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298화- 토벌 종료(3)
“힘만 드럽게 세네.”
힘의 반동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민성은 곧바로 몸을 날려 발로그의 다리 부근으로 쇄도했다. 괴수들을 토벌할 때, 대개 덩치 있는 놈들은 기동력만 없애면 상대하기 편했다.
[어림없다!]
아까까지 비어 있던 발로그의 왼손에는 새카만 불로 덮인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쯧.”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기다란 채찍에 민성은 혀를 차며 옆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채찍은 살아있는 것처럼 머리 부근을 꺾어 끝까지 쫓아왔다. 민성은 묵직하게 대검을 휘둘러 허리로 달려드는 채찍 끝을 멀찌감치 걷어냈다.
“양손잡이였어?”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죽어라!]
발로그는 민성의 기민함에 분통을 터트리며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때마다 지면이 폭발하듯 뒤집혀 깊은 도랑이 생겼다. 여유롭게 발로그의 공격을 피하던 민성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 새끼 봐라? 양 대가린 줄 알았더니 여우 새끼였네.’
언뜻 그를 노리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그의 주변 땅을 파내고 있었다. 실제로 엉망이 된 지면 덕에 점차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도 했다.
“그렇겐 안 되지. 뇌신화.”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자 몸에 힘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쥐새끼 같은 놈!]
다시 도끼가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외려 민성은 횡으로 힘차게 대검을 휘둘렀다.
깡-
격한 쇳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그에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군인들은 정신이 들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이길 수 있을까?”
“그 거인도 단방에 없앤 악마잖아. 솔직히 이만큼 버틴 것도 대단한 것 같은데.”
거인과 소인의 싸움. 누가 봐도 거인의 승리가 당연한 상황이었다.
“아니면 한 시간 동안 버티면 되지 않을까?”
“아, 그때 너 없었어? 저 새끼 금방 튀어나오더라. 버텨도 의미가 없어.”
군인들은 발로그가 몇 차례고 소환되어 전장을 휩쓸었던 당시가 떠올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결국 토벌은 실패로 끝나는 건가?”
“글쎄. 저 파충류 새끼들을 싸그리 잡아 죽이거나 아니면 저 사람이 이기는 수밖에는 없겠지.”
군인들은 소총 개머리판을 꽉 움켜잡고 싸움판에 집중했다.
깡-
도끼와 대검이 맞물릴 때마다 울리는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죽어라! 죽어!]
민성은 연거푸 도끼를 쳐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식한 공격에 이어 뱀의 머리처럼 간사하게 틈을 노려 오는 채찍이 꽤 거슬렸다.
‘대강 간은 봤으니 슬슬 조미료를 쳐 볼까.’
신체 능력이 월등해도 약화시키면 그만이다. 상대는 약화시키고 스스로는 강화시킨다. 전투의 기본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거인이다! 놈의 키를 잘라 우리 모두 나눠 갖자!]
[원통하다! 죽이자! 죽이자!]
스킬이 발동되자, 하얀 난쟁이들이 쏟아져 나와 발로그에게 달려들었다.
[재밌는 능력을 갖고 있었구나! 하지만 소용없다!]
하지만 발로그의 몸에 닿은 난쟁이들은 눈 녹듯 사그라져 들었다.
[아, 깜박했군. 발로그는 약화나 저주 따위에 면역이 있다. 그럼 구경도 잘했으니 이제 진짜 쉬러 가겠다.]
“뭐?”
민성이 당혹스러워하는 와중 갑자기 손등의 보석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곤 민성이 입을 채 떼기도 전에 잦아들었다.
“이 자식이 진짜….”
[아직 한눈팔 여유가 있나 보군. 죽어라!]
발로그는 그 잠깐의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도끼를 휘둘러 민성의 가냘픈 육신을 부수려 했다. 그러나 민성이 날렵하게 피하는 통에 육중한 도끼날은 엄한 땅만을 뒤집어 놨다.
