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302화- 마른 땅에도 싹은 튼다(4)
“왔어요?”
“왔다!”
민성은 그의 품에 안긴 티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선생을 찾으러 가선 어딜 그리 돌아다닌 건지. 녀석이 너무 자리를 비운 탓에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돌아오거든 한소리 하려 했지만 잘 돌아왔으니 봐주기로 했다.
“그래서 선생이라는 분은 찾았어요?”
잠시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해후를 나누다 민성은 넌지시 질문했다.
“…찾긴 찾았다.”
“오! 잘됐….”
민성은 찾았단 말에 축하해 주려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을 보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티노는 쓰레기장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녀석은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러니까 감격적인 해후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웬 난봉꾼이 나타난 덕에 쫓겨났다는 거네요?”
하지만 민성이 당시의 상황을 압축시켜 버리자, 티노는 뚱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인간. 나랑 같이 선생을 찾으러 가 줬으면 좋겠다.”
“네?”
갑작스러운 티노의 부탁에 민성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설명으로 미루어 보건대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그와는 접점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찾는 데 힘을 빼는 건 시간 낭비, 기력 낭비였다.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자니 녀석의 풀 죽은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선생은 살아 있을 거다. 어떻게든 살아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지만 혼자만으론 역부족이다. 내 힘만으로는 사계의 문을 열 수 없었다.”
“사계의 문이요?”
티노의 말에 민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뭐야. 보물 창고 열쇠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쓰레기장 문 열쇠였어?’
쓰레기장에서 해후를 나누던 티노가 사계의 문에서 나왔다면, 아마 사계의 문은 쓰레기장의 문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망할 땡중. 뭐가 엄청난 물건이야. 쓰레기잖아?”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없는 혜정 대사를 욕했다. 과거, 혜정이 중요한 비보라도 되는 듯 취급했기에 엄청난 물건인 줄 알았다.
“정말이에요?”
“그곳에 있던 인간들이 그렇게 말했다.”
티노는 쐐기를 박듯 확신에 차 거듭 긍정했다. 그 모습에 민성은 멋쩍은 웃음만을 지었다.
“어쨌든, 인간… 부탁이다. 제발 선생을 도와줘라.”
“뭐, 저도 도와드리고 싶긴 한데. 그렇게 대단하신 분도 어떻게 못 한 걸 제가 어떻게 해요.”
다 떠나 선생을 겁박하던 난봉꾼은 둘째 치더라도 사계의 문이 있는 중국으로 가는 것도 난관이었다. 하늘도, 배도 막힌 탓에 비행편도 없으니 결국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을 도와주면 앞으로 인간이 시키는 건 다 하겠다. 버섯도 더 잘 찾아내겠다. 말도 잘 듣겠다. 그러니깐….”
티노가 끝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내자, 민성은 괜스레 마음 약해져 고개를 돌렸다.
“아, 좀! 알겠으니까 그만 좀 울어요.”
“정말인가? 정말로 같이 가 줄 건가?”
민성의 승낙에 신이 난 티노는 그의 옷을 물어 잡아당겼다.
“거참. 속고만 사셨나.”
“그럼 당장 가자!”
“앞으로 참을성도 길러요.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민성은 툴툴대면서도 장사판을 접었다.
“나중에 배로 받아 낼 거니까 아까 한 말이나 잊지 마요.”
그리곤 티노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다음 날.
민성이 찾아간 곳은 깨끗하고 번듯한 연구소 단지 같은 곳이었다. 아직 시공이 끝나지 않았는지 간간이 굴삭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건 또 언제 만들고 있었대? 아.’
그러고 보니 언론에서 행정 중심 복합 도시의 기틀을 닦겠다고 한창 떠든 적이 있었다. 아마 그 결과물인 듯했다.
“가만있자….”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민성은 안내 지도를 발견하곤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이능력자 대책부라는 이름이 적힌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
민성이 안내 지도를 살피던 그때, 연구소 인근 지역에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젠장. 이게 뭔 개짓거리야.”
