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호명은 계속해서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의 생각이 스쳐서 최호명은 약간 심란해 진 것이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고철 값을 올려서 뭘 어쩌려는 것인가. 최호명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나야, 총괄이사. 내일 아침에 한결 철강 구매팀 소집해서 고철매입단가표 제출하고 국내시세동향 파악해서 보고서 제출하라고 전해줘."
-마침 야근 중입니다. 필요하시다면 팩스로 보내드릴까요?
"그래. 고마워."
천우는 그제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최호명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서 이렇게 작은 가격경쟁현상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작은 물방울 하나가 모이고 모여서 강과 바다를 이룬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전화를 끊곤 천우에게 말했다.
"천우야, 고철은 계속 주울 거지?"
"네! 물론이죠!"
"그래, 팔 때는 항상 아빠랑 같이 가자꾸나."
"좋아요, 아빠 최고!"
"후후, 그래. 장하구나, 내 새끼."
최호명은 그 이후로도 쭉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우 역시 그 곁에서 팩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샤의 정보와 최호명의 생각이 딱 들어맞았을 때, 과연 그 기쁨이 어떨지 구경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저녁 일곱 시.
드디어 팩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출력버튼을 누르니 고철매입단가표와 국내시세동향이 보고서 형식으로 쭈욱 뽑아져 나왔다.
우선 고철매입단가는 최근 들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수도권 및 경기 일부지역에서 5%정도 오른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국내시세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허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5%였다.
만약 수도권에서만 제한적으로 매입을 시작했다면 이정도 오른 금액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재기, 도대체 왜 고철을 사재기 하는 거지?'
최호명은 다시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밤늦게 미안하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최근 철근가격이 얼마나 등락했고 일본의 수출량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 번 알아봐줘."
-미국 쪽도 한 번 살펴볼까요?
"그럼 더 좋지."
전략기획실은 기업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기구다. 그렇기 때문에 사내의 엘리트들이 전부 운집한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천우는 전략기획실의 총괄이사가 움직인다면 조만간 꽤나 괜찮은 떡밥이 딸려 올라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쪽 망을 본다면 당연히 상무부 쪽 움직임을 살피게 되겠지. 후후, 아버지 파이팅입니다!'
***
이른 아침, 현보 그룹 중역회의가 열렸다.
회장 최충의는 사장단과 본사 중역들이 올린 보고서를 받아보곤 낮게 신음하였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인데."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고 있었다.
한 가지는 최근 2개월 사이에 크게 오른 엔화에 대한 방어정책과 미국산 고철 값의 절상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엔화절상은 기업에게 있어선 기회이자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철근이나 강철판 같은 경우엔 엔화절상에 가장 크게 빛을 보는 업종인데, 동북아 2강이라 불리는 한국과 일본은 현재 2대 메이저 시장인 미국과 중동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만약이 이 상태에서 엔화절상이 일어나면 자연적으로 일본산 자재의 값은 오를 것이고 그만큼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철강업계가 미국 상무부나 석유부자들에게 한국산 철제품에 대한 덤핑판정을 종용한다면 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한창 건설붐이 일고 있는 중동에서 그런 조처를 취할 리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철강업계는 엔화절상이 반갑지만 전자업계는 약간 울상이었다.
한국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나이스 은성 그룹이나 칠성 그룹과 같은 회사는 제품군에 대한 부품 전부를 국내에서 수급할 수 있었다.
허나 현보 전자는 전자업계에 뛰어든 지가 불과 15년밖에 되지 않았고 전자회사를 인수했을 때엔 석유파동과 식량파동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어서 기술력 증진에 재화를 쏟지 못했었다.
식량파동으로 인해 간척사업 및 대규모 경작지 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기에 현보 그룹은 건설에 전력투구하던 중이었다.
초반 설비투자와 연구비 투자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현보 전자는 다른 회사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건 다시 말해서 해외의 기술력에 다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현보 그룹은 많은 부분을 일본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기에 엔화절상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여기에 변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미국산 고철 값의 인상이었다.
미국의 고철은 매집에 드는 비용을 미국에서 부담하는 반면, 인도조건에 운송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현지의 가격과 한국 도착가격이 각각 다르다.
현재, 미국산 고철 값은 톤당 70달러에 가격이 맞춰져 있다.
