어요?!"
"기체만강은 또 어디서 배운거냐?"
"TV에서 봤어요!"
"그래, 저런 놈에겐 공부보다는 그저 책을 잃거나 TV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은 교육이 될 테지."
천우가 생각하기에 최충의가 처음부터 천우를 그리 애매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처음 프라모델을 주었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주식을 주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다른 손주들을 대하는 것과는 온도차이가 좀 많이 났다.
'이를 테면 인턴사원을 보는 사장의 눈이랄까?'
이윽고 최호명은 회의에서 나온 기획안을 올렸다.
"말씀하셨던 기획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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