“너무 느려.”
외려 민성은 점프해 땅을 찍고 되돌아가려는 도끼날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발로그의 손목에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손목을 파고든 느낌이 들자 민성은 검 자루에 더욱 힘을 밀어 넣었다.
치익-
[끄아아아악!]
전신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고통에 발로그는 울부짖으면서도 채찍을 휘둘렀다.
“이크.”
채찍서 흘러나온 새까만 불길이 몸을 옥죌 듯 좁혀 들어오자, 민성은 대검을 거두어들이며 놈의 손목을 발판 삼아 크게 도약했다.
“뒈져라!”
뇌신화 덕에 순식간에 머리 부근까지 뛰어오른 민성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양 대가리의 목에 힘껏 대검을 휘둘렀다.
“음?”
민성은 평소와 다른 손맛에 눈살을 찌푸렸다. 검날이 손목을 벨 때처럼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꼭 힘준 팔에 주삿바늘을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발로그는 체력이 빠질수록 방어력이 높아진다는 무할름의 깨알 같은 조언을 듣고서야 납득했다.
“뭐, 아무리 방어를 높여 봐야 의미 없지만.”
치익-
[크아아아아악!]
다만 상처 크기와 상관없이 피해 입히는 마나 디스트로이어 덕에 기분 좋은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날벌레 같은 놈이 감히… 분노의 폭풍!]
발로그의 몸이 급속도로 뜨거워지자 민성은 잽싸게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이놈….]
발로그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고통을 이완시키며 민성을 죽일 듯 노려봤다. 악마는 마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한데 놈은 그런 마나를 한순간에 도둑질해 갔다. 아니, 도둑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문서를 홀라당 태우려고 들었다.
[용서할 수 없다! 죽여 버리겠어! 인페르노!]
발로그의 울부짖음을 시작으로 패 있던 땅에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 사이에선 용암과 딸기 잼을 섞어 놓은 듯한 색의 진득한 액체가 분출됐다.
“뭐 하려고 삽질하나 했네.”
민성은 발을 바삐 놀리며 쏟아지는 액체들을 피해 냈다. 어느덧 웅덩이가 된 구멍 탓에 활동반경이 좁아지긴 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괴… 괴로워…
그만… 차라리 죽여 줘!
액체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희멀건 연기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핏 보니 심령 사진에나 나올 법한 악령 같기도 했다.
“지옥에 갇힌 영혼 같은 건가?”
[염옥 속에 갇힌 망령들이지. 네놈도 곧 저리될 거다. 아니, 네놈의 영혼은 특별히 이 몸이 집중 관리 해 주도록 하지.]
“취미 참 고약하네.”
민성은 그에게 근접해 오는 망령들을 째려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죽어서까지 농락당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망령들이 그의 몸을 건드린 순간 민성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띠링-
상태 이상 염옥귀의 지옥으로의 초대에 적중당하셨습니다.
이동 속도가 10% 감소합니다.
공격 속도가 30% 감소합니다.
방어력이 10% 감소합니다.
‘미친?’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종아리에 두꺼운 모래주머니를 찬 느낌이 들었다.
[멍청한 놈! 죽어라!]
발로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도끼로 민성을 미친 듯이 찍어 댔다. 그러나 민성은 코웃음 치며 공세를 피해 냈다. 다행히 곧장 발동한 불굴의 의지 덕에 곧바로 저주를 해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럽게 나오시겠다? 그럼 이쪽도 똑같이 대접해 줘야겠지.”
놈에게 저주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템이라면 어떨까. 민성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민성은 연거푸 공격을 피하며 아이템 창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이템 사용, 여신의 눈물.”
[이건 무슨…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딴 아이템이 쓸모 있을까 싶었는데.’
