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295화- 노블레스 오블리주
“냥냥냥냥.”
때마침 집 안을 청소하던 하급 고양이가 바닥에 엎어진 무할름을 보곤 수염을 씰룩이며 지나갔다.
[하등한 생물 따위가 감히….]
“하등한 생물이 너보다 일 잘하는 건 알아? 에휴. 모처럼 불 향 나는 생선구이 좀 먹어보려 했는데, 점심 먹기는 글렀네. 그건 네가 먹어. 난 나가서 먹어야겠다.”
민성은 숯덩이가 된 고기를 무할름에게 툭 던지곤 마당을 빠져나갔다.
[젠장!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군.]
무할름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내팽개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대악마인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 인간의 시간은 짧다. 조금만 견디면 된다. 조금만….]
무할름이 혼자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키던 찰나,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주인이 나가면 따라 나와야지. 안 와?”
[…간다.]
민성의 부름에 무할름은 정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속내와 달리 몸은 홀린 듯 민성의 뒤를 쫓았다.
*
비밀스러운 집을 나와 민성이 이동한 곳은 신과 아루가 관리 중인 건물이었다.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민성은 건물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무슨 일인데 사람이 이렇게 모여든 겁니까?”
민성은 허름한 옷차림을 한 남자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
“왜 모이긴? 감자죽이라도 얻어먹으려 온 거지. 댁도 그러려고 온 거 아뇨?”
며칠이고 배를 곯은 탓인지 남자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민성은 아랑곳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정부가 배급하는 걸론 부족합니까?”
자각사에서 식량 지원에 나선 이후로 배곯는 사람들이 꽤 줄어든 걸로 알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한결 넉넉해진 군부대 보급만 봐도 식량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부족? 그걸 말이라고 해? 입이 몇인데 당연히 부족하지! 그나마 이번 겨울만 넘기면 좀 나아질 거라는데 그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원.”
남자는 방송서 들은 정보를 들먹이며 한숨을 내쉬다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커다란 국 통 등을 들고 건물서 나오는 무리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 안에는 신과 아루도 함께였다.
“배급, 시작.”
“저부터 주세요! 우리 애가 며칠째 밥도 못 먹고 있어요.”
“헛소리하지 마! 누군 입이 없는 줄 알아? 비켜!”
신이 국 통과 대형 솥 등의 배치를 끝내고 소리치자, 사람들은 먼저 배급받고자 격한 몸싸움도 마다치 않았다.
“질서 유지. 거부 시 배급 차단.”
그러나 신의 차가운 한마디에 사람들은 온순한 양이 되어 줄을 섰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얼마 전 이들의 아지트를 방문했을 때, 신이 남은 식량의 처분 여부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좋을 대로 써도 괜찮다고 하니 신은 선전용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내보였었다. 그땐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납득이 갔다.
“다음부턴 좀 더 갖다줘야겠어.”
어차피 식량이라면 썩을 정도로 남았다. 조금 더 나눠 준다 한들 티도 안 난다. 다만 그 결심이 흔들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도.”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민성 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이 죽 그릇을 나눠 주자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뭐?’
민성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하지만 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음식으로 장난질하는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라더니. 아, 이건 장난이 아니라 현혹이군.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인간의 특징인가. 정말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시끄러워.”
손등의 보석이 웅웅거리자, 민성은 보석을 가볍게 내려치곤 배급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배급이 끝나자 민성은 자리를 정리하는 신의 곁으로 다가갔다.
“꽤 재밌는 걸 생각했네.”
“왔어? 안 그래도 배식 중이었는데. 밥 먹을래?”
민성을 본 아루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민 그릇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는데.”
“기왕 남는 거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제안해 봤어. 혹시 기분 나쁘면 그만둘게.”
민성이 묘한 미소를 짓자, 아루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했다.
“아냐. 먹고 남은 건 너희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고 했잖아. 괜찮아. 잘했어.”
민성은 서둘러 아루를 안심시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는 밝은 미소로 응답했다.
“근데 저 기도 같은 건 뭐야?”
“응? 아 그건….”
“식량 제공자에게 감사의 기도, 당연한 수순.”
아루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와중, 신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민성이 기도에 대해 묻자 신은 공짜로 음식을 받았으니 제공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다만 제공자가 자리에 없으니 기도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감사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기도는 좀 그런데.”
“당연한 수순.”
신이 양보할 기색이 없자, 민성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 적당히 생색낸 것뿐이지 사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관리된 민심이 언제고 득으로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편할 대로 해. 아, 그리고 추가 보급품 가져왔어.”
민성은 아이템 창에 넣어 놨던 포대 자루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멀리서 보면 작은 방공호처럼 보일 정도로 자루를 꺼내고서야 손을 멈췄다.
“다음엔 더 가져올게.”
“매번, 고맙다.”
