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1화 (11/202)

5(2)

7월 초, 이제 막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천우는 아버지 최호명의 손을 잡아 이끌고 도매식자재상에 들렀다.

"여기에요!"

"허어, 진짜 도매상이네. 우리 동네에 도매상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헤헤, 책에서 보니까 장사를 하려면 시장조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알아봤어요."

"시장조사까지 해 본거야? 대단한데?"

"기본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그래. 장사에는 무릇 시장조사가 첫 번째 선행되어야 하지."

AI마샤의 나노머신에는 조선시대부터 2030년대까지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동여지도를 시작으로 군사용 지도, 로드맵, 심지어는 지적도상의 도시가 어떻게 변했는지까지 죄다 나와 있었다.

그런 천우가 굳이 발품을 팔아서 시장조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마샤를 통해서 이 근처 식자재도매상이 몇 군데나 있는지 알아보았고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도매상을 골랐다.

도매상은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데다 IMF금융위기를 버텨낸 사람이라면 그만큼의 노하우와 수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마침 근방에 도매상도 있겠다, 수요자들이 넘쳐나는 공장도 있겠다, 천우가 장사를 해보기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한 편, 최호명은 속으로 아들에 대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군. 이정도 입지면···.'

대기업이나 소기업이나 장사를 하는 기본은 똑같다.

원료를 싸게 구매해서 경쟁력 높은 물건을 만들어서 수요자들을 공략하는 것이다.

수요란 비단 물건을 소비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과 의사가 충분한 사람, 그들까지 수요라고 보는 것이 옳다.

최호명은 이 동네에서 싸게 원재료를 구입해서 찜통더위의 공장단지 앞을 공략한다면 장사가 아주 잘 되겠다 싶었다.

아니, 이정도면 필승이었다.

약간 놀라서 안면이 경직된 최호명에게 가게주인이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물건을 찾으시죠?"

"으음, 그게···."

장사를 할 사람은 최호명이 아니라 천우였다.

그는 자신 있게 아주 또박또박한 말투로 물건을 주문했다.

"400그람들이 로즈버드 커피믹스 한 봉지랑 서동식품에서 나온 분말우유 1kg들이 한 포 주세요! 설탕은 옥서제당 것으로 5kg 주시고요!"

가게 주인이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으잉? 그걸 다 어떻게 외웠어? 여섯 살 치곤 머리가 참 좋네."

"헤헤, 감사합니다!"

아마도 최호명이 아들에게 물품을 일러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가게 주인은 가격을 말하는데 최호명을 쳐다보았다.

"흠, 보자···. 로즈버드가 3210원이고 분말우유가 2600원, 설탕은 5kg들이가 없습니다. 3kg에 2357원이네요."

"에이, 커피가 왜 이렇게 비싸요? 그건 슈퍼에서 팔 때나 그렇게 파는 거죠."

도매상 '바다유통'의 주인 김원철은 천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라고? 커피가 어떻다고?"

"권장소비자가격이 3210원이잖아요. 근데 그걸 도매상에서 똑같이 팔면 어떻게 하나요?"

"허어, 이놈 봐라?"

"앞으로 자주 올 테니까 2900원에 맞춰주세요. 대신 분말우유 가격은 2500원까지만 깎을게요. 설탕은 2250원에 맞춰드리고요."

김원철이 깜짝 놀라서 최호명을 쳐다보니 그는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설마하니 이 꼬맹이가 흥정을 붙이는 건가 싶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천지 어떤 여섯 살배기 소년이 이런 소리를 하겠는가.

그는 황당하고도 신기해서 천우의 흥정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하하, 이놈 진짜 물건일세.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가격에 맞춰주마."

"감사합니다!"

"헌데 이걸로 뭘 하려고?"

"장사를 하려고요. 커피를 타서 팔게요."

"커피를 타서 판다고?"

"다방에서 커피를 700원쯤에 팔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마음 같아선 한 500원쯤 팔고 싶지만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나들의 주머니사정도 생각해야하니까 100원쯤 팔면 되지 않을까요."

김원철은 단숨에 천우에게 관심이 생겨버렸다.

그는 장사는 잠깐 잊고 천우에게 빠져들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공장단지에 자판기가 생길 것이라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니?"

"자판기요?"

천우가 고개를 돌려서 최호명을 바라보았다.

사실, 현보 전자에서도 이미 자판기 사업에 뛰어들긴 했으나 최근 엔화절상과 달러화의 강세로 인해서 답보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다만 현보 순수기술로 자판기를 완성할 수 있는 기술이 상용화 직전에 있었음으로 88년까지 100만대를 보급하겠다는 정부의 입장과 맞물려 1년 후에는 특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관망하는 중이었다.

"아마 들어오긴 하겠지. 몇 대 없어서 문제겠지만."

"괜찮아요!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자판기는 대로변에 설치할 수가 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도로교통법상 위배가···. 잠깐,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어?"

"헤헤, 조사를 좀 해봤어요."

"허어!"

사실, 80년대의 자판기사업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그만큼의 수익을 창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은 자판기 자체를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아직은 불법이었다.

도로교통법에 따르자면 통행에 불편을 줄 수 있는 설치물은 적발즉시 철거하도록 되어 있는데, 자판기도 그 범주 안에 포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은 자판기를 특정 건물의 점주와 상의해서 설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점주에게 일정부분 커미션을 줘야 설치가 가능했다.

