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296화- 토벌 종료(1)
12월 3일.
불의 장벽이 사라진 뒤 이종범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저항하는 놈은 물론 도주하는 도마뱀들의 격멸을 위해 계속 남하를 강행했다. 그러나 싱겁게 끝날 것 같던 전투는 의외로 장기전의 양상을 보였다. 포격을 퍼붓고 지역 확보를 위해 보병들을 투입하면 도마뱀들의 맹렬한 반격에 피해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총으로 우위를 점해도 화염구와 불길을 뿜어 대는 도마뱀들을 잡는 건 꽤 만만찮은 일이었다. 거기다 호를 파거나 건물 잔해에 숨어 게릴라전까지 펼치니 토벌까지 더욱 시간이 걸렸다.
“이제 더 도망칠 곳도 없겠지.”
쌍안경으로 전선을 살피던 이종범은 작게 중얼거리며 쌍안경을 내렸다. 사실 이번 남하를 충청권까지로 한정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기한이 짧은 탓도 있었지만….
‘저기는 올해 내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
이 부장은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커다란 설산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얼음 왕국. 부산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넘어온 생존자가 남긴 말이었다.
“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해야만 뒷일도 도모할 수 있다. 이 부장은 담배를 꼬나물며 걸음을 옮겼다.
“후우.”
군인들은 하얀 김을 뿜으며 차갑게 굳은 손을 비볐다. 이제 전투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능선 너머로 도마뱀들의 몰골이 뚜렷하게 보였다. 놈들만 몰살시키면 한동안은 전투가 없을 것이란 소식에 전의가 들끓었다.
“준비는?”
이 부장의 물음에 부하 장교는 긴장한 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괜찮다. 그보다 이제 시간이 됐다. 시작해.”
이종범은 말꼬리를 흘리는 부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줬다. 평소였다면 질책했겠지만, 그것은 최선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눈이다.”
이른 눈이 군인들의 어깨에 쌓여 지친 몸을 추적추적 적셨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눈앞의 적에 고정돼 있었다. 이윽고 무전기에서 전투 대기를 알리는 명령이 전파되자, 병사들은 소총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발포!”
쾅-
전차 포신서 뿜어 대는 맹렬한 불길이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크엑!”
“인간들의 사술이다! 피해라! 물러나!”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도마뱀들의 것으로 보이는 비늘 조각들과 진득한 액체가 어수선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구석에 몰린 쥐가 매섭다고 했던가. 점차 인간들의 공격에 적응한 도마뱀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파이어 볼!”
“끄아아악! 물! 물!”
산발적으로 떨어지는 화염 공에 군 측도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이대로만 가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부장은 무전기와 쌍안경으로 전투의 흐름을 살피다, 적의 진지에서 솟구치는 검은 화염 기둥을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크하하하하하! 맛대가리 없는 너희들의 영혼 말고 처녀의 영혼을 바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발로그 님! 부디 용서… 켁!”
기둥 사이로 도마뱀들의 비명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다 뚝 끊겼다.
[뭐, 좋아. 또 인간들의 피로 흥분을 가라앉히면 되니까.]
불기둥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양 머리에 불길을 옷처럼 두른 거대한 악마였다.
“아… 악마다! 악마가 나왔어!”
“이번에야말로 죽여야 한다! 쏴!”
병사들은 악마의 갑주에 미친 듯이 총을 갈겼다. 하지만 수많은 총알들 중 단 한 발도 놈의 갑주를 꿰뚫지 못했다. 전차서 뿜어 대는 포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들은 학습 능력이란 게 없는 건가? 이런 장난감 따위론 내 몸에 흠집 하나 못 낸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젠장! 저런 놈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나… 난 도망치겠어!”
기적을 바랐던 군인들은 곧 다가올 죽음을 피하고자 서둘러 전장을 벗어나려 했다.
와직-
양의 머리에 불길을 옷처럼 덮은 악마는 채찍과 도끼를 휘둘러 전차 부대를 뒤흔들어 놨다. 도끼에 찍힌 전차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처럼 구겨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또 저놈인가.”
이종범은 안경을 고쳐 쓰며 악마를 노려봤다. 여태껏 도마뱀들을 제압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압도적인 힘. 이쪽 공격은 지우개 똥 맞은 것처럼 굴면서 사정없이 병력들을 죽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놈이 날뛰는 시간은 대략 1시간 남짓이라는 점이었으나, 불붙은 적들의 기세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크하하하하하! 가소롭구나! 날 더 재밌게 만들어 봐라!]
콰직-
“젠장. 퇴각시켜!”
전차들이 연달아 박살 나자, 보다 못한 이종범은 서둘러 지시했다.
“퇴각 신호다! 퇴각해!”
“으아아아! 도망쳐!”
[오호라. 네가 이 조무래기들의 지휘관이냐!]
군인들을 벌레 잡듯 찢어발기던 발로그는 도끼를 쳐들어 점처럼 보이는 지휘부를 향해 힘껏 던졌다.
쇄액-
‘대체 어떻게? 아니 것보다….’
