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할아버지, 편지를 썼어요!"
"허허! 오냐, 고맙구나. 보자···. 사랑하는 할아버지, 그동안 저희들을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릴게요. 사랑해요···. 허허, 그래. 고맙구나."
"할아버지 사랑해요!"
"그래, 내 강아지!"
마치 태풍이 훑고 지나간 것 같은 테이블에 그나마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종친들도 보통의 할아버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형님은 좋겠소. 손녀가 편지도 써주고."
"그럼, 좋지!"
천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열 받는다고 아들 대가리에 유리잔 던진 사람 맞나? 세상에, 뭐 이렇게 이중적인 사람들이 다 있어?'
현보일가는 생각보다 핏줄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에 한희연의 뱃속에 아기가 들어섰다고 했을 때,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한 채 결혼을 승낙했었다.
회사에서는 사람을 잡아 뜯어 먹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지만 자기 핏줄만큼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천우는 그런 이중성에 치를 떨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들의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만 했다.
'쩝, 별 수 없지 뭐.'
그래도 저 노친네들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에 위안을 얻은 천우였다.
선물전달은 계속 되었다.
"할아버지, 제가 손수건을 만들었어요! 직접 바느질도 했어요!"
"오오, 그래! 자수를 놓았구나!"
자수를 놓은 아이는 최희명의 딸 최은우였다.
얼기설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수이지만 저것이 다섯 살배기 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거의 치명적인 귀여움을 자아냈다.
마치 백설기처럼 하얀 최은우의 선물에 최충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곱기도 하지! 네 아비, 어미가 딸의 반만 닮아도 좋을텐데 말이다."
"우웅···?"
"허허, 아니다. 아무튼 고맙구나."
지금까지는 제 나이대로 듣고 말하고 느끼는 아이들이 선물을 했다.
이제 드디어 천우의 차례가 되었다.
천우는 속까지 어린 아이는 아니라서 선물을 들고 선 것 자체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랐다.
뭐랄까, 어린아이의 가죽을 뒤집어 쓴 중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허나 적어도 겉모습은 아이라서 제법 귀엽기는 했다.
천우는 뭇 누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정도로 잘 생긴 아이가 아니던가.
"할아버지, 저도 선물을 가져왔어요."
"선물이라···."
저 선물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크다는 것부터가 최충의의 시선을 끌었다.
허나 머리가 좋다는 것 이외엔 천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에 그에 대한 기대조차도 없었다.
뭐, 대충 어른의 취향에 맞는 뭔가를 가지고 왔겠지.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끈 떨어진 손자의 선물이다. 그걸 받는 것이 마뜩찮았지만 그래도 박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 고맙구나."
영혼이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듯한 그의 말투에 천우는 약간 실망할 법도 했다.
허나 그는 꿋꿋하게 선 채로 최충의가 선물을 풀어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둑.
드디어 테이프로 정교하게 붙인 포장이 뜯어지자, 그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은색 보자기가 씌워진 차가 한 대 들어 있었다.
보자기 안의 실루엣을 살핀 최충의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루카스 447?"
"어라? 할아버지는 실루엣만 보고도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좋아하신다고 해서 140대 1 비율로 만들어봤어요."
"···비율을 줄여서 그대로 만들었다고?"
"헤헤, 물론 100% 똑같지는 않아요. 그저 흉내만 좀 내봤어요."
사실, 천우는 막연히 자동차 마니아라고만 알고 프라모델을 만들었지만 최충의는 엄청난 자동차 프라모델 수집광이었다.
아직까지는 한국에서의 프라모델이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있었지만 일부 취미가 있는 수집가들 사이에선 수제 프라모델이 거래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벗겼다.
휘리리릭!
보자기를 벗기자, 루카스447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날카로운 자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탄성을 질러댔다.
"오오! 이걸 저 꼬맹이가 만들었다고···?"
"···에이, 설마!"
어른, 아니 어지간한 전문가도 이런 디테일을 잡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차체와 하체, 심지어는 머플러와 헤드라이트까지 제대로 다 달려 있었다. 심지어는 룸미러와 기어변속기까지 상세히 구현되어 있었다.
이미 충분히 놀란 눈치였다.
아니, 이걸 천우가 만들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천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야,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어쩌면 프라모델 수집광 아니야?'
그의 생각대로 프라모델 수집가인 최충의는 반짝이는 눈으로 루카스447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천우가 그의 가슴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시동을 걸 수도 있어요."
"시동을 건다고···?"
"차는 굴러가야 차라고 책에 나와 있었거든요."
