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
301화- 마른 땅에도 싹은 튼다(3)
‘얼마나 받으려나.’
식량이 귀하다 했으니 적어도 한 포대에 500코인 정도 받으면 적당할 것 같았다. 물론 수요에 따라 가격도 바뀔 터였지만 일단 대략적인 시장가를 측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악덕 상인처럼 남겨 먹을 생각은 없었다. 먹을 걸로 장난질하는 것만큼 쓰레기 짓도 없었으니까.
‘일단 대략적인 시장가만 파악하고 다음부턴 신이랑 아루에게 직접 판매하게 하자.’
민성이 물건들을 나열하는 와중, 때마침 타워 문에서 빛이 나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장사하긴 아주 제격인 상황이었다.
“하급 회복 포션이군요. 여기 보상입니다.”
“전보다 양이 줄어든 것 같은데요.”
“그땐 코인을 갖고 오셨으니까요. 랜덤 박스를 여는 건 자유지만 나오는 것에 따라 지급하는 식량의 양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아셔야죠.”
하지만 민성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이 향한 곳은 다수의 군인들이 대기 중인 대형 창고 앞이었다. 그들은 타워서 얻은 아이템 등을 들고 줄을 섰다. 그리곤 식량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머니와 아이템을 교환해 갔다.
‘멀쩡한 걸 가져올 걸 그랬나?’
“와, 자기야! 저것 봐! 검이 자기 몸만 해!”
민성은 교환처를 보며 뭉개진 감자를 만지작거리던 와중, 예쁘장하게 화장한 여인이 민성의 대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여인을 옆에 끼고 있던 남자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민성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생긴 건 좀 그래도 맛은 보장합니다.”
“저기요. 그 들고 계신 거 몇 코인 정도 합니까?”
남자의 물음에 민성은 들고 있던 뭉개진 감자를 뚫어지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원래 한 포대에 500코인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량으로 사시면 포대에 200코인까지 해 드릴게요.”
“아니, 감자 말고 그 대검.”
어느새 혀가 짧아진 남자의 말투에 민성은 피식 미소 지었다. 조금 전 잡상인들의 반응도 이제는 이해가 됐다.
“200루비요.”
“뭐? 200코인?”
“아뇨, 200루비요.”
민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답하자, 남자는 눈을 반짝이는 여인을 바라보다 거만하게 민성을 내려다봤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아무튼 200이라는 거지? 그 특별히 수고비 50 넣어서 250코인 쳐줄 테니까, 팔아.”
“네, 꺼지세요.”
민성의 해맑은 미소와 달리 날아온 차가운 거절에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꺼지라고? 하! 이거 봐라? 이거 웃긴 놈이네.”
남자는 얼굴을 부여잡고 실실 웃어 댔다. 살면서 거절당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어처구니가 없으니 웃음도 절로 쏟아져 나왔다.
“이봐요. 우리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러시는 거예요? 별을 네 개나 다신 장성님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괜히 험한 꼴 당하시지 말고 좋게 말할 때 파세요.”
여인 또한 남자친구가 조롱받은 것이 못마땅했는지 비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쪽 남자가 술을 파는 사람이건 몸을 파는 사람이건 관심 없고 팔 생각도 없으니까 꺼지시라고요.”
민성은 귀찮은 파리가 꼬였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처음 벌이는 장사인 만큼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 새끼가!”
그러나 혼자 실실 웃던 남자가 갑자기 검을 빼 들더니 민성의 가판을 뒤집어 놨다. 안 그래도 뭉개졌던 감자는 내동댕이쳐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박살 났다.
“어머, 어쩌면 좋아.”
여인은 이 상황을 예상했는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눈으로는 민성을 비웃었다.
“…….”
민성은 박살 난 감자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이제 좀 정신이 들지? 너도 저렇게 만들어 줄까? 어? 이 새끼가 웃어? 아직도….”
“이거 손님이 아니라 손놈이었네.”
퍽-
남자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얼굴이 뜨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곤 곧 뒤로 나자빠져 바닥을 구를 때까지 뜨끈한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으아아악!”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꺼졌어야지.”
민성은 고통에 바닥을 뒹구는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마나 타는 소리도 미세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약한 놈인 듯했다.
“여기도 싸움이야? 첫날부터 아주 개판이네.”
“그래도 싸움 구경만 한 게 있나? 어디 구경이나 좀….”