이종범은 날아오는 도끼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날아오는 도끼의 속도가 포탄의 속도보다 빠른 터라 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혈교에게 받아낸 무공조차 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령관님!”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귓속을 앵앵 울렸다. 도끼가 회전하는 모습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대면한다는 주마등인가 싶기도 했다. 회전하는 도끼날이 당장 몸을 분쇄할 것처럼 근접해 왔다. 이 부장은 곧 다가올 죽음을 직면하고자 눈을 부릅떴다. 그때.
깡-
살점 터져 나가는 소리 대신 격한 쇳소리가 지휘부를 울렸다.
“…늦었다.”
이 부장은 아무렇지 않게 안경을 고쳐 쓰곤,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대검을 든 남자의 등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그 속에서 살아 나온 건지.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얼마 전 반쯤 체념해 메달로 연락을 보냈는데 받았을 땐 큰 짐 하나 덜어 낸 기분이 들었었다.
“얼씨구?”
민성은 검과 맞닿은 도끼를 옆으로 쳐 내며 피식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 한껏 휴식을 즐기던 중에 와 줬건만 고마운 줄을 모른다. 물론 추가 보상을 내걸지 않았다면 올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불만 없애면 알아서 한다고 자신만만하게 굴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변수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상정 외였다. 저쪽이 숨겨 둔 패를 꺼냈으니 이쪽도 사용한 패를 다시 사용할 수밖에 없지.”
빈정거림에 가까운 민성의 물음에 이종범은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뭔데? 저 양 머리라도 따 주면 돼?”
전장으로 시선을 돌린 민성은 어느새 도끼를 쥐고 있는 발로그를 응시했다.
[설마 내 일격을 받아치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꽤 재미있는 놈이군.]
발로그 또한 흥미로운 눈으로 민성이 있는 곳을 노려봤다. 콧김을 씩씩 뿜어 대는 것이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돌진해 올 것 같았다.
“저놈이 이 사태의 원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책도 아니다.”
“뭐?”
[다음에는 먼저 네놈 목부터 따야겠어.]
민성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발로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봤으니 알겠지만 저 악마는 놈들이 소환해 낸 것 같다. 일정 시간 동안 난동을 부리고 사라지는데 덕분에 애먹고 있지.”
“그럼 지금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그렇게 단순히 해결될 일이었으면 다시 부르지도 않았겠지?”
민성은 허겁지겁 퇴각하는 병력들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일반적인 스킬과 달리 재사용 시간이 없는 스킬 혹은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았다.
“맞다. 출현 시간이 일정치 않아. 그 덕에 이미 일개 연대가 괴멸했다.”
거기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에 돌격 명령을 내리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일단 재정비가 필요하니 이후 얘기는 막사에서 하지.”
이종범의 제의에 민성은 순순히 뒤를 따랐다. 그로서도 정보가 있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틀간 민성이 한 일은 병사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나눈다거나 아직 남아 있던 능력자들에게서 잡다한 정보를 얻는 일이 전부였다.
‘결국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나?’
민성은 부상자들을 잔뜩 태운 수송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발로그에 대한 정보라고 해 봐야 압도적인 힘 정도뿐이었다. 혼자 움직일까 고민도 했지만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접 맞닥뜨렸으니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다. 저 악마만 어떻게든 해 주면 된다.”
막사로 돌아온 이 부장은 뒤따라 들어오는 민성에게 곧장 용건을 말했다. 올해 내로 토벌을 끝내기 위해선 민성의 도움이 필요하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평상시라면 거래나 심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 싸움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만큼 급했고 절박했다.
“급한 건 알겠는데 그 말 지킬 자신은 있어? 사전에 약속했던 아이템들이나 받으면 다행인 것 같은데.”
민성의 물음에 이 부장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많은 게 바뀔 거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아.”
“그럼 저희는 돌아가도 될까요? 어차피 저 양반이 다 할….”
“무단이탈은 군법에 따라 사형에 처할 생각인데. 괜찮겠지?”
이종범의 물음에 자신 있게 끼어들었던 명철은 입을 꾹 닫았다. 정말 등을 보이기라도 했다간 등짝에 총알을 쑤셔 박을 인물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도망 다니면서 사는 건데.”
“도주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할 텐데요. 그깟 매료 능력으로 가능하겠어요?”
귀부인의 상냥한 질타에 명철은 반박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총도 무서웠지만 낫도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확실하게 처리해 줬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지?”
“약속이나 잘 지켜.”
이 부장의 물음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빨리 끝내려면 일단 안에 처박혀 있는 놈들을 끌어내는 게 좋겠지.’
“소환, 무할름.”
민성이 중얼거리자 그의 손에 박힌 보석에서 빛이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불렀군. 그래서 이번엔 또 뭔가? 이번엔 미디움 레어로 만들면 되나?]
“어… 어?”
갑자기 불의 거인이 튀어나오자 군인들은 놀라 무기를 쥐거나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미 한번 대면했던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 보고 있었으면서 뭘 물어봐? 네 신도들이 말썽 부리는데 네가 싼 똥은 네가 처리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민성은 무덤덤하게 무할름을 대했다.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명색이 대악마다. 저속한 단어로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무할름이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민성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말한 대로 움직여. 잘 따르면 생각해 볼게. 대신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땅속에 처박아 버릴 거니까 잘 행동해.”
[…알았다. 그래서 뭘 하면 되는가?]
민성은 무할름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무할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