잔 당 300원에 판매한다고 해도 본전을 뽑으려면 한참이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워낙 자판기의 가격이 비쌌고 거기에 원재료를 채워줄 사람의 인건비까지 계산해야하니 본전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천우는 대로변에 설치될 수 없는 자판기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공장단지 내부에는 이렇다 할 휴식공간조차 없었고 대부분이 대로변에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다였는데,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서 자판기가 그 넓은 공단에 단 두 대만 설치된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천우는 대로변을 돌아다니면서 커피를 팔 수 있기에 상당한 강점이 될 터였다.

김원철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하하, 그놈 참. 대단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커서 꽤나 큰 인물이 되겠어. 아버지는 참 좋겠습니다."

"좋지요. 이런 뛰어난 아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아저씨가 마수걸이로 가격을 깎아주마. 하지만 다음에 만약 자재 값이 오른다고 해도 울면 안 된다?"

"헤헤, 물론이죠! 하지만 아저씨, 반대로 자재 값이 내려가면 지금보다 더 깎아주실 건가요?"

"뭐, 그거야···. 하지만 꼬마야 그게 말처럼 쉽겠니? 여기서 가격이 더 떨어지면 기업은 뭘 먹고 살라고."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까지 천우가 꼬마 장사꾼 흉내를 내기 위해 고철을 주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천우는 아이큐200이라는 걸 이용해서 유감없이 국제수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 CNN에서 봤는데 기업이 물건을 너무 많이 찍어서 힘들데요. 그래서 곡물 값이 떨어졌는데도 가공식품 가격이 높데요. 앵커 아저씨 말로는 가격이 조금 더 떨어질 수 있데요."

"오호, 그런 일이···. 아니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말씀드렸잖아요. CNN에서 봤다니까요."

김원철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식으로 최호명을 쳐다보았다.

헌데 이미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깐, 내가 이제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앞으로 원자재 가격은 당분간 계속 내려갈 것이다.

아무리 흉작에 치여서 농부들이 굶어 죽어도 가격은 계속 내려간다.

달러화가 올라가는 바람에 무역업계에 직격타가 떨어졌고 그로 인해서 물건을 만들어봤자 팔리지 않았다.

재고는 계속 쌓이는데 무역수지는 꽉 막혀서 답보 상태였다.

최호명은 그제야 국제경제에 뭔가 심각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왔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천우야, 어서 값 치르고 가자. 아빠, 전화랑 팩스 좀 써야할 것 같아."

"네! 알겠어요."

김원철은 두 부자에게 커피와 분말우유, 설탕을 건네주고 현금으로 값을 받아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또 언제 올 거니?"

"물건 다 팔면요."

"하하, 그래. 또 보자꾸나. 꼬마 사장님아."

"넵!"

천우는 돈을 치르면서 물끄러미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최호명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좋아, 아버지가 뭔가 집히는 게 있는 모양이다. 후후, 아마 상무부와의 접촉에서 뭔가 나온다면 이 사태와 맞물려 큰 거 한 방 터질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시겠지.'

결국 모든 것은 천우의 뜻대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수레를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최호명은 열 일 제쳐 두고 일단 전화부터 붙잡았다.

"나야, 총괄이사. 전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지?"

-유미영 과장입니다. 주말 당직으로 제가 배정되었습니다.

"그래, 유과장. 지금 당장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해. 그리고 월요일에 투자기획과장 출근하면 곧바로 아메리카, 중동, 동남아로 뜰 준비를 하라고 전해둬."

-죄송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전화로 말하기엔 좀 길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전략기획실은 최호명의 완벽한 수족들이었다.

수뇌가 움직이면 그들도 아주 기민하게 움직일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이었다.

정말 모든 것이 천우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최호명이 자재를 들고 들어왔다.

"여보, 우리 왔어!"

한희연은 천우가 정말로 장사물품을 사오자, 헛웃음을 흘렸다.

"어머, 진짜로 사왔네?"

"사오기만 했을까봐. 도매상 아저씨랑 흥정까지 했다니까."

"으응? 흥정까지 했다고?"

그녀가 천우를 쳐다보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흥정은 장사의 기본이라고 책에서 그랬어요."

"하여간 진짜 못 말리는 아이라니까."

아들 덕분에 두 부부는 팔자에도 없는 소일거리를 하게 되었다.

원래 전자회사 야유회에서 쓴다고 하청회사에서 선물로 준 일명 '시원한 물통'을 창고에 모셔두었던 최호명은 그걸 꺼내어 깨끗이 씻었다.

시원한 물통은 밀폐력이 다른 물통에 비해 좋아서 아유회에 얼음을 얼려서 나가면 이 당시로선 가성비가 상당히 좋았다.

그 안에 커피를 타서 얼린 후에 장사 당일 꺼내어 달구지에 싣고 가는 동안 얼음이 녹으면 시원한 상태로 판매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바닥에 커피를 잔잔하게 깔아서 농도를 맞추는 일은 천우가 하고 물을 붓는 일은 한희연이, 냉동실에 적재하는 건 아버지인 최호명이 담당하였다.

헌데 의외로 팀워크가 좋았다.

아무래도 사이가 좋은 가족들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최호명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뭐야,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잖아?"

"여보, 우리 이참에 일 그만두고 커피나 팔까 봐요."

"하하! 진짜 그래도 손색없겠는데?"

두 부부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세 가족의 손발은 정말 딱 그 정도로 잘 맞았다.

그들은 아들이 분말을 타주는 대로 커피를 만들어서 얼리곤 있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잠깐, 그런데 프림하고 설탕은? 그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손님의 취향에 따라서!"

"호오, 설탕에 프림 양까지 조절해 준다고? 좋은 아이디어인데?"

기왕지사 장사를 하는 김에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밖에서 파는 커피에 설탕과 분말우유의 양까지 조절해준다면 아마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까지도 아주 만족해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천우는 이번 장사에서 뭔가 건질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