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299화- 마른 땅에도 싹은 튼다(1)
“여기! 안에 숨어 있다!”
“죽여!”
“크륵….”
어느덧 전투는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무할름과 마지막 기둥이었던 발로그마저 잃은 도마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총알에 관통당해 차가운 바닥에 눕거나 혹은 포획되어 질질 끌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끝났네.’
“수고했다. 덕분에 피해도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는 전장을 지그시 바라보던 민성 옆으로 이종범이 다가왔다.
“진짜 고마우면 보상이나 좋은 걸로 챙겨 줘. 또 구더기 같은 거 주지 말고.”
“재고해 보겠다.”
이 부장이 순순히 응하자 민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 강제로 개심하게 만드는 아이템을 먹은 건가 싶기도 했다.
“전차 한 대당 가격만 40억가량이다. 무역로가 끊긴 지금은 그 가치가 더 올랐겠지. 거기다 병사들의 목숨값은 말할 것도 없고.”
이종범은 언덕 위에 세워진 태극기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거기다 언급은 안 했지만 각하의 명령도 예정보다 더 빨리 수행할 수 있었다. 단축한 시간까지 합해 민성의 활약을 돈으로 환산하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거기다 방대한 토지를 탈환한 만큼 내년부턴 안정적인 식량 확보도 가능할 터였다.
“다만 한동안은 지역 안정화와 대민 지원으로 바쁠 거다.”
“나도 당분간은 쉴 거니까 상관없어. 떼먹지만 마라.”
이종범이 바로 보상 지급은 어렵다는 뜻을 돌려 말하자 민성은 쉽게 수락했다.
“…고맙다.”
“그래도 고마운 줄은 아네.”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것뿐이다.”
이종범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을 이어 갔다.
“이미 각하에게 보고드렸다. 아마 이번 토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시겠지. 네가 원한다면 각하께 네 공적도 언급하겠다.”
이 부장이 넌지시 물었지만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방송 나가면 얼굴 팔리고 귀찮은 일만 생겨. 나는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 사는 게 좋다.”
“…….”
이종범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놈은 명예욕이나 물욕 따위가 없는 듯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능력자들보다 요구 조건을 맞춰 주기 힘든 점도 있었다. 대신 조건만 맞춰 준다면 누구보다 믿음직했다. 열악하거나 최악의 상황인 곳에 데려다 놔도 그걸 뒤엎을 능력을 갖고 있다.
“가는 건가.”
바닥에 앉아 있던 민성이 일어나자 이 부장은 한쪽에 세워진 레토나를 가리켰다.
“됐어. 뛰어가는 게 더 빨라.”
아직 전투 때 사용한 스킬 유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민성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곤 순식간에 자리서 자취를 감췄다.
*
서울의 도심지. 과거에는 종로라 일컬어진 곳이기도 했다. 한때는 괴수 출몰 여파로 난장판이 됐었지만, 이제는 제법 형태를 갖춘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었다.
“어이, 이 씨! 잠깐 쉬었다 하라고!”
“그려!”
건물 내에서 작업하던 인부들은 횃불에 모여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누구는 배급받은 식량을 주섬주섬 꺼내 불 위에 덥히기도 했다.
“후우. 이제 또 겨울이 오나 보이.”
“이제 내년이면 얼추 입주할 수 있겠어.”
한 인부의 중얼거림에 주위 사람들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선 작업도, 보일러 시공도 끝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곧 따스한 집에서 몸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행인데 또 갑자기 놈들이 튀어나오면 여태껏 했던 일도 허사 되는 거 아냐?”
“에이! 이 사람아! 그런 소리는 꺼내지도 말아.”
“큼… 나는 최악을 생각한 것뿐이야.”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지자, 넌지시 괴수 이야기를 꺼낸 인부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번에 정부서 충청도까지 회복했다던데.”
“솔직히 회복은커녕 빨갱이 놈들이 이때다 싶어 쳐들어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참 다행이지.”
“오히려 휴전국이라 이 정도에서 끝난 걸 수도 있어. 이럴 땐 분단국가란 사실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 원.”
인부들은 최근 연일 방송되던 뉴스 내용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진행했다.
“그 이 부장? 영웅은 난세에서 나온다더니 그 양반 참 대단하긴 해. 솔직히 누가 이렇게 빨리 탈환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어?”
실제로 충청도 토벌 소식이 알려진 뒤, 이종범은 구국의 영웅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정부에선 그 공로를 인정해 이능력자 대책부를 정식 부서로 승격, 이종범을 장관으로 임명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렇긴 한데 이건 박정후가 잘한 거지. 다른 건 몰라도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잖아? 어떻게 보면 이 부장 업적도 박정후가 없었다면 없던 거나 마찬가지였을 걸?”
“아니지. 이건 이종범이 노선을 잘 갈아탄 거지. 이번 토벌서 능력자들 꽤나 데려갔다며? 능력자들 때려잡던 양반이 능력자들 중용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국가를 위해 잠깐 신념을 내려놓은 걸지도 몰라. 우리한텐 잘된 일이지.”
“자자, 그러지 말고 여기 김 씨에게 물어보자고.”
한창 열변을 토하던 인부들은 모두 한 인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 달리 김 씨라 불린 추레한 차림의 노인은 해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답하기 껄끄러운 모양이네.”