민성은 히죽이며 발광하는 발로그를 쳐다봤다. 악마에게 아들을 잃은 여신의 절망과 저주가 담긴 아이템 여신의 눈물. 타워서 한창 박스를 열 때 얻었던 물건이다. 사용 시 상대방의 모든 감각을 앗아 가는 아이템으로서, 언뜻 활용도가 높아 보였으나 악마 계열 종족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에 비밀스러운 집에 처박아 뒀었다. 하지만 저번 전투 때 무할름을 상대하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왔다.
[어디냐! 이놈! 이놈!]
발광하며 이리저리 도끼를 휘둘러 대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효과가 좋은 듯했다.
“저주는 튕겨 내도 약발은 잘 받네? 아, 청각도 털렸으니 안 들리겠네?”
민성은 발작하듯 날뛰는 발로그의 몸을 타고 올라 목 언저리에 다가갔다.
“나무가 큼지막하니 넘기는 맛이 있겠어.”
그리곤 양손에 침을 퉤 뱉곤 대검을 비스듬히 쳐들었다가 힘껏 내려찍었다.
치익-
대검이 삼분지 일쯤 틀어박힌 목 사이에서 마나 타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울렸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오란 말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목이 떨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애꿎은 땅을 찍어 댔다. 시각에 통각조차 뺏긴 놈이니 알 턱이 없었다.
“이 정도 부상에도 안 죽는 걸 보면 확실히 악마는 악마네.”
민성은 곧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양 머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무릎까지 꿇은 걸 봐선 감각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몸은 곧 다가올 죽음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잘 가.”
민성이 세차게 대검을 휘두르자, 커다란 양 머리가 잠시 허공을 부유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산처럼 육중했던 거구가 천천히 쓰러져 내렸다.
쿵-
커다란 진동이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발로그 님이….”
“이… 이겼어.”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한 일이야?”
양 진영은 각기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일기토의 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듯 쳐다봤다.
“뭘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어! 돌격해!”
민성은 그런 이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멍하게 서 있던 군인들의 눈에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돌격! 돌격!”
무전기에선 어떠한 명령도 하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병들은 미친 듯이 소리치며 약진했다. 그들 역시 지금이 승리를 쟁취하기 최적의 상황이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후… 상당히 피곤한 놈이었어.”
수만에 달하는 보병들이 내달리자, 그제야 민성은 한숨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처는 없지만 정신적 피로감이 어깨를 무겁게 눌러 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소환되진 않겠지.’
민성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발로그의 시체를 바라보다 눈을 빛냈다. 놈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도끼만이 묘비처럼 달랑 남아 있었다. 그냥 가기에는 섭섭했는지 선물을 남긴 듯했다.
“호오.”
도끼 앞으로 다가가니 그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옥 불에 고통받는 영혼들의 모습이 각인된 도끼는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민성은 도끼를 잡고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도끼는 민성이 사용하기 알맞게 부피가 줄어들었다.
파멸과 소멸의 도끼
설명 : 사용자에게 강한 힘을 주지만 언제고 소멸의 길로 인도한다. 불구덩이에서 기어오르는 영혼을 쳐 내고자 만들어진 도끼로서, 업화의 지옥의 군단장인 발로그가 애용하던 무기다. 민성이라 불리는 인간족의 전사에게 토벌되기 전까지 도끼날 아래에 소멸된 영혼은 물경 수천만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등급: ★★★★★
공격력: 352~412(+0)
능력: 스킬 소멸, 파멸 사용 가능.
‘나쁘진 않지만 사용하긴 좀 그러네,’
스킬 설명을 읽어 내리던 민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30% 증진시켜 주는 패시브 스킬인 파멸은 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사용자를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설명이 붙은 소멸 스킬은 도끼의 매력을 반감시켰다.
‘뭐 그래도 5성 아이템이니까 수요는 있겠지.’
사용하진 않더라도 팔거나 동급의 물건과 바꿔 먹으면 그만이었다. 민성은 도끼를 챙겨 아이템 창에 넣곤 주변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