"···호오?"
천우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위, 위이이잉!
꽤나 묵직한 모터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량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셀로판지로 만든 차체 아래의 무드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강렬한 인상을 자아냈다.
"우와···!"
"허어, 세상에! 이걸 진짜 네가 혼자 만들었다고?"
"네. 상자 바닥에 설계도가 있어요."
최충의는 상자 바닥에서 천우가 수기로 그린 설계도를 꺼내들었다.
천우는 설계도를 그릴 때, 일부러 약간 어색하고 삐둘빼뚤하게 그렸다. 그래야 어린아이가 고사리손으로 그린 디테일이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만들면 어렵지만 부품을 따로 나누어서 만들면 쉽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따로 만들어봤어요."
"···살다보니 정말 별 일이 다 있군 그래."
크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최충의는 진심으로 이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물건은 어지간한 손재주 없이는 절대로 만들 수 없거니와 모터를 달아서 움직이게 할 생각은 최충의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천우는 그에 이어서 흰색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를 받은 최충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뭐냐?"
"유가증권이요."
"뭐, 뭐라고?"
"종이로 된 주식증서요. 제가 비록 할아버지께 자동차 회사를 사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꿈에 한 발 더 나가서도록 돕고 싶어서 마련해봤어요."
최충의는 잔뜩 격양된 표정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미래자동차의 주식을 소유함을 의미하는 증서가 들어 있었다.
"······!"
"죄송해요. 더 많은 주식은 살 수 없었어요. 번 돈이 얼마 안 돼서 말이죠."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아이라곤 하지만 저 나이에 맨땅에 헤딩해서 돈을 벌고 그걸로 주식까지 사서 선물하는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종친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실이라면 저놈, 진짜 물건인데 이거."
"이놈! 감히 할아버지께 거짓말을 하려고 드는 게냐!"
최호명이 나서려 엉덩이를 들썩했다.
허나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천우는 도매상에서 받은 영수증을 그들의 앞에 내어놓았다.
"매입전표라면서 아저씨가 주시는 걸 모아봤어요.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가격을 올리고 내리면 내려서 받을 텐데, 그걸 직접 확인하는 건 전표가 최고 좋잖아요."
"매입전표? 그걸 네가 어떻게···."
"책을 읽으면 다 나오지요."
다들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니, 이정도면 그냥 까무러쳤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 작은 선물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심지어는 최충의가 본격적으로 천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천우 애미야."
"네, 네?"
"이 아이의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있는 게냐."
"하고 싶은 걸 시키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거?"
"고철을 줍겠다고 해서 도와주었고 장사를 하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엘리트 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건···."
이번에는 최호명이 나섰다.
단순히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애처가로서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아버지로서 입을 연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잖습니까."
"왜 그럴 필요가 없어? 넌 네 아들이 보통의 아이들과 같다고 생각하냐? 당연히 영재교육을 시켜야지."
"그래요, 다르죠. 저 아이가 CNN 뉴스를 그대로 번역해서 제게 알려줍니다. 다르다 못해서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느낄 때가 있을 정도이지요."
"···뭐라고?"
"TV만 며칠 보면 언어를 꿰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엘리트 교육이 무슨 소용입니까."
"허어!"
안 그래도 최충의 역시 얼마 전부터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터라 CNN뉴스를 시청하거나 USA투데이 같은 영자신문을 구독하기도 했다.
그는 곧장 집에서 신문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어제 자 신문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지고 와."
"예, 회장님."
가정부들이 신문을 가지고 왔고 그것이 천우에게 전달되었다.
다들 반신반의하는 눈초리였다.
천우는 오히려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깜짝 놀라서 오줌 싸게 만들어주마.'
그는 신문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읽어나갔다.
"최근 미, 소 대립이 고착화 되면서 소련의 유럽대륙 침공 움직임이 본격화 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유명한 군사전문가 마이클 테이너스의 말에 따르면 최근 소련의 기갑여단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한데다 탄도미사일의 발사체에 들어가는 원재료가 다량으로 소련에 들어간 것으로 봤을 때, 아무래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고 CIA는 전했다. 이에 현직 대통령···."
신문 내용을 영어로 읽어서 낭독하자, 주변이 그야말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특히나 최근 CNN을 자주 시청하는 최충의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영어를 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CNN을 시청한 건 이제 막 한 달쯤 되었을 겁니다."
"한 달 만에 이런 실력을 갖추었다고?"
"아니요, 일주일이요."
"이, 일주일?!"
"처음엔 어휘력이 좀 부족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CNN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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