인부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타워에서 벌어진 전투의 생존자이자 능력자면서도 건설에 참여한 괴팍한 사람이었다. 가진 능력이 변변찮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는 말에 곧 납득했다. 같은 처지의 동료인 만큼 조금이라도 친해져 보려 다가갔지만 통 말이 없는 탓에 아직도 서먹서먹했다.
“자자, 이제 잡담 그만하고 다시 일하자고!”
“…….”
작업반장의 호통에 남아 있던 인부들도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김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타워를 바라봤다.
“빨리 비켜!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야!”
“질서를 지켜 주십쇼! 질서를 지키지 않으시면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그 시간 타워 인근의 경계선에선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하느라 총 없는 전쟁을 벌였다. 느닷없이 안전지대를 개방한다는 정부의 공표가 떨어진 게 원인이었다. 어느 정도 토벌이 성공으로 끝났으니 더 이상 독점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언뜻 안전이 확보됐으니 물러나겠다는 뜻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제 상관께서 안전지대가 악용되는 걸 묵과하실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금일부로 새로운 룰을 적용할 계획입니다.”
어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관리자는 이제껏 안전지대에 적용되던 규칙을 일부 수정한다고 공언했다.
이제 안전지대서도 자유로이 전투 행위가 가능하다, 다만 전처럼 타워에서 들고나온 것들은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다는 게 내용의 주류였다.
“개방하겠습니다.”
“내가 먼저야! 비켜!”
군인들이 길을 비켜서기 무섭게 사람들은 악다구니 쓰며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자고로 장사란 자리가 중요한 법.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늦으면 땅 귀퉁이조차 차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탓인지 입구서부터 능력자들의 소환수나 스킬이 난무했다.
“실프! 여기 있는 새끼들, 죽지 않을 정도 위력으로 날려 버려!”
휘이잉-
“으아아아악!”
바람에 날려 허공에 붕 뜬 사람들부터,
“저 새끼가! 스통! 저 정령 부리는 새끼 강에다 던져 버려!”
“그란트 스파이더의 웹!”
거미줄에 발이 묶이거나 작은 진흙 인형의 손에 끌려 강에 빠지는 사람들 등, 타워 주변은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말았다.
“질서를 지켜 주십쇼!”
“이 망할 새끼들이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군인들의 외침에도 능력자들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았다.
“하여튼 이놈들은 좋게 말하면 들어 먹지를 않는군.”
현장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이종범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자… 장관님!”
그러자 능력자들 사이에서 분투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구국의 영웅이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사기가 들끓었다.
탕-
총소리가 울리자 격한 싸움을 벌이던 능력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종범을 바라봤다. 정확힌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을 응시했다.
“지금부터 말 안 듣는 새끼들은 명령에 불응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공격하겠다. 벌집 되고 싶은 놈은 계속 까불어도 좋아.”
“흥. 애초에 공공장소를 무단 점령한 새끼들이 뭔 개소리야!”
이종범의 으름장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외려 목소리를 높이며 그간의 부당함을 토로했다.
“자신감만큼 실력도 있는지 보겠다.”
이종범은 말대꾸한 능력자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그리곤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갑자기 인파 뒤편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인파가 수박 쪼개지듯 반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뭔데 그래?”
“쉿! 죽기 싫으면 그냥 따라 해! 그럼 적어도 중간은 간다고.”
그러자 앞쪽에 있어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 역시 분위기에 편승해 길을 터 줬다. 그 사이로 익숙한 인물이 걸어오자, 이종범은 무심하게 권총을 권총집에 넣었다.
“추가 임금은 확실히 지불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제시할 걸 그랬어.”
이종범의 담백한 환영에 민성은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민성이 발로그를 처리하는 대가로 제시한 조건. 그것은 정부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안전지대의 활성화였다. 본래라면 이종범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안건이 아니었다. 정부의 안위를 책임지던 벙커에서 물러나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차원 관리자의 공표 덕에 이종범은 쉽사리 민성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무르기는 없다.”
“물러?”
이종범이 딱 잘라 말하자, 민성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성사된 거래 조건 바꿔 달라 할 정도로 빈곤하지는 않아.”
민성은 시원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과정이 어떻건 간에 결과물만 만족스러우면 됐다.
“그럼 됐다. 들어갈 건가?”
“그럼 들어가야지. 뭐하러 여기까지 왔겠어?”
민성이 발걸음을 옮기자, 길을 통제하고 있던 군인들은 서둘러 좌우로 정렬하며 길을 터 줬다.
“세워 총!”
“충성!”
그리곤 다리가 울릴 정도로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경례했다. 그것은 이종범의 지시 사항이 아닌, 오로지 병사들이 존경심을 표하고자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내 지시가 아니다.”
민성이 가볍게 째려보자 이종범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담배를 물었다. 정작 당사자나 위쪽 인사들은 토벌 공로를 감추고자 했으나,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의 눈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에휴. 그래.”
민성은 대충 따라 경례해 주곤 재빨리 다리를 건너고자 했다.
“비록 백의종군하셨어도 저는 죽을 때까지 민성 님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 덕분에 제 친구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온갖 말들이 들려오는 통에 다리를 다 건널 때쯤 민성의 얼굴은 살짝 발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