단순히 철 값 만 본다면 톤당 70달러 수준이지만 이것이 국내에 도착하게 되면 110달러가 조금 넘게 된다. 한화로 따지면 이미 미국산 고철은 국내산 고철이 비해 3만 원 쯤 비싼 셈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국내매집고철을 사용하면 그만이겠으나,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국제 철 값이 오르면 국내의 철 값도 오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고철가격이 오르면 철근 값도 오를 것이고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원가도 당연히 올라간다.
이 변수가 철강업계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 전자업계는 한 방에 이중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헌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83년도 현재 악성재고량이 거의 최고점이라는 것이었다.
산업의 고도화는 생산량과 효율성의 증대라는 이점이 있지만 수요가 생산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재고가 쌓여 경제가 침체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건을 아무리 만들어봐야 사는 사람이 없으면 기업은 망하게 되어 있다.
지금 현보가 딱 그런 시점에 직면한 셈이었다.
중역들은 이에 대한 조처로 생산량 15%감산과 판매가격 12% 인하를 주장한 것이었다.
최충의 회장은 조용히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총괄이사."
"예, 회장님."
"이쯤 되면 철강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아직은 엔화절상으로 인한 수혜가 있는 편입니다. 지금의 재고량은 경영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영에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그룹 전체매출과 손자회사의 이익금을 이용한 돌려막기에 불과한 일 아닌가."
"보는 시각에 따라선 그럴지도 모릅니다. 허나 우리가 회사를 매각하는 순간, 한결의 내재가치가 무너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밑에 딸린 하청업체들까지 줄줄이 밥줄이 끊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않나."
최충의 회장은 기업인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화끈하게 기획을 밀어붙이는 성격이지만 반대로 3년 이상 시너지가 발휘되지 않으면 과감히 매입한 회사를 다시 매각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결단력을 가진 만큼 리스크를 감내하는 도박을 즐기지는 않는다.
손해가 나면 팔고 이익이 되면 산다, 아주 단순한 원리이지만 최충의 회장은 그 기본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였다.
허나 최호명은 달랐다.
최호명은 기업의 내재가치를 보고 회사의 비전만 확실하다면 당장 힘이 좀 빠지더라도 계속해서 회사를 손에 쥐고 장려하는 성격이었다.
어느 회사에게나 위기는 있는 법, 그걸 넘길 수 있다 판단한다면 절대 회사를 버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정반대의 성격이 마주치니 항상 마찰이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회장의 결정은 회사의 방침이나 마찬가지다.
최충의가 지시하면 최호명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전략기획의 권한을 부여한 장본인이 최충의였다.
아무리 회장이라도 직접 준 권력을 거두어들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권력의 회수에는 응당 명분이 있어야 할 터, 최충의는 그 명분을 부여하기로 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가 언제까지 회사의 경영을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 말해보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줄 테니까."
"스스로 기한을 정해도 좋단 말입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아들이자 총괄이사가 자신 스스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간을 정하게 만든 후,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회사를 나가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최호명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앞으로 3년, 그 안에 경영의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제가 해당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짊어지겠습니다."
"좋아, 3년. 앞으로 3년만 더 지켜볼 테니 회사 매각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단, 성과가 없을 시엔 가차 없다. 다시는 이 회사에 발붙일 생각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최호명이 이토록 코너에 몰리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가 바로 한결 철강을 인수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한결 철강의 모회사인 한결 제과는 3년 전, 제과제빵 회사에서 돌연 철강업으로 엉뚱하게 사업분야를 확장하는 바람에 현금의 흐름이 막혀 답보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이는 2세대에서 3세대로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생긴 오류였고 최근 달러화의 절상으로 인한 외채부담으로 인해 한결 제과는 법정관리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 이후, 철강업계에 슬슬 진출할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현보가 한결 제과 전체를 인수하여 합병하게 된 것이었다.
합병 당시만 해도 제법 시너지가 생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악성재고 및 자금순환이상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철강의 자금회전이 막힌 지금에도 한결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제과제빵이 활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강으로 지주회사 전환이 진행되었던 한결은 엉뚱하게도 이제는 자회사가 모회사를 먹여 살리는 구도로 변경된 셈이었다.
만약 철강 회사를 매각한다면 최호명은 어차피 총괄이사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건 다시 말해서 좌천을 의미하는 일, 그는 차라리 그럴 바엔 회사를 나가서 와신상담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허나 그에게도 한 장의 카드는 있었다.
'뭔가 있다.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조금 더 시간을 들인다면 나도 한 방 크게 칠 수 있다···!'
최호명은 코너에 몰려 두들겨 맞고 있는 형국이었으나 강력한 한방이 남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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