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한양 최 씨 연대기, 겉은 소가죽을 나무에 덧대 만들었고 종이는 아주 거칠고 딱딱했다.
꽤나 오래된 책으로 보였지만 그렇다고 고서는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쓴 겁니다. 가문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와, 재미있겠다!"
"허허, 중간에 삽화도 좀 넣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한성에서 그림 좀 그린다는 삽화쟁이들에게 고무신 한 켤레씩 주고 받아낸 그림들이죠."
책을 펼쳐보니 거의 한 장 당 한 번씩은 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삽화는 붓으로 그렸고 어떤 삽화는 연필로, 어떤 삽화는 손가락에 먹물이나 물감을 찍어서 그리기도 했다.
그린 방법은 전부 다 다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림 한 장 한 장이 모두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거리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역사적 고증이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실제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도 아닌데 한 인물의 일대기를 구전으로 전해들은 후, 그걸 글로 옮겨 화가들의 이해를 도운 것이었다.
삽화들을 하나하나 구경해 나가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림들에는 각각의 날짜와 함께 지장이 찍혀 있었는데, 지장을 찍은 모습들이 제각각이었다.
지문으로 글자를 쓴 사람도 있고 아예 그걸로 작은 그림을 그린 사람도 있었다.
"그림에 지문이 찍혀 있어요!"
"허허, 우리 도련님께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래요, 그림을 그린 사람이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자기만의 개성으로 지장을 찍었죠. 저는 그림을 그린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리에서 고무신 한 짝에 그림을 파는 사람이라곤 해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삽화 하나, 하나에 작가의 개성을 살려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뜻이네요?"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래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네요. 허허, 도련님의 영민함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네요."
"헤헤, 별 말씀을요."
그는 도서실에서 물망초가 수놓아진 비단 보자기를 찾아와선 그것으로 그림을 감싸주었다.
마치 조부가 손자에게 봇짐을 싸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잃어버리지 마시고 총괄이사님 차에 책을 실어놓으시지요."
"네! 그럴게요!"
"허허, 그래요."
천우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AI가 부탁을 하기도 하나?'
-AI니까요. 주인님께 복종하긴 합니다만 저도 약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감정이라. 내 머리에 사람이 한 명 들어앉은 느낌이로군.'
-아무튼 간에 이 도서실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주십시오.
'이 책들에게 관심이 생긴 거야?'
-저는 온라인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은 전부 다 얻었습니다. 그것이 전문지식이든 누군가의 논문이건 전부 전자화 시켜서 가지고 있죠.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얻는 지식은 제한적입니다. 저는 군사용으로 만들어졌지만 완벽한 뇌를 만들어야하기에 끝도 없이 지식을 갈구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면 그걸 가지고 싶어서 미치도록 되어 있죠.
'···그 정도로 지식을 원한다면야.'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다.
마샤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이렇게 완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지식으로 진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천우는 허태용에게 마샤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집사 할아버지,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이요? 하명만 하시지요."
"이 도서실, 할아버지가 관리하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2층 서쪽은 제 집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회장님께서도 이 책들의 주인은 저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건 회장님의 유언장에도 나와 있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리는 것이 역시 옳았네요. 이 책들, 일주일에 한 번씩만 볼 수 있을까요?"
"책을 읽겠다고요? 재미와는 거리가 아주 멀 텐데요. 내용도 상당히 복잡하고요."
"헤헤, 그래도 저는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아요. 만약 이 책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천우는 허태용을 바라보며 마치 아기고양이처럼 눈망울을 반짝여보였다.
요즘 하도 어린양을 하고 다녔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애교가 자동으로 발사되었다.
몸에 아주 잘 벤 애교를 받은 허태용은 별 수 없이 껌뻑 넘어가고 말았다.
"허허, 그러시지요. 서쪽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따로 있습니다, 우리 작은 도련님께서 오신다면 제가 항상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감사해요! 헤헤, 할아버지는 최고에요!"
"껄껄껄! 별 말씀을. 다만, 그 대신에 이 노인네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할아버지께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저도 한 가지 들어드려야겠죠. 책에서 이걸 등가교환이라고 했었어요!"
"등가교환이라. 허허, 등가교환까진 아니고···. 그저 제 노파심에서 나온 부탁입니다."
"말씀하세요! 들어드릴게요."
허태용은 아주 깊은 근심으로 물든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은 뭔가 대단한 회한을 가슴에 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있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총괄이사님을 돌봐왔습니다. 사실, 그분께서 기억하지 못할 때에도 저는 그분을 지켜봤었지요."
"아아···!"
"제겐 자식, 혹은 손자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신경이 쓰이네요."
천우가 허태용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전부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천우의 손을 붙잡고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효도는 못하더라도 아버지가 정말로 힘들어지면 그땐 아버지를 지켜주세요."
"하, 할아버지?"
천우는 분명 미래에서 왔지만 현보 그룹의 가문비사에 대해서는 절대 알 수가 없었다.
일반 가정의 가문비사도 모르는데 대기업의 가문비사를 도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뭔가 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테지.'
최호명은 남몰래 뭔가를 준비하다가 일이 꼬여서 매장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허태용이 이런 넋두리를 했을 리가 없었다.
천우는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아빠를 지키라고요?"
"허허, 크면 이해하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도련님은 영민한 사람이니까요."
그의 속마음에 뭐가 감추어져 있는지 천우는 결코 알 수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최호명의 편이 한 명쯤은 있다는 사실이었다.
***
보통의 생일잔치는 기쁘고 흥겹다.
만약 집안 잔치로 생각한다면 술 마시고 춤도 출 것이고 가족들끼리 화투 같은 놀이도 곧 잘 할 것이다.
