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선 화수는 거울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은 분명 51살의 중년이었는데 거울 속에는 이제 예닐곱쯤 되는 소년이 들어 있었다.
과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제기랄, 회귀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천우라는 이 소년으로 생활한 지도 벌써 삼일이 지났건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인간이 회귀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던가.
-고성능 AI로봇 마샤가 전해드립니다. 현재 시간 8시 31분, 1983년 4월 14일 오늘의 날씨는 계속 흐림입니다.
"이상하단 말이지···. 소설 속 주인공처럼 회귀를 했다고 치자. 그런데 나노로봇은 도대체 어떻게 이식이 된 채로 회귀를 할 수 있냐고."
화수가 죽을 무렵, 세간은 AI나노로봇 '마샤'의 이식을 놓고 엄청난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마샤는 인간의 대뇌에 이식되어 점차 뇌하수체 전체를 잠식해 나가, 종국엔 인간을 완벽한 존재로 재탄생시킨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막상 마샤를 이식받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은 전부 뇌하수체 병변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샤가 뇌하수체를 장악하는 것까진 순조로웠지만 결국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부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 전체가 썩어 아주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
나노입자 상태로 대뇌 안에 직접 침투한 마샤는 스스로 인터넷과 연결하여 지식을 쌓고 스스로를 끝도 없이 진화시키며 인간의 뇌 100%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 기대만큼 마샤의 성능은 좋았지만, 결국 신체가 그것을 버티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원자 100명은 전원 사망, 그 이후에 불법으로 실험 참가자를 구해서 이식을 받은 사람이 바로 화수였다.
한마디로 화수가 유일한 생존자라는 소리였다.
화수는 그런 마샤가 혹시 고장이 난 건 아닌가 싶었다.
"이봐, 마샤. 너 약간 맛탱이 간 거 아니야? 어떻게 지금이 1983년일 수가 있어. 2030년에서 무려 47년이나 시간이 역행했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야."
-AI마샤의 자가진단을 시작하겠습니다. 진단에는 약 15초 정도 소요될 예정이니 소요시간동안 되도록 말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젠장. 또 그 소리네."
벌써 3일 째 마샤가 자가진단을 시작하고 끝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샤도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애석하게도 오로지 화수를 위해 만들어진 나노 AI였다.
결국 자아만 있을 뿐이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다.
-AI마샤의 진단결과입니다. 메인 CPU 정상, 내외장 저장장치 정상, 메모리장치 정상, 전자신경회로 정상, 인터넷 연결회로 정상··· 각종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아···. 그럼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건데?"
-AI연구소에서는 인간의 뇌가 정지될 경우, 전자회로가 뇌를 대신할 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를 내기도 했었습니다만, 사실 그건 인간의 뇌에 있던 기억을 일종의 저장장치로 옮겨서 끝도 없이 꿈을 꾸도록 해주는 이상 업로드 현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럼 내가 꿈을 꾸고 있단 소리야?"
-아쉽지만 그건 아닙니다. 3일 동안 주인님의 신경회로를 통하여 통각 및 촉각, 후각, 미각 등을 동원해서 판별해 본 결과, 지금의 이곳은 현실이고 뇌의 활동도 지극히 정상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흐음.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도 다 있나. 세상에 그런 일도 있어?"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입니다. 상대성이론을 근거로 한다면 그 어떤 가설도 성립될 수 있습니다. 무한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한 결 편해지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로봇이 인생 2회차 쯤 되는 사람처럼 얘기를 하네."
마샤는 분명 로봇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사람처럼 말해서 가끔은 주인이자 숙주인 화수조차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아무튼 마샤의 말대로라면 화수는 완벽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환생.
천우는 화수가 살아온 인생과는 정반대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재벌 3세로 태어나서 조부와 부친이 이룩해놓은 거대재벌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자기 노력이 없이도 슈퍼카에 풀빌라를 거의 무한대로 소요할 수 있으며 호화 요트에서 선상파티를 벌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고작 6세의 나이에 말이다.
그에 반해 화수는 1985년부터 이어졌던 엔화절상의 여파로 방직공업을 영위했던 집안이 1992년에 망해버린 케이스였다.
두 사람은 아예 태생부터가 아예 다르다는 소리였다.
다만 화수는 전형적인 노력파였음으로 그나마 고꾸라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자면 이러했다.
화수는 집안이 망하기 전부터 철이 일찍 들었었다.
학교가 끝나면 공장 일을 돕고 밤에는 미친 듯이 공부해서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독종이라고 말이다.
화수는 원래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허나 인생이 밑바닥을 찍으면서 이제 그에겐 사법고시 말곤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진로를 법학으로 바꾸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그는 여기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IMF금융위기 시절, 화수네 집은 그나마 남은 기계들로 방직물을 만들어 팔았는데 1998년에 사업이 완전 망하면서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게 된다.
그 바람에 원래 우울증이 심했던 어머니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었고 아버지는 원양어선이 좌초되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천우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다가 귀인이자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
바로 미래의 아내이자 대학시절 여자 친구였던 미희였다.
20살에 만난 미희는 대기업 천호 그룹의 둘째딸이었는데, 그녀는 화수에게 경제, 경영과 관련된 학문을 배우라고 조언해주었다.
'네 머리와 노력이면 사회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다만,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 회장님들 구미를 자극할 수 있는 학문을 갈고 닦아봐. 최소한 돈이 명함이고 돈이 힘인 이 사회에서 매장당할 일은 없을 거야.'
화수는 미희의 조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독하게 공부했다. 천하의 공부벌레들이 모이는 한국대학교에서도 그는 독종이라고 불렸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단과대와 단과대 간의 복수전공이 허용된 시점부터 미친 듯이 경영학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경영대학까지 점령해버렸다.