안전지대 곳곳에서 벌어지는 싸움판을 찾아 돌아다니던 구경꾼들은 새로 열린 싸움판에 환호하며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나 악마처럼 웃고 있는 민성의 얼굴을 보곤 재빨리 발을 뺐다.
“어떤 미친놈인진 몰라도 불쌍하네. 상대를 보고 싸워야지.”
“아니. 저쯤 되면 불쌍하지도 않아. 커뮤니티만 들어가도 알 텐데. 최소한의 정보 수집 할 생각도 안 했다는 거잖아? 맞아 죽어도 싸지.”
민성을 인지한 구경꾼들은 괜히 불똥 맞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거나 다른 싸움판으로 이동했다.
“으아아아! 죽여 버리겠어!”
구경꾼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남자는 괴성 지르며 검을 들고 민성에게 달려들었다. 아픔보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나동그라졌다는 모멸감이 더 큰 모양이었다. 그러자 히죽거리던 민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민성은 등에 이고 있던 대검을 빼 들었다. 그리곤 남자가 휘두른 검을 맞받아쳤다.
챙-
남자의 검이 힘없이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 무슨 힘이….”
남자는 고통에 떨리는 손을 부여잡곤 민성을 바라봤다. 감자 따위나 팔길래 운 좋게 농작물 재배와 관련된 스킬이나 얻은 놈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항상 하던 대로 적당히 겁박하고 물건이나 뜯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을 외면했다.
“검을 들었다는 건 죽을 각오도 했다는 거겠지. 그치?”
“억!”
대검의 두터운 검면에 얻어맞은 남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꺄아아악! 누가 좀 말려 주세요!”
보다 못한 여인이 구경꾼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난 또 저 양반한테 덤비길래 한 가닥 하는 놈인 줄 알았네.”
“그러게 상대를 보고 싸웠어야지.”
오히려 구경꾼들은 범을 몰라본 하룻강아지를 질타했다. 이쪽 세계에선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죄였으니까.
“그러게 왜 얌전히 감자 파는 사람을 건드려, 응?”
민성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며 남자를 두들겨 팼다. 팔리지 못하고 박살 난 감자들의 원한을 생각하면 이 정돈 양반이었다.
“거기! 누구 없어! 나 이장석 장군 아들이야! 누구 없냐고!”
“무슨 일이십니까?”
한참을 처맞고 바닥을 기던 남자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러자 장군이라는 말에 순찰 돌던 군인 몇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곤 몰골이 된 남자를 발견하곤 사색이 되어 다급히 남자를 부축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등에 업고 몰지각한 행동을 일삼던 놈인지라 군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탓이었다.
“됐고! 저 새끼! 저 새끼 쏴 버려! 쏘라고!”
남자는 군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민성에게 삿대질해 댔다. 온통 부상자에게 시선이 쏠렸던 탓에 군인들은 그제야 민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어?”
“넌 이제 끝이야 이 시발 놈아! 쏴!”
남자는 곧 총알에 관통당해 쓰러질 민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실질적으로 군부의 지위도 상승했다. 군대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감히 장성의 아들을 건드렸으니, 하찮은 능력자 따위 죽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충성!”
“뭐 하는 거야! 니들 뭐 하는 거냐고! 왜 저 새끼한테 경례를 처박고 있어!”
그러나 민성에게 경례하는 군인들을 본 남자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써 목소리를 높였지만 점차 올라오는 두려움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어, 그래. 것보다 그 부축하고 있는 것 좀 내려놓을래?”
민성은 대충 경례해 주곤 상냥하게 웃으며 하얗게 질린 남자를 가리켰다.
“저… 죽이시는 건….”
“죽이진 않을 거야. 사리 분별 못 하는 개새끼 교육시키려는 거지.”
군인들이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자 민성은 명쾌한 해답을 내놨다. 사실 죽일 생각도 없었다.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수면 몰라도 인간은 죽이는 것보다 평생을 치욕 속에서 살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러자 망설이던 군인들은 흔쾌히 남자를 내려놨다.
“야 이 새끼들아! 나 이장석 아들이라고! 이장석 장군 아들!”
남자의 간절한 외침에 외려 군인들은 눈을 돌렸다. 장성의 아들이라는 허울 좋은 감투뿐인 남자와 이번 토벌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을뿐더러, 과거 토벌로 훈장까지 받은 민성을 비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거기다 실질적으로 명령권만 없다 뿐이지 장군보다 민성의 직위가 더 높기도 했다.