연구소 인근에 도착하고서야 우철을 툴툴거리며 백호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뒤따라 내리는 남자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 그래도 돌아가시는 길은 쾌적하게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닥쳐! 애초에 네놈이 능력을 속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늦지는 않았어!”
선비처럼 가느다란 남자는 애써 밝게 웃으며 우철을 다독였다. 그러나 되레 우철의 호통만 날아왔다.
“죄송합니다. 부디 교단에는 비밀로….”
“흥. 돌아가면 바로 보고할 거니까 목이나 씻어 둬.”
교단에서 나온 이동 능력자의 애원에도 우철은 콧방귀만 꼈다. 애초에 저놈 탓에 모든 일정이 어그러져 버렸다. 한 번 방문한 곳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뒤늦은 고백에 결국 그들은 대륙을 횡단해야만 했었다. 아무리 단련된 무인들이라 하더라도 긴 시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일정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괴수들까지 맞닥뜨린 탓에 피로가 더 가중되었다. 그나마도 펫과 스킬이 없었다면 아마 일정은 몇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됐다. 그쯤 해 둬라.”
“백야 님!”
어딘가 지쳐 보이는 소년의 제지에 우철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어긋난 일정은 다시 되돌리면 된다. 그놈만 찾아 던전에 가두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다. 이종범이라고 했었나?”
“맞아요. 그놈 몸에 심어 놓은 고독이 꿈틀대는 걸 봐선 놈도 옆에 있는 게 확실해요.”
백야의 물음에 옆에 있던 자하는 피로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화장은 먼지바람에 덮여 볼썽사납기까지 했다. 몸에선 썩은 쓰레기 냄새가 올라왔다. 사실 열쇠고 나발이고 그저 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반드시 열쇠를 손에 넣는다.”
“예, 백야 님.”
소년이 먼저 백호의 등에 올라타자, 수하들도 지친 기색을 숨기곤 따라 올라탔다. 백호는 우철이 명령한 대로 목적지를 향해 맹렬하게 질주했다.
*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한편 민성은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능력자 대책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종범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관님. 오늘 일정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과 바삐 건물에서 나오는 이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혜정 대사가 함께 걸으며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민성은 입꼬리를 올리고 천천히 접근했다. 그러자 곧바로 남자들이 민성을 제지했다.
“한동안 인터뷰는 거절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디 기자십니까?”
“일반인입니다.”
민성의 말에 남자들은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곧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돌아가세요.”
“장난해? 누가 들여보냈어!”
남자들은 차분하게 민성을 돌려보내고자 했다. 누구는 무전기에 대고 버럭 소리치기도 했다.
“이 얼간이 새끼들이….”
이종범은 남자들의 머리를 후려치곤 옆으로 밀쳐냈다. 영문도 모르고 맞은 남자들은 머리를 감싼 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참으로 오랜만이네.”
“대사도 안녕하셨습니까?”
민성이 혜정과 인사 나누는 사이, 남자들을 갈구고 돌아온 이종범은 겸연쩍게 사과했다.
“신입들이다. 이해해라.”
“오랜만입니다, 이 부장님. 아니, 이제 이 장관님이시지.”
민성의 능글거림에 이종범은 잘 보이지 않던 미소를 흘렸다.
“정말 축하해 주러 온 거라면 보상을 물리는 건 어떤가?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은데.”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거 받으러 여기까지 온 건데.”
사계의 문을 찾아 중국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대한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음….”
그에 이종범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호쾌하게 승낙하셨을 때와 달리 각하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 뭐 이런 건 아니지?”
“단언컨대 결코 그럴 생각은 없다.”
민성의 얼굴에 미세한 살기가 맴돌자, 이종범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하는 건가?”
일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혜정이 넌지시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민성의 봇짐에 관심을 보였다.
“잠시 중국으로 갈 일이 생겨서요.”
“호오. 길이 꽤 험준할 터인데. 혹 이제 와 검마 그 늙다리의 부름에 넘어간 건 아니리라 믿네.”
