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최충의의 생일인 8월 4일.
현보 그룹의 5남매와 최충의의 형제들, 그 자제들까지 범 현보가가 최충의 집에 운집했다.
최초로 현보 상사를 설립한 이후부터 함께 사업을 영위했던 형제들에게 계열사를 분리해 준 최충의 회장은 그들과 아직까지도 활발한 내부거래를 주고받는 범 현보가문을 이룩하였다.
정유회사를 가지고 떨어져 나간 둘째 최충현, 백화점을 가지고 나간 셋 째 최충휘, 제지화학을 가지고 나간 넷 째 최충철까지.
해당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대기업을 일궈낸 그들은 재계 최고의 형제들로 불리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일정수준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분이 경영권방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서로에 대한 내부거래로 쌓는 이득이 매출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니 죽어가던 계열사를 살려내는 것도 당연할 정도였다.
이런 그들이 의견을 나누어 회장후보를 결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범 현보가문의 수장은 단순히 현보 그룹의 회장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연합체를 이어주는 수장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장을 뽑는데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한 가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처가를 등에 업을 것, 두 번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
만약 이 두 가지에서 하나라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면 회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처음 최호명이 회장 후계자로 지목 되었던 당시, 종친들은 조의창과의 결혼만 성사된다면 당연히 후계자로로 최호명을 지지하겠다고 뜻을 모았었다.
그들의 입장으로선 조의창 세력을 등에 업는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가문이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 오히려 최호명이 회장으로 등극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허나 돌연 혼담을 발로 차버린 최호명으로 인해 가문 내부의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최호명을 회사에서 내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었다.
80년대의 대한민국은 정계와 재계의 사이가 긴밀해야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정치계의 입김 한 방이면 회사가 무너지는 건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음으로 권력자를 등에 업는 것은 대기업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현보가문은 둘 째 최충현의 처가이자 중정(중앙정보부) 고위인사 및 두 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유 씨 일가를 통해 얼마 전까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받고 있었다.
허나 77년부터 시작된 중정의 내부분열로 인하여 유 씨 일가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부터 현보일가는 새로운 정치끄나풀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중정부장이 암살된 것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암살이 공표된 것은 79년이지만 그 동안 내부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던 터라 소식이 2년 동안이나 뒤로 미뤄진 것이었다.
유 씨 일가는 중정부장의 오른팔이었음으로 그의 죽음은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다.
미처 수습할 세도 없었다.
잘못하면 현보 그룹까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조의창이 대안으로 대두되었다.
물론, 조의창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허나 현보일가는 조의창을 섭외하기 위해서 통상 전달되던 뇌물의 20배를 먹였다.
심지어는 조의창의 내부인사들에게도 통상 뇌물의 5~10배에 달하는 돈을 건네주었고 그 돈만 해도 어지간한 중소기업 몇 개를 차릴 정도였다.
그렇게 갖은 노력과 로비를 통해서 조의창이라는 사람을 섭외해서 혼담까지 성사시켰다.
이제 혼인신고서에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다.
헌데 그런 혼담을 최호명이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그때 최호명은 이렇게 말했다.
'정경유착 때문에 언젠가 이 회사가 무너질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테니 말입니다!'
그의 예언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두 집안은 난리가 나버렸다. 심지어 조의창이 현보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었다.
결국 조의창이 현보를 돌로 찍어버리려던 찰나, 최희명이 조홍희를 꼬셔서 결혼을 급진전시켰다.
현보일가로선 한 숨 돌리는 신의 한 수였다.
현보 입장에서 본다면 최희명은 가문의 영웅, 최호명은 역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현보일가에서 그를 달갑게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최희명은 최호명에 비해서 자질이 한참이나 떨어지지만 권력의 비호만 있다면 천하의 바보도 뛰어난 기업가가 될 수 있던 시절이 바로 1980년대 초반이다.
그러니 현보일가에선 최희명을 회장으로 밀어주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최호명은 회사의 더럽고 썩은 부분만 물려받아서 거의 쓰레기통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기획총괄이사라는 자리 자체가 갖는 권한은 많았지만 결재권한 자체가 회장에게 있었다. 허나 기획을 출범시킨 본인은 최호명이기에 그는 정책의 실패가 이뤄지면 모든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야했다.
이런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최호명이 아내를 데리고 본가를 찾으면 분위기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최충의 회장의 저택은 한남동 고급주택가 한 복판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마당까지 합쳐서 족히 1500평은 되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현보일가의 저택은 오늘 이곳을 찾은 천우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엄마, 저택이 보여요!"
"응. 그렇구나···."
최호명의 차 뒤에 탄 천우는 짐짓 긴장된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많이 긴장되시는 모양인데.'
그럴 만도 했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린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최호명은 언제나 그건 자신이 권력의 개가 되기 싫어서 선택한 길일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과연 최호명다운 선택이었지만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시려나."
"그렇게 불편하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당신이 5년 동안 노력한 것도 있고 앞으로 우리 천우가 받을 유산도 생각해야 하니까."
"유산···."
"나는 거지처럼 살 수 있지만 내 아들은 아니잖아."
그는 변속기 봉을 잡았던 손으로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은 두 손에 애틋함이 보이는 듯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참아줘."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당신이 걱정이지."
"대의를 위해서 참아줘. 내가 말한 그날이 멀지 않았어."
천우는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의 비장의 무기가 있나 싶었다.
전생의 천우가 알기론 최호명은 후계싸움에서 밀려나 좌천된 범 현보가문의 일원이었을 뿐, 이렇다 할 사고도 소문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헌데 지금 최호명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비자금이라도 만들어두셨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이미 회사에서 밀려날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마당에 비자금 조금 빼돌리는 것이 도대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천우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비자금을 조성했거나 자기 회사를 세울 궁리를 하고 있다면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 당장 철강회사만 가지고 나가도 우리 가문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어.'
