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297화- 토벌 종료(2)
[악마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네놈도 충분히 악마의 자질이 있는 것 같군. 이참에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어떤가. 내가 마왕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다.]
“됐고. 일이나 잘 처리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한때는 업화의 땅을 다스리던 주인이었다.]
민성이 손짓하자, 무할름은 자신만만하게 움직여 모두에게 잘 보일 수 있는 하늘로 치솟았다.
[무할름의 백성들이여! 잠시간의 공백을 딛고 내가 돌아왔다. 언제까지 숨어만 있을 것인가! 내가 너희를 보우하겠다. 가라! 가서 간악한 인간들을 죽여라! 살점을 뜯어내고 바닥을 놈들의 피로 불게 물들여라!]
“어? 어어? 무… 무할름 님께서 돌아오셨다! 우리의 신이 돌아오셨다! 신께서 우리의 부름에 응답하셨다!”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어라! 동족의 원한을 풀어 줘야 한다!”
한편, 항전하던 도마뱀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무할름을 보곤 기세를 올렸다. 호 안, 폐건물 등 틀어박혀 있던 도마뱀들이 쏟아져 나와 물결을 이뤘다.
“발포!”
목표물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군인들을 명령에 따라 사격을 개시했다.
“억!”
“끄아아악!”
총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림과 동시에 앞 열의 도마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나 물결은 흔들림이 없었다. 쓰러진 자의 자리 위를 다른 도마뱀들이 빠르게 메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 번 탄력받은 기세는 탄환 다발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우리 집 바퀴벌레 놈들보다 징그러워 보이네.”
점차 거리가 좁혀들자 군인들은 긴장한 듯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혹 영화에서나 보던 불사의 군대가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부장님! 이러다 탄알이 먼저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괜찮아. 계속 대응해.”
부하의 조언에도 이종범은 묵묵히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하며 민성을 흘낏 바라봤다. 그가 움직이면 지금의 판세가 크게 바뀌리란 확신이 있었다. 확실한 판이 아니면 잘 승부하지 않는 놈이다. 오랜 시간 상대했던 놈인 만큼 나름 신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게 개미 새끼들이야 도마뱀 새끼들이야. 아, 알 까는 건 똑같네.”
민성은 능선으로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히죽이다 고개를 쳐들어 무할름을 응시했다.
“뭐해? 가오 작작 잡고 얼른 시작해. 아니면 도마뱀한테 정이라도 들었어?”
[후….]
민성의 질타에 무할름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나마 고기 굽던 하인 신세를 벗어난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유통 기한이라도 짧으니 다행이지.]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다.]
민성이 얄팍하게 눈뜨자, 무할름은 기겁하며 돌격해 오는 도마뱀들에게 손을 뻗었다.
[멸망의 시조.]
무할름의 말이 끝나자, 그의 손에 작은 불새 같은 것이 생기더니 돌격해 오는 도마뱀들의 진형 사이로 날아갔다. 이윽고 불새는 한 도마뱀의 머리에 앉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음? 무할름 님의 축복인가?”
“저건 또 뭔지….”
잔뜩 긴장해 불새를 바라보던 양 진영의 수장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불의 거인을 바라봤다.
“아아, 이런 식으로 반항해 보시겠다?”
민성은 상냥하게 웃으며 천천히 대검에 손을 뻗었다. 아직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근엄하게 자태를 뽐내던 불의 거인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 기다려 봐라. 곧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재미없으면 파묻을 거야. 평생 지층에서 썩고 싶지 않으면 잘 처신해.”
[걱정 마라. 슬슬 시작될 테니까.]
무할름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다행히도 자신감의 근원은 곧 실체가 되어 모습을 보였다.
깨아악-
잠에서 깨어난 불새가 힘차게 날갯짓하기 무섭게 일부 도마뱀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의 시작에 불과했다.
“크아아아악!”
불붙은 도마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얼굴을 후려쳐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자 작은 불똥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주위로 퍼졌다. 민들레 씨앗처럼 퍼진 불똥은 새로운 숙주의 머리에 안착해 열화를 피워 냈다. 다만 희한하게도 불똥이 숙주 삼은 대상은 오직 도마뱀들뿐이었다.
“아아, 살… 살루져!”
“무, 무우울! 제바알!”
숙주로 선택된 자들은 얼굴이 녹아내리는 탓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무할름 님의 축복이 있는데도….”
대사제의 사망 후, 임시로 부족의 통솔자 자리를 맡은 도마뱀은 전장 가득히 피어난 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꽃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빠르게 확산되어 동족들을 덮쳐 갔다.
“으어어아아아어!”
불 속에서 울려오는 절박한 부르짖음은 인간, 도마뱀 할 것 없이 강렬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좀 무섭네.”
“그러게. 꺼지지도 않는 것 같은데.”
군인들은 두려움에 소총 덮개만 꽉 움켜쥐고 지옥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아군이 우위를 점했을 때 전투에 종지부를 찍어야 마땅했지만, 지금은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저 거인의 능력인가?”
“그런 것 같긴 한데 아마 실질적으론 저 사람이 조종하는 거겠지.”
군인들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불의 거인 옆에 서 있는 민성을 응시했다. 만약 도심지나 보호소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 저 능력을 사용한다면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올 게 뻔했다. 개중에는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제발 윗놈들이 머저리 같은 선택은 안 했으면 좋겠다.”
“동감한다.”
전장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힘 탓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지만 정작 민성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꽤 쓸 만하네.”
