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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하락 정책이라.'
-한국은 거의 20년 동안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과 같은 경우엔 수지악화도 문제이지만 고물가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해서, 그에 대한 방어대책으로 평년대비 12~20% 정도의 물가하락이 있을 겁니다. 통화량이 많아짐에 따라서 긴축정책을 쓸 것이고 그것이 물가하락과 맞물려 투자수익이 좋아지겠죠. 다만 채권수익은 낮아서 채권으론 딱히 재미를 못 볼 겁니다.
'으음, 그렇겠군.'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천우는 그 해답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장사를 할래요!"
"장사? 하하, 아들! 장사가 뭔지 알고나 있는 거야?"
"물론이죠! 물건을 만들어 파는 거잖아요."
"오호? 이놈이 제법 머리가 트였는데?"
최호명은 아들이 너무 기특해서 입이 귀에 걸리고 말았다.
이 세상의 어떤 아들이 여섯 살에 벌써부터 장사를 한다고 돈을 모은다고 하겠는가.
그는 아들이 대견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하하, 이것 참! 우리 아들이 벌써부터 장사를 한다네? 그럼 이 아빠가 투자를 조금 해볼까?"
"투자요?"
"으음, 뭐랄까. 천우가 장사를 하는데 아빠가 돈을 보테 주는 거야."
천우는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배웠고 회계사를 준비하면서 경제학도 꽤나 깊이 공부했었기 때문에 투자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여섯 살 아이가 아버지에게 경영간섭을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천우야, 이 세상에는 장사를 하는데도 돈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금을 하기도 하지. 하지만 장사에 필요한 돈을 남에게서 받아 가게를 차릴 수도 있어. 모자란 만큼 투자를 받아서 가게를 차리는 거지."
"돈을 빌리는 건가요?"
"빌린다는 개념은 아니고 네가 장사를 해서 버는 돈의 일정부분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돈을 주는 거야."
"그러니까, 가게를 열 개로 나눈다면 그 중에서 세 개 정도는 아빠가 가지고 있는 셈이네요."
"정확해! 우리 아들이 머리가 좋은데?"
"그럼 아빠 회사도 그렇게 장사를 했어요?"
"대부분의 기업은 투자를 받아. 안 그런 기업도 있겠지만 주식이라는 걸 발행하는데, 이게 바로 투자의 개념인 거야."
천우는 일부러 약간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호명은 아까 천우가 말했었던 조각을 예로 들었다.
"그래, 옳지! 아까 네가 말했지? 아빠가 돈을 투자한다는 것이 열 개의 조각 중에 세 개를 아빠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
"네, 그랬어요."
"그 조각들이 바로 주식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거야."
주식이라는 말이 나왔다.
최호명이 경제위기에 대한 긴박감을 느낀다면 당연히 어딘가로 투자를 하려 들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투자건 회사의 공적인 투자건 간에 말이다.
'마샤, 앞으로 어떤 쪽으로 투자를 하면 좋겠어? 사실 나는 상품 쪽에 투자하는 것이 좋겠는데. 아니면 원자재라던지.'
-정답입니다. 떨어진 지금이 투자에는 적격이라 할 수 있죠. 고철 값이 비싸봤자 앞으로 오를 가격에 비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잘 알지.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본다면 리스크가 적어야 투자를 감행할 것 아니야.'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쪽으로 유도하십시오. 상품과 원자재, 그리고 일본의 부동산 쪽으로 말입니다.
'아아, 일본의 부동산! 그러고 보니···!'
84년에만 투자해서 90년도까지만 가지고 있어도 그야말로 대박이다.
천우의 목적은 이제부터 아버지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자신도 성장할 테니 일석이조였다.
"주식이 뭔지 이해했어요! 헤헤, 그럼 저도 언젠간 돈을 모아서 주식을 살게요!"
"하하, 그래! 우리 아들도 주주노릇 한 번 해봐야지. 그래야 세상을 빨리 배울 테니까."
부자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고물상에 도착했다.
천우를 바닥에 내려놓은 최호명은 수레에서 고철을 내려서 전자저울 위에 올려두었다.
고물상 주인은 저울에 있는 숫자를 확인시켜주었다.
"70kg입니다. 보이시죠? 요즘 고철가격이 kg당 51원정도 하니까 3570원 되겠습니다."
천우는 일부러 약간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다.
"···히잉, 고생해서 모았는데."
"하하···."
누가 뭐래도 천우는 여섯 살이고 아이처럼 보여야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허나 최호명은 달랐다.
"kg당 51원이라고요?"
"시세가 그래요. 만약 계속 고철 가져다주실 거면 15% 더 쳐 드릴게요."
"15%라."
"3990원 되겠네요. 오늘 첫 거래이니까 4000원 쳐 드릴게요. 파실 거면 놓고 가시고 아니면 다른 가게 알아보시던가요."
생각보다 고철가격이 높아서 최호명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철강 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집단의 기획총괄이사인 최호명이야말로 고철 시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이 머리에 총을 맞았나. 가뜩이나 고철 값이 이렇게 비싼데 15%나 더 쳐주겠다고?'
고철 값이 인상되었다곤 해도 그게 기업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수지가 많이 남아서 물건을 만들면 어지간해선 흑자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15% 웃돈을 주며 철을 구매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평년에 비해서 많이 올랐는데 웃돈까지 주면 도대체 뭐가 남는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허나 최호명은 여기까지 오는데 기대했을 아들 생각에 일단 철은 팔기로 했다.