주변에서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사법고시 패스에 CPA 취득 후, 대형 회계법인에서 스카우트 제안까지 와서 과연 어느 쪽으로 진로를 경정해야 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그를 대기업에서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사법연수원을 나와서 대기업의 세무, 회계, 세법 관련 전문 변호사로 전향한 그는 미희의 본가 천호 그룹에 들어가 바야흐로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허나 그의 전성기는 영원할 수가 없었다.
미희와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잘 살며 천호 그룹의 비호를 받던 그는 2015년 국정농단사태에 휘말려 천호 그룹에게 토사구팽을 당하고 만다.
당시 회계법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던 화수는 대통령 국정농단에 천호 그룹이 연관되었다는 의혹이 터지자마자 비서실에 의해 이중장부를 모두 공개당하는 대참사를 겪게 되었다.
이 참사로 인해 화수는 징역 5년을 받아 복역하였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엔 친권이고 양육권이고 전부 빼앗긴 채, 빈털터리가 되어 거리에 나앉고 말았다.
이미 그는 언론에 의해 매장된 정경유착의 하수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후회했다.
'···뛰어봤자 벼룩이구나. 난 절대 저놈들 발끝도 핥을 수 없는 존재였구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리 자신을 갈고 닦아봤자 태생은 바뀌지 않았다.
만약 화수가 조금 더 뛰어났다면 몰라도 그에겐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이다.
그렇게 대기업에게 잘 요리되어 인생 망조를 걸은 화수가 어처구니없게도 재벌 3세로 다시 태어났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극과 극, 너무나도 다른 인생이 아니던가.
허나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었다.
환생, 이 세상에 환생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화수, 아니 이제는 천우가 된 그는 다짐했다.
"이제 더는 짓밟히고 살지 않겠다!"
인생의 전환점, 천우는 환생을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홀로 스스로를 다잡고 있던 천우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
"천우야, 아빠 나가실 때 같이 나가야지. 오늘은 버스가 안 오는 날이잖니."
현생의 어머니, 한희연이었다.
천우는 속으로 경탄을 쏟아냈다.
'천사다. 진짜 천사야.'
앞치마를 두른 늘씬한 몸매의 미녀, 잠깐 TV에 나오다 말았지만 한 때는 CF업계를 휩쓸었던 미스 로호떼 출신 연기자 한희연이었다.
아마 이 즈음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청춘스타 한희연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 그 마음을 말이다.
칼을 대지 않은 쌍꺼풀 짙은 눈, 그리고 오뚝한 콧날, 게다가 두툼한 입술까지.
한희연은 어디를 가든 빛이 나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천우를 갖고 나서부터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다시 태어났다.
천우가 태어나면서 그녀 역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그런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앞치마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거구의 남자, 작고 거칠게 찢어진 눈이 인상적인 그는 천우의 아버지이자 현보 그룹의 기획총괄이사 최호명이었다.
최호명은 다정다감한 남편, 자상한 아버지, 특수전사령부 부사관 출신의 강인한 남성이었다.
회사에서는 강직한 총괄이사, 뛰어난 비즈니스맨으로 유명했고 뉴욕 타임즈에도 몇 번인가 이름이 올라왔었다.
천우와 화수, 두 사람의 기억을 모두 털어 봐도 최호명은 상당히 멋진 사나이였다.
"아들, 어서 옷 입고 나와. 아빠가 장조림 졸여놨으니까 든든하게 먹고 나가자. 남자는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이거든."
"네, 알겠어요."
두 부부는 아들을 깨우러 온 그 잠깐 사이에도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서로 말은 별로 없지만 부부금실은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
최호명은 당대 최고의 애처가였고 한희연은 현모양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완벽한 부모님이다. 이런 사람들 슬하에서 못난 놈이 나와선 안 되겠지. 다만 걸리는 것이 있긴 하지만···.'
최호명은 한희연과 결혼하면서 잃은 것이 많았다.
당시의 연예인은 대기업 총수들에겐 그저 딴따라에 불과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비유한다면 조선시대 양반이 기생을 정실로 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더군다나 최호명은 한희연과 연애하기 전부터 이미 정략혼처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조의창의 딸 조홍희였다.
조의창이 누구인가
현 정치구도의 정점, 여의도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실세가 바로 조의창이었다.
그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기업이 수두룩했다. 그러니 대선이며 총선 때마다 국세청, 산자부, 심지어는 안기부까지 들먹여 대기업 뺑을 뜯어대도 누가 하나 할 말이 없었다.
그게 바로 조의창이라는 사람의 힘이었다.
그런 조의창의 혼담을 벌로 뻥 차버렸으니 최호명이 아버지 최충의에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충의는 장남 최호명이 최고의 인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나 사랑이 야망을 짓누르는 그런 인물은 등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여 그의 둘째 아들인 최희명이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그가 조의창의 딸 조홍희와 결혼하면서 엄청난 세력을 등에 업게 되었다.
'아마 나는 최충의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정략혼을 발로 차버린 놈의 자식이 예쁠 리가 없을 테니.'
천우가 다시 한 번 전생의 고통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일단 그의 부친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았다. 이미 세상 모든 지식을 가진 천우라면 충분히 부친을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한 위치에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는 동안 천우는 충실히 자신의 기반을 닦아서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85년도 플라자 합의가 일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허나 그걸 이용할 정도로 깊이가 깊지는 않았다.
'마샤, 플라자 합의 직전에 어떤 징후들이 있었지?'
-AI마샤의 검색기능을 사용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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