헌데 이 집안은 생일잔치라는 것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잔치라고 들었는데 먹을 것만 가득하지 그걸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명색이 가족인데 웃음기 하나 없이 그저 서로의 눈치만 살피느라 볼 장 다 볼 판이었다.
상석에는 최충의가 앉았고 그 아래로 서열 순으로 자리가 배치되었는데, 최호명과 최희명 형제는 서로 마주보는 형국으로 앉았다.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나게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철전지 원수지간으로 볼 수도 있을 법했다.
그는 별안간 최호명을 바라보여 씨익 웃었다.
"아버지, 장인어른께서 언제쯤 경영권 승계 하냐고 물으시던데. 뭐라고 대답하면 됩니까?"
천우는 저 소갈딱지도 없는 놈팡이가 왜 이쪽을 보고 실실 쪼개나 싶었다가 그가 내뱉은 말 한 줄에 그 속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저놈은 자신이 형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일부러 도발하는 것이었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졌나. 사람이 왜 저렇게 싱겁고 철이 없어?'
그 말을 들은 최충의의 반응도 썩 좋지는 않았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네 작은 아버지들과 상의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말이 왜 나오는 거냐."
"하하, 저는 그저 장인어른의 말씀을 전한 것뿐입니다. 그분의 의도야 그분께서 제일 잘 아시겠지요."
"크흠!"
종친들의 얼굴에 불편함이 가득해 보인다.
허나 별 수 없었다. 아무리 최충의라곤 해도 조의창이 한 마디 하면 회사를 접어야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현 여당은 대통령의 비호 아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2010년대야 국민이 대통령을 탄핵시킬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달해있었으나 1980년대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의 운영자금을 마치 제 지갑처럼 쓰며 대선, 총선 다 치르는 사람들이 바로 집권여당이다.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빌미로 대기업을 협박해서 정치자금을 뜯어 쓰는 사람들이 저들인데 대기업 총수라고 해서 별 수 있겠는가.
허울뿐인 민주주의, 지금의 이 정치적 암흑기에서 조의창에게 대항할 수 있는 기업인은 없을 것이었다.
조홍희는 아예 대놓고 최충의를 압박했다.
"아버님,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세요. 작년에 세무조사를 받았던 서동 그룹에 조만간 다시 한 번 세무조사가 들어간다고 말이에요."
"······."
"한 번 털기가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잖아요? 그 빌미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 그것이 관건인 셈이죠."
한마디로 회장자리 내놓지 않으면 회사를 통으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셈이었다.
종친들의 주먹이 분노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허나 최충의는 그런 시시한 협박 따위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콰앙!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
"···사돈과의 일에 감히 네까짓 것들이 감 놔라 대추 놔라 참견이냐? 어른들 일에 참견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아니, 저는 의원님의 의중을···."
"의원님의 의중이라. 좋아, 그렇다면 내가 직접 의원님을 만나서 담판을 지으면 되겠군. 굳이 너희들에게 회장직을 돌려주지 않아도 내가 의원님을 밀어드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네?! 아버지, 어찌 저에게 그런 말을···."
최충의는 최희명의 얼굴에 술잔을 집어던졌다.
퍼억!
"크허억!"
"이런 모자란 놈 같으니! 어련히 알아서 기다리면 회장자리 떨어질 것을 뭐 그리 급하다고 장인까지 팔아가면서 날뛰는 것이냐! 네가 이러는 건 나와 네 장인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새아가!"
남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자, 약간 당황한 조홍희는 최충의의 부름에 어벙벙하게 대답하였다.
"네, 네?!"
"남편이 머저리처럼 굴면 아내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 법이다. 다시 한 번 이 아비에게 대들었다간 둘 다 내 호적에서 파버릴 줄 알아라. 알겠냐?"
"저, 저희들은 그저···."
콰앙!
최충의는 분노에 가득 찬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제야 조홍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죄, 죄송해요···!"
"조 의원의 자제면 그 자제답게 품위를 지켜라. 앞으론 두 말 안 한다."
"예, 아버님."
종친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먼저 둘 째 최충현 회장이 두 부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쯧쯧, 이것들아. 우호지분 정리도 아직 안 된 마당에 무슨 경영권 승계를 한다는 거냐. 너희들 생각처럼 얼렁뚱땅 지분을 넘겼다가 경영권에 스크래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너희 둘이 총대 멜래?"
"죄, 죄송합니다···."
"아직 조 의원님 쪽과도 논의할 것이 많아. 상속세며 취득세며 기타 잡다한 세금까지 정리하자면 시간이 걸릴 것이고 주가가 흔들리지 않게 주주총회를 다독이는 것도 필요하지. 너희들이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면 우리 작은아비들이 뭘 해주려고 해도 일이 자꾸 꼬인단 말이다. 알겠냐?"
"···예, 작은 아버지."
"으이그, 이 모자란 놈. 누가 가서 약 좀 가져오너라."
이사회와 주주들이 최희명에게 회장자리를 넘기기를 꺼려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남 밑구멍이나 잘 핥아주는 회장이 과연 회사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싶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쯧, 언젠간 그 거품이 꺼지고 털썩 주저앉게 될 기업을 손에 쥐고 다들 아주 난리브루스를 추고 앉았네.'
도대체 이런 생일잔치를 왜 하는 것인지 천우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피차 서로가 힘들어질 걸을 이런 심력소모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허나 최충의 회장에게 오늘과 같은 날도 없었다.
딱딱하고 삭막한 식사 도중에 손자손녀들이 하나 둘 선물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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