[가장 확산이 빠른 능력이다.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조무래기들 처리하는 데 제격이지.]
민성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무할름의 능력이 변변찮았다면 수옥으로 쓸어 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무할름은 완벽할 정도로 역할을 잘 수행해 줬다. 비록 그에게 당했다곤 하나 악마는 악마인 모양이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땅과 동족들에 이어 이제 우리의 신마저 빼앗아 가다니! 모든 걸 앗아 가야만 속이 시원하냐 이 악마 놈들아!”
[아직도 날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가련한 것들.]
울부짖는 도마뱀들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은 분명 악마의 것이었으니까.
“이대로 깔끔하게 끝나면 좋겠는데.”
민성은 머리만 바짝 탄 시체들을 보다 피식 웃었다.
화륵-
“역시 그럴 리 없겠지.”
저 멀리서 검은 화염 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종범에게서 들은 저들의 비장의 수가 소환되는 모양이다.
[네놈들은 질리지도 않나 보구나! 몇 번이고 이 몸을 불러내는 걸….]
기둥서 소환된 발로그는 벼락처럼 소리를 내지르다 불의 거인을 보곤 몸을 움찔거렸다.
[무… 무할름 님?]
[오랜만이로구나.]
[이제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발로그는 동요한 듯 몸을 잘게 떨며 불의 거인에게 다가왔다. 무할름 역시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뭐야. 부하 같은 거였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성은 대강 상황을 유추하곤 일이 쉽게 돌아가리라 예상했다. 부하라면 무할름의 명령을 따를 것이고 돌아가라 명령내리면 깔끔하게 끝날 터였다.
[예전 같진 않지만 괜찮다.]
[저는 정말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명색이 신이라는 놈들이 장난 좀 쳤다고 그런 처사를 내리는 게 말이 됩니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신일지 몰라도 근본 자체는 천한 놈들이니까.]
무할름과 발로그는 못다 한 해후를 나누는 가족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만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군인들과 도마뱀들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럼 이제 업화의 땅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당분간은 어렵다. 인간과 계약했다.]
무할름의 말이 끝나자 돌연 발로그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콧김도 씩씩 뿜어 대는 것이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것만 같았다.
[설마 인간 따위와 계약하셨단 말씀이십니까? 것도 지배자도 아니고 하찮은 피조물과 계약하신 겁니까?]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돌아가도록 하여라. 돌아가 당분간은 아트록스와 함께 업화의 지옥을 통솔해라.]
무할름은 근엄하게 손을 뻗어 땅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도끼가 그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흥. 나보고 피조물의 피조물 따위와 계약한 악마를 섬기라고? 웃기지 마라! 이제 업화의 지옥의 주인은 나다! 죽어서 내 마력이나 되어라!]
바닥을 구르는 무할름의 머리가 버럭 소리쳤지만, 발로그는 발굽으로 그의 얼굴을 자근자근 짓밟았다. 그러자 무할름의 몸이 연기처럼 변해 민성의 손등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야. 상하 관계 아니었어?”
[원래는 그렇다만 내가 힘이 약해진 걸 알고 배반한 모양이다. 지옥에선 흔히 있는 일이야.]
민성이 손등에 대고 소리치자 무할름의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만 놈에게 공격당한 탓에 한동안은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다.]
“뭐?”
[한 가지 충고하자면, 놈의 신체 능력을 무시하지 말거라. 겉보기엔 둔해 보여도 업화의 지옥에서 가장 날렵한 놈이니까. 그리고 당분간 고기는 네가 알아서 굽도록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웅웅거리던 손등이 잠잠해졌다. 재차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답변은 없었다.
“농담이지? 뭐 이런 무능한 놈이 다 있어?”
민성이 어처구니가 없어 실실 웃음만 흘리던 와중, 발로그가 다가와 민성 앞에 도끼를 내려놓았다.
쿵-
도끼의 무게 탓인진 몰라도 옅은 진동이 대지를 울렸다.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 무할름과 계약한 인간이었군. 하긴, 그 정도는 되니 무할름도 계약에 응했겠지.]
발로그는 물건 품평하듯 민성을 훑으며 말을 이어 갔다.
[좋다. 내게 종속되어라. 새로이 주인을 맡게 된 지옥의 땅 일부를 네게 주겠다.]
“종속?”
[그래. 종속.]
사실 인간 따위는 대화 걸 가치도 없는 피조물. 그러나 무할름과 계약한 민성은 달랐다. 그의 일격을 막아낸 것도 높이 사는 부분이었지만, 뭣보다 민성을 휘하에 둠으로써 그와 계약한 무할름을 밑에 두겠다는 계산도 섞여 있었다.
“까고 있네. 외관만 양 대가린 줄 알았더니 뇌까지 양 대가리네. 니 새끼 때문에 내 노예가 강제 휴가 갔는데 미안해서라도 노예로 삼아 주십쇼, 해야지. 이 새끼 완전 상도덕도 없는 놈이네?”
그러나 민성은 보기 좋게 발로그의 제안을 걷어찼다. 덤으로 욕설도 한 바구니 담아 안기기까지 했다.
[이놈!]
폭풍 욕설에 두 눈을 끔뻑이던 발로그는 점차 콧김을 뿜으며 도끼를 쳐들어 그대로 내려찍었다.
“말빨 딸리는 놈이 주먹부터 휘두르지.”
민성은 재빨리 등에서 대검을 빼내 도끼에 대고 휘둘렀다.
깡-
날이 맞닿은 부분에서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그 여파로 미세한 바람이 불었다가 곧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