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른 아침부터 천우네 집에는 미국의 공영방송 CNN이 송출되고 있었다.
천재아들을 둔 최호명은 아버지인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아들의 천재성이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통역사를 통해서 해외 비즈니스를 성사시켰었는데, 이제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서 직접 협상테이블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최호명은 미8군에서 주관하는 AFKN(주한미군방송)의 위성방송서비스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왔는데, 미국 현지에서 방송되는 채널을 실시간으로 위성중개 하는 서비스였다.
일반인에겐 아예 보급도 되지 않는 서비스를 자신의 인맥으로 끌어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보통의 TV에서는 아예 방송되지도 않는 CNN이나 ABC와 같은 미국방송을 끌어와 시청할 수 있었다.
"아들, 뉴스 한다!"
"네! 갈게요!"
천우는 분명 보통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빠를 좋아하고 엄마를 좋아하며 부모와 노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다만 특별한 점이 있다면 뭘 해도 평균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아침에 CNN 뉴스를 보는 것을 즐겼다. 심지어 동시통역이 되는 수준으로 해설까지 해주면서 말이다.
최호명은 그런 아들의 곁에 앉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거의 이명이 들릴 때까지 집중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치솟는 달러화가치로 인하여 미국의 무역수지가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고 상무부는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서 정부는 대응조처방안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달러화절상 불길을 잡기 위한 진화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상무부는 말했습니다.
분명히 영어였다.
허나 천우의 귀에는 이것이 자동적으로 해석되어서 들렸다.
마샤의 AI가 알아서 전 세계의 언어를 습득해서 천우의 머리에 입력시켰고 그것이 결국 천우 스스로의 것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서 최호명은 아까부터 너무나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조금 도와드려야겠군.'
천우는 일부러 달러화 절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질문했다.
"아빠! appreciation이 무슨 뜻이에요? 사전에는 절상이라고 나와 있던데."
"아아, 그런 말이 나왔었나?"
"헤헤, 그런가 봐요."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힘들면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
최호명은 분명 대기업 간부에 흔치않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허나 아들 앞에서는 프라이드 같은 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자신의 단어장에 appreciation을 추가하였다.
그런 후에 절상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무튼 절상, 그건 말이지. 달러화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뜻이야. 천우가 버는 돈, 그건 어느 나라 거지?"
"한국이요!"
"그래, 그런 것처럼 미국에서도 그 나라가 쓰는 돈이 따로 있어. 그 돈들은 서로 가치가 달라. 이를 테면 천우가 한국에서 천원을 벌었다면 미국에서는 1달러를 조금 넘게 번 셈이 되는 거야. 미국에서 천 원짜리처럼 쓰는 1달러가 한국 돈으로는 700원이거든."
"아하! 그럼 미국이 한국보다 가난한 건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화폐가치는 사실 그보다 더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거든."
"음, 그렇구나!"
천우는 아버지가 뉴스를 접하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무역영어에 능하다곤 하지만 결국 회화 자체나 듣는 귀가 트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뉴스를 보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서 천우는 자기가 뉴스기사의 논점을 콕 집어서 질문해주고 그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그 단어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최호명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야, 역시 천우가 천재이긴 하구나. 이 아빠는 몇 마디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천우는 벌써 영어를 꿴 거야?"
"들으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대단해, 역시 대단해!"
최호명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야말로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는 어린 천재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따라 노력하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건 천우를 최고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내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분명 천우는 자기 재능을 1/100도 못 쓰고 죽을 거다. 내가 잘해야 해!'
회사의 업무와 철강회사 매각에 대한 압박으로 머리가 아프지만 오히려 아들과 같이 공부함으로서 힐링이 되는 걸 느낀다.
최호명은 결국 가정이 자신의 중심이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우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힌트를 주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가정적이지 않은 가장, 권위적인 아버지였다면 결코 천우의 힌트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란히 앉아서 CNN을 시청하고 있던 두 부자에게 한희연이 웃으며 다가왔다.
"다들 밥 먹어요. 국 다 식겠어."
"네!"
식탁에 앉은 세 식구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현 듯 한희연이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그나저나 아버님 생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적당한 선물 하나 해가지 뭐."
"저번에는 좋아하시던 자동차를 해드렸지만 반응이 영 시큰둥하셔서···."
"아마 인수실패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아. 그 당시에는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서 팔고 싶다는 야망이 있어서 그랬던 건데, 올해는 아마 괜찮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어?"
최충의는 자동차를 수집하는 수집광이라서 최호명은 매년 외국의 신차나 올드카를 매입해서 선물로 주곤 했었다.
작년에도 1948년식 스포츠카를 선물로 주었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
수집가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물건이었지만 최충의의 당시 심경이 워낙 참담했던 터라 별 반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천우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최충의 회장이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그가 자동차회사 인수실패로 상당히 힘들어 했다는 점.
그렇다는 건 어쩌면 천우가 회장을 그야말로 뿅 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할아버지가 자동차를 좋아하세요?"
"응.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하셨어. 심지어 이 아빠가 태어나기 전부터 말이야."
"차를 많이 좋아하세요?"
"아주, 아주 많이 좋아하시지. 할아버지 댁 지하에 보면 차가 20대도 넘게 있어. 그걸 관리하는 아저씨가 매일 차를 손봐주고 있지."
차를 관리할 관리사까지 따로 두었을 정도로 차를 애정하고 아끼는 사람, 한마디로 그는 마니아라는 소리였다.
얼마나 차를 좋아했으면 그걸 만들어서 팔고 싶어 했을까.