혜정은 짐짓 놀란 듯 하얀 눈썹을 씰룩이며 민성의 눈을 응시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만 있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거 참으로 다행이네. 국가의 보배를 훔쳐 간다니 안 될 말이지, 암!”
혜정은 민성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한참을 껄껄대더니 게슴츠레하게 눈 떴다.
“이제 내년이면 소미도 18살을 맞는데. 어떤가? 옛날에 18살이었으면 한참 혼처를 알아볼 나이니까 말일세, 커흠….”
“네?”
민성은 갑자기 이 땡중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던지나 싶었다.
“커험, 나는 자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유 있을 때 놀러 오시게. 자, 노승은 비킬 터이니 편하게들 이야기 나누시게.”
민성의 반응이 시원찮자, 혜정은 헛기침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어쨌든 아직 각하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생각엔 미처 준비를 다 못 하신 모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
다시 민성의 냉랭한 시선을 마주한 이종범은 그가 해 왔던 노력을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괜히 혀 잘못 놀려 민성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상사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럼 중국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구해 놔. 할 수 있지?”
민성은 됐다는 듯 심드렁하게 손짓했다. 대비책은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민성은 이종범이 채 답하기도 전에 아이템 창에서 커다란 화폭을 꺼냈다. 안에는 아름다운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호오.”
물러나 있던 혜정이 화폭을 보곤 넌지시 다가와 용도를 물었다. 갑자기 그림 자랑이나 하고자 꺼낸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화폭에 그려진 그림과 가장 비슷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티노의 설명을 토대로 사계의 문이 있었다는 장소를 최대한 비슷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신의 무료 배식소에서 찾아낸 여러 화가들이 수고해 줬다. 대신 그림값으로 감자 포대를 주니 만족해했다.
“굉장한 물건이군.”
“생각보다 흔한 물건입니다.”
혜정의 감탄에 민성은 화폭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민성의 몸이 수영장에 잠긴 것처럼 반쯤 잠겼다.
“필요하다면 병력을 붙여 주겠다.”
“토벌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쉬라고 그래.”
이종범의 제의를 거절한 민성은 혜정에게도 간단히 인사하곤 화폭에 마저 몸을 담그려 했다. 그때,
크아앙-
저 멀리서 하얀 호랑이가 포효하며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멈춰!”
군인들과 요원들이 제지해 보려 했지만 외려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저놈들은….”
머리만 남겨 놓은 민성은 백호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열쇠를 노리고 습격했던 놈들인 게 기억났다.
‘열쇠를 노리고 온 건가.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쓰레기장에 관심이 많은 거야?’
아마 아직도 보물 창고의 열쇠라 생각하고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쓰레기 같은 옛 정보에 휘둘리는 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대해야 하나….”
“쯧쯧. 아직도 저런 놈들이 날뛰고 있을 줄은 몰랐건만.”
민성이 화폭에서 몸을 끄집어내려는 찰나, 갑자기 혜정이 민성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말고 편히 다녀오게. 연차를 냈으면 끝날 때까진 편히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걸릴 것도 없으니 내가 처리하겠네.”
그리곤 상냥한 말과 함께 민성의 머리를 눌렀다. 그 덕에 민성의 머리마저 화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깐! 잠깐만! 잠깐 멈춰! 멈추라고!”
본능적으로 마음을 간질이는 불길함을 느낀 백야는 이성을 잃고 민성을 불러 댔다.
사실 그 역시 강행군에 가까운 대륙 횡단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저 수하에게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로지 민성에게서 열쇠를 갈취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지금 그 목적이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한다.
“백야 님….”
“기다려 보라고 이 새끼야!”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 지르는 소년의 모습에서 더 이상 기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혜정은 그들의 목소리 따위 아랑곳 않고 민성의 머리 끝자락에 크게 소리쳤다.
“다시 말하지만 소미는 곧 18살이네. 옛날이었으면 성인이라네!”
‘저 미친 땡중이….’
그리곤 혜정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민성은 몸이 어디론가 이동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