“이제 더 없지? 아! 아니면 아버지라도 모셔 와. 장군이시라며.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응?”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마지막 보루마저 잃은 남자는 천천히 다가오는 민성을 귀신 보듯 보며 소리 질러 댔다.
“감잣값은 치러야지.”
민성은 싱긋 웃으며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잠시간 안전지대에선 곡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자, 이제 데려가.”
민성은 발치에 놓인 사람 같은 것을 툭툭 밀쳐 냈다. 온몸이 퉁퉁 부은 그것은 겨우 숨만 몰아쉬며 살아 있음을 알렸다. 바지 사이로 흘러나온 노란 액체는 연민마저 들게 했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충성!”
남자를 등에 업은 군인들이 사라지자, 민성은 장사를 재개했다. 곡소리가 사람들을 끌어모은 덕에 장사하기엔 아주 제격이었다.
“자, 감자가 한 포대에 500코인! 많이 사시면 200코인까지 에누리해 드립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펼쳐진 감자와 잡어를 구경할 뿐 구매하려는 이가 없었다. 장성의 아들을 쥐 잡듯 때려잡은 민성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뜻 500코인을 지불할 정도로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가격을 낮춰야 하나.’
결국 민성이 가격을 두고 고민하는 찰나, 누군가가 민성의 상점 앞으로 다가왔다.
“돈 많은 부잣집 아들내민 줄 알았는데, 이거 동업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는 척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포장마차 사장님이었다. 손님과 사장의 입장이 바뀌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어서 오세요.”
그러나 민성은 활짝 웃으며 포장마차 사장을 환대했다.
“감자들이 아주 실하네요. 직접 키우신 겁니까?”
사장은 뭉개진 감자들을 살피며 감탄사를 늘어놨다. 입발림 소린 걸 알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농작 관련 아이템이 있어서 꽤 유용하게 사용 중입니다.”
민성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고양이들도 넓게 보면 아이템의 일부였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거 한 포대 주시죠.”
“직접 드시려는 겁니까?”
민성은 감자 자루를 건네고 손을 내밀며 넌지시 물었다.
“아뇨. 감자 샐러드 같은 안줏거리에 감자 소주까지 쓸 데가 아주 많습니다. 안 그래도 메뉴가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포장마차 사장은 민성의 손을 잡고 500코인을 건네며 싱글벙글 웃었다. 감자로 만들어 낸 상품들이 벌어들일 코인 생각에 벌써부터 뿌듯한 모양이었다. 민성 역시 내색은 않았지만 기쁘긴 마찬가지였다.
‘식당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것도 파시는 겁니까?”
포장마차 사장은 지갑을 연 김에 말린 잡어 묶음까지 집었다.
“그건 200코인에 팔고 있습니다. 매운탕이라도 하시려고요?”
민성은 농담조로 가볍게 물었다. 얼큰함이 생명인 매운탕에 양념은 필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조미료가 좀 귀한 게 아니었으니 가능할 리 없었다.
“일단 최대한 연구해 봐야죠.”
포장마차 사장은 에둘러 말하며 잡어도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거, 아까 보니까 그냥 시원하게 패던데. 아주 보는 맛이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저 무뢰배 놈 때문에 피해 본 걸 생각하면, 어휴! 앞으로도 종종 구매하러 오겠습니다. 대신….”
가게에 와서 술을 팔아 달란 소리였다.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민성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먹을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눈빛을 교환한 둘은 다시 손을 맞잡고 붕붕 흔들었다. 이해타산이 맞는 관계가 성립된 기념이기도 했다.
“그럼 젊은 사장님도 많이 파세요!”
포장마차 주인은 눈을 찡긋거리곤 포대 자루를 들고 사라졌다. 이후로도 간간이 사람들이 몰려와 진열대를 보고 갔다. 그러나 쉽사리 구매하겠다고 나서는 손님은 없었다. 간혹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럴 때면 말없이 감자 한 덩이를 올려주는 인심을 보여 주기도 했다.
“네 포대에 두 묶음이라….”
주변이 어둑해지자, 민성은 판매액을 합산했다. 다 합쳐 2200코인.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저조했다. 아무래도 다음 판매 때는 가격을 낮춰 판매해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자.’
“인간!”
민성이 주섬주섬 포대 자루를 아이템 창에 넣으려는 찰나,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