"뭐, 좋습니다. 우리 아들이 취미로 고철을 수집하고 있으니 적어도 2주에 한 번씩은 올 겁니다. 그러니 4000원에 쳐 주시면 계속 오겠습니다."
"그래요. 놓고 가세요. 대신 15% 웃돈은 비밀입니다. 약속 반드시 지켜주세요."
고물상 주인은 최호명에게 4000원을 현금으로 주었다. 헌데 돈을 받는 최호명의 표정이 약간 오묘해졌다.
천우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포착했다.
'아무리 동네 고물상이라지만 15%나 돈을 더 주고 고철을 매입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겠지. 그것도 수입 고철도 아니고 국산 고철인데 말이야.'
최근 철강업계는 고철사용량의 대략 50%정도를 미국에서 조달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그 가격이 최근 2개월 만에 50달러 수준에서 70달러 수준까지 올라갔다.
국내수집고철을 사용하기 꺼려하는 업계의 특성 때문에 국내도착가격이 톤 당 3만 원쯤 더 비싸더라도 업계는 수입산 고철을 선호했다.
해서 상대적으로 한국산 고철은 약간 평가절하가 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산 고철을 선호하곤 했다.
그런데 굳이 15%나 돈을 더 주고 고철을 사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 남는 것도 없는 장사를 하는 저들에게 의구심이 생기겠지. 그나저나 신화고철이 진짜로 15% 더 웃돈을 주고 있을 줄이야.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놀랍군 그래.'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초대형 자원상회도 고철을 비싸게 사가는 사람이 끝까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다면 절대 15% 비싸게 철을 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헌데도 저들은 소시민이 취미로 주워 가져다주는 고철까지 15% 얹어서 사주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법 주머니가 두둑한 어떤 놈이 대량의 재화를 풀어서 수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보 그룹 계열사 한결 철강 역시 고철을 매입하긴 한다.
허나 최근 과잉생산과 고철 값 인상으로 하나 둘 거래처를 정리하려는 분위기인데 어째 이곳은 그와 정 반대였다.
'뭔가 있어. 조금 더 파보자.'
최호명은 천우를 수레에 싣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네나 한 바퀴 돌까?"
"네, 좋아요!"
"그리고 이거, 받아라."
그는 천우에게 4천원을 건네주었다.
돈을 받은 천우는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와아, 신난다! 4천원이다!"
"녀석! 그렇게도 좋냐?"
"좋죠! 이건 내 돈이잖아요. 이걸 차곡차곡 모아서 장사를 시작하면 아빠 회사의 지분도 살 수 있을 거잖아요."
"후후, 이놈이 야망이 꽤 크잖아? 아빠네 회사 주식은 비싼데?"
"그만큼 모으면 되죠?"
"하하! 그래, 아주 바짝 모아라! 미래의 주주님을 수레에 태우고 다니니, 이것 참 영광인데?"
"헤헤, 기분 좋네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출발한 수례가 동네에 있는 고물상을 차례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그날의 시세는 단가표에 나와 있기 때문에 굳이 물어볼 필요까진 없었다.
허나 웃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호명은 천우를 데리고 다른 고물상 세 곳을 들어가 웃돈에 대해 물었다.
"우리가 일주일에 30톤 정도 고철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혹시 15% 더 얹어주실 수 있습니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고철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15%나 더 쳐줘요?"
아까 마지막으로 15% 웃돈을 얹어준 것을 비밀로 해달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천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수레에 타 있었지만 최호명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느끼는 바가 있겠지. 아버지는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지도 모를 천우였다.
***
리어카에 천우를 태운 최호명은 계속해서 동네 전체를 쭉 훑었다.
철 값이 어떻게 움직이고 그걸 15% 웃돈을 주고 매입하는 사람이 더 있나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동안 천우는 이 동네 전체를 샅샅이 살폈다.
이 동네 외곽에는 방직공장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가방, 신발 공장 등이 위치해 있었다.
또한 서울시내로 보내는 원료를 보내는 식자재 유통업자들이 산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가상승에 가장 민감한 사람, 바로 요식업자, 혹은 식음료 사업자였다.
천우는 이 입지를 이용해서 커피장사를 해보기로 했다.
'물가하락을 직접 체감하면서 무역수지의 적자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고찰을 조금이라도 해본다면 뭔가 하나쯤은 건질 수 있을 거야.'
그런 후, 집으로 돌아온 최호명은 전화번호부에서 옆 동네 자원회사나 고물상들의 전화번호를 뒤져서 차례대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천우는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는 전형적인 또래의 아들마냥 옆에 착 붙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얍얍, 받아라! 전기주먹이다!"
"으윽, 죽었다···."
최호명은 통화대기를 하는 동안에는 천우와 놀아주다가 전화를 받으면 즉각 철 값이 어떤지 물었다.
그렇게 30군데 전화를 돌려보니 적어도 두 곳은 프리미엄 얘기를 했다.
-···비밀은 엄수해주세요. 그래야 우리도 먹고 살 것 아닙니까.
"물론이죠.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합시다."
최호명은 전화를 끊으면서 약간 찝찝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국내수집 고철 값이 반짝 크게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불과 1년 전이었다.
당시 미국산 고철의 가격은 톤 당 50달러 선, 그에 반해서 국내수집고철은 8만원을 웃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산 고철가격은 계속해서 올랐다.
톤당 3만원부터 시작해 끝도 없는 가격경쟁이 과열양상을 일으켜 고철업계에선 다소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한국산 고철가격이 미국산 고철가격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상현상이었다.
상식적으로 수요가 더 많은 미국산고철보다 한국산고철이 더 많이 오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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