천우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모터로 가는 차를 만들어서 주면 딱이겠군!'
천재라서 좋은 점은 이런 물건을 뚝딱 만들어서 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우는 최호명에게 최충의가 가장 아끼는 차가 뭔지 알아내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요!"
"응? 그건 알아서 뭐하게?"
"그거랑 똑같은 걸 만들어서 선물하려고요."
"하하, 나무로 조각이라도 하려고?"
"비슷해요."
"그래. 그럼 아빠가 사진을 구해서 오늘 밤에 가져다주마."
"네!"
사진만 있다면 자동차를 본뜨는 건 별 것도 아니었다.
그날 저녁, 최호명은 천우에게 정말로 자동차 사진을 가져다주었다.
모델을 눈에 익히자마자 마샤가 검색을 시작했다.
-1938년 이탈리아 A사에서 제작한 루카스447 스포츠입니다. 1991cc 모델이 양산되어 최고의 스포츠카라는 평을 얻었었죠.
'상당히 고전이네.'
-현 세대에겐 고전이지만 최충의 회장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고전이라고 할 수 없을 모델이죠.
'하긴, 그렇겠군.'
-그나저나 이걸로 자동차를 만들 생각이십니까?
'설계도를 찾아낼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아주 오래된 차는 그 설계도가 이미 공개된 지 오래입니다. 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마샤는 인터넷에 떠도는 지식들 중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을 선정해서 자율적으로 설계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차량의 설계도를 만든다고 해서 그걸 축소한 일종의 프라모델을 뚝딱 찍어낼 수는 없었다.
해서 마샤는 자동차를 프라모델로 만들 경우에 필요한 경우의 수를 조합해서 가장 합리적인 설계도면을 만들어냈다.
나무를 깎아서 성형하거나 철판을 망치로 두드려 구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차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압축된 도면이 천우에게 전달되었다.
-대략 160대 1의 사이즈입니다. 아마 제작기간은 일주일쯤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마샤가 제안한 모델은 자석과 코일을 이용해서 굴러가는 전자식 모터 동력장치였다.
원통형 모터의 틀에 한 쌍의 영구자석과 코일을 넣어준 후, 코일에 전력을 공급해서 동력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전기가 흐르는 도선이 자기장에 놓이면 힘을 받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다만 이 크기를 약간 조정해서 무게가 꽤 무거운 프라모델도 충분히 빨리 달릴 수 있도록 조정했다.
또한 차량 안에 들어가는 동력전달장치는 가장 효율적인 배치로 마무리하여 견고함과 내구성을 동시에 갖추었다.
'썩 괜찮은데?'
루카스447은 역대 스포츠카 중 가장 아름다운 모델로 손꼽히곤 하는데, 그걸 잘 조각해서 도색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천우는 유치원이 끝나고 나서부터 나무 조각과 고철 등, 프라모델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으고 다녔다.
그는 토요일이 되었음에도 고물상에 가지 않았다.
"아들, 고물상에 안 갈 거야?"
"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할 일? 그게 뭔데?"
"비밀이에요. 일주일 후에 달려드릴게요."
최호명은 아들이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으나 아들의 동심을 위해 모른 척했다.
"그래, 기대하마."
"헤헤, 재미있는 걸 보여드릴게요. 물론 별건 아니지만요."
"별게 아니라니. 아들이 만든 건데 당연히 특별할 거라고 생각해. 이야,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
"열심히 만들어볼게요!"
천우는 그동안 가져다 팔려고 모아두었던 고철들과 이틀 정도 발품을 팔아서 마련한 재료들로 프라모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조각하고 다듬는 건 화방에서 산 조각칼과 사포로 해결했다.
슥삭, 슥삭!
만약 천우가 평범한 6세의 소년이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작업이다. 우선 근력이 모자라고 집중력이 달리기 때문이었다.
허나 천우는 그야말로 무서운 집중력과 놀라운 근력으로 조각칼을 다루었다.
우선 차체를 제작한 후, 거기에 들어갈 부품들을 따로 제작해서 조립하는 형식을 선택했다.
그런 후에 그 위에 얇게 잘 편 알루미늄을 덧대어 루카스447 특유의 단아한 은색을 표현하기로 했다.
만약 100% 나무로만 제작한다면 도색이 필요하겠지만 알루미늄으로 마무리를 한다면 도색이 전혀 필요 없는 데다 진짜 자동차 같은 질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터였다.
마샤는 그런 아주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감안해서 설계도를 만들었고 천우는 그 안에 자동차 기어와 핸들 등, 디테일을 최대한 풍부하게 표현해냈다.
무려 일주일이라는 제작기간을 거쳐 프라모델이 완성되었다.
동네 어귀에서 사온 4fm 건전지를 장착시킨 후, 자동차를 굴려보았다.
위이이잉!
"오오, 굴러간다!"
대략 시속 12km쯤 될 법한 속도였으나 힘이 워낙 좋아서 언덕까지도 자유자재로 오를 수 있었다.
예정된 성공이었으나 천우는 매우 기뻐했다.
전생의 그는 손재주와는 아예 담을 쌓았던 사람이기에 스스로 이런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살다보니 내가 이런 프라모델을 다 만드네."
-관리만 잘해준다면 꽤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앞으로 외관을 조금 더 보강하고 도색을 통해서 디테일을 조금 더 높여보자고."
이제 이걸 최충의에게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아마 꽤 괜찮은 반응이 있으리라, 그는 그리 생각했다.
허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천우에겐 아주 묵직한 한방이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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