잠시 후, 저택의 거대한 대문이 열리며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백발의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바로 이 집안의 집사 허태용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허허, 저야 뭐. 오늘 내일 합니다."
"몸이 안 좋으시면 좀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이 집안에서 제가 일한 지가 벌써 60년이나 됩니다. 회장님이 도련님이시던 시절부터 있었으니, 거의 이 집안 귀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그런데 회장님 생신에 제가 빠지면 그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허태용이, 그렇게 쉽게 안 죽습니다."
풍채는 좋지만 과연 그게 나이를 이길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허태용은 천우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런, 작은 도련님께서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천우라고 해요."
"허허, 그래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신문에서 아주 난리도 아니던데요?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헤헤, 별 말씀을요."
허태용은 천우의 손을 잡았다.
"자, 도련님. 저와 같이 가시죠. 오늘은 부모님께서 꽤나 바쁘실 겁니다."
"네!"
매년 이맘때면 천우는 외가에 맡겨져 있었고 부모님이 뭘 하고 돌아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허나 종친들은 어찌 명색이 장손이 조부님 생신에 오지 않을 수 있냐고 작년부터 성화라 어쩔 수 없이 천우가 이 집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었다.
허태용은 천우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그야말로 중세시대의 궁전을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거실 중앙에 놓여 있고 그를 따라서 4층에 이르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있었다.
"도련님은 저와 같이 도서실로 가시죠. 이 노인네가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서실이요? 집에 도서실이 있어요?"
"네, 도련님. 현보 상사라는 회사는 원래 회장님의 선친, 그러니까 도련님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호였습니다. 현보 최어선 선생이라고 하면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만석꾼이셨습니다. 이 집안 대대로 인삼장사를 해왔고 6대조 되시는 영궁 최보 선생께서는 비단길을 횡단하시면서 서양의 문물을 집안으로 많이 들여오셨습니다."
"우와, 비단길을 오가셨다고요?"
"그럼요! 조선시대에 최씨상단이라고 하면 전국에서 알아주는 상인집단이었습니다."
천우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최씨상단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상인집단인데, 한 때는 권문세도가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숙종제위기에 거듭되는 환국으로 망했다가 정조제위기에 다시 일어나 이 지역 최고의 만석꾼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원래 이 집 터도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던 기와집 위에 지은 겁니다. 한국전쟁으로 집안이 다 무너져서 폐허로 남아 있었다가 최근에 회장님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면서 이런 호화 저택이 들어서게 된 것이죠."
"아하!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최씨상단 얘기는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어요!"
"허허, 그러셨습니까? 우리 도련님이 아주 영민하십니다 그려."
허태용은 천우를 데리고 2층 서쪽구역에 있는 도서실로 들어갔다.
도서실은 45평의 방 사면에 6단 책장을 놓은 형태였는데, 층고가 총 3층이었다.
고서적부터 현대서적까지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방의 네 곳 모서리에는 봇짐을 멘 남자 네 명이 각각 서 있었는데, 그 앞에는 한문으로 각각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허태용은 그들이 조상을 본떠서 만든 석상이라고 일러주었다.
"고려 말, 왜에서 은을 들여와 원나라로 행상하셨던 2대조 최여부 선생님을 시작으로 3대조 최황 선생님, 4대조 최국, 5대조 최헌익 선생님이 각각 이곳에 계십니다. 워낙 행상을 오래하셔서 돌아가시던 그 순간에도 외국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봉분이 없어 비석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죠."
"아아, 그랬구나. 아이고 그럼···."
천우는 당장 석상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조상의 묘를 보면 당연히 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허태용이 흐뭇하게 웃었다.
"허허, 그래요. 조상님을 뵈었으면 큰절을 올리는 것이 순리이지요."
"헤헤, 그렇지요?"
"아주 기본이 탄탄하게 잘 자리 잡으셨습니다. 나중에 분명 큰 일을 하게 되실 겁니다."
허태용은 천우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천우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곳에 있는 책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 고서적들 중에는 현존가치로 역대 최고를 기록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예전에 블란서 왕실 궁녀가 쓴 야사실록부터 영국? 소설, 극대본 등, 지금은 돈을 줘도 절대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와, 그런 책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허허! 당연합니다. 이미 유럽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이 휩쓸고 지나갔으니까요. 만약 저런 책들이 남아있었다고 해도 이미 불 타 없어졌겠죠."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전쟁이 터졌었고 이 집은 불에 탔었는데 어떻게 책은 남아 있었던 건가요?"
"도련님의 선조들께선 전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시곤 서책이나 고검, 유물 등을 지하에 묻어두셨습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황금이 조선팔도 어딘가에 있다곤 하는데 그 위치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할아버지도요?"
"허허, 그렇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회장님께서도 모르실 겁니다."
"아하! 그런 거구나."
"그나마 이 서책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관리하던 것들이라서 지금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과연 다른 유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도 죽기 전에 한 번은 보고 싶네요."
중년의 정신을 가진 천우에게도 이곳은 그야말로 천에 천 세상이었다.
심지어 마샤에게도 이곳은 낯선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단합니다. 존재의 진위여부를 놓고 학계가 갑론을박 할 정도로 행방이 묘연한 책들이 수두룩합니다. 이걸 지켜냈다는 건 이 집사라는 노인이 세계사의 한 부분을 지켜낸 것이나 마찬가지겠군요.
'대단하긴 대단해. 그 전란통에 책까지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세삼 저 주름진 얼굴이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천우였다.
그런 그에게 허태용이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대략 4절지 크기의 이 책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한양 최 씨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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