신은 그득 쌓인 자루들을 훑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제공자 도착! 감사의 인사!”
신의 우렁찬 소리에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허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신을 제지하려던 민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감사에 놀랐다. 당연히 식량을 더 달라거나 출처를 묻는 사람이 나올 줄 알았다.
“교육의 힘.”
신은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힘이 들어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노파가 지팡이에 의지해 민성에게 다가왔다.
“할머니. 가까이 오시면 안 돼요.”
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아루는 얼른 노파를 제지했다. 하지만 노파는 꿋꿋이 민성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주름진 손으로 민성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귀중한 것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이템도, 능력이 담긴 책도 없는 저희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노파의 울먹임에 민성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녀의 붉어진 눈보다도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갔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 생각이니 잘 챙겨 드세요.”
“젊은 사람이 이렇게 훌륭할 데가….”
“것보다 아이템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민성의 요구에 노파는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하길 꺼려 했다.
“안 그래도 먹을 게 부족한데 여기도 없어지면….”
“걱정 마세요. 어떤 대답을 듣든 간에 배급은 계속할 겁니다.”
노파가 가진 불안감의 원인을 읽은 민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노파의 말은 이러했다. 자각사에서 제공하는 식량을 주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타워에서 나오는 능력자들에게 우선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마저 무상 배급이 아니라 그들이 타워에서 얻어 낸 전리품과 교환한다고 했다.
‘어쩐지 보상을 세게 건다 싶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뭐,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꽤 매력적인 제안이겠지. 강탈하는 것보다 합리적이기도 하고.
민성은 안전지대가 없던 시절을 떠올리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부 쪽의 행동치곤 꽤 신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보다 배급량이 줄어들었겠군요.”
“말도 마세요. 거의 반토막이 됐어요.”
노파는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애꿎은 땅을 지팡이로 내려찍었다.
‘일단 안전지대로 가서 상황을 보는 편이 빠르겠지.’
안 그래도 며칠 전 차원 전쟁이 발발했다고 했으니 직접 확인하기에도 시기가 좋았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오히려 저는 보급량을 늘릴 계획입니다. 언제든 오셔서 식사하고 가세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민성은 몸을 잘게 떠는 노파를 끌어 안아 주곤 그녀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노파가 저만치 멀어지자, 아루는 걱정스럽게 민성을 쳐다봤다.
“배로 늘린다고? 지금 가져오는 것도 적지 않은데 괜찮겠어?”
감사는 잠깐의 여운 정도지만 원망은 오랜 추억과 같다. 자칫 민성이 식량을 가져오지 못하기라도 하는 날엔 저들의 감사는 깊은 원망으로 바뀔 것이었다.
“괜찮아. 품질 떨어지는 게 좀 늘긴 하겠지만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야.”
민성은 두리번거리며 건물을 둘러싼 사람들을 눈대중으로 셌다. 폐기 처분하던 잡어와 뭉개진 감자를 활용하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것보다 앞으로 외관 멀쩡한 건 최대한 쟁여 놔 봐.”
“무슨 뜻?”
민성이 의미심장하게 지시하자 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할머니가 하는 얘기 들었지? 아마 정부가 타워에서 나온 생존자들 상대로 장사하는 것 같은데, 너희도 옆에 껴서 한몫 챙기라고.”
타워의 물품과 식량의 교환. 언제고 식량 생산량이 늘면 사라질 교환 방식이다.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확실치 않은 정보니 직접 타워 쪽으로 이동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아!”
민성의 말에 신과 아루는 이해했다는 듯 눈을 빛내면서도 의문을 내비쳤다.
“근데 우리가 거래해도 괜찮아? 주인은 엄연히 너잖아.”
“말했잖아. 좋을 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이미 내 손을 떠난 물건들이야. 그리고 내 손에 있어 봐야 거름밖에 안 돼. 가치 떨어지기 전에 얼른 팔아서 건물 지키는 애들 2성짜리 아이템이라도 하나 쥐여 주던가 해.”
민성은 그들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곤 곧장 타워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품속에서 웅웅거리는 느낌이 들자, 민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빛 기운이 맴도는 메달을 꺼냈다.
[왜 또? 뭐? 그건 또 뭔 헛소리야. 나머지는 알아서 한다며? 아니, 그만큼 해 줬으면 됐지 내가 얼마나 더 해 줘야 되는데? 하… 일단 갈 테니 얼굴 보고 얘기합시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루는 민성의 구겨진 얼굴을 보곤 걱정스러운 마음에 질문했다.
“아, 물건 받아야 하는데 배달원이 강도를 만났다고 하네. 아무래도 직접 받으러 가야 할 것 같아서.”
민성은 피식 웃으며 아루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아, 아파!”
“어쨌든 식량은 걱정 말고 팍팍 써! 알았지?”
“긍정적 현상. 수용.”
신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꼬집었던 볼을 놓으며 자리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