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294화- 무할름(6)
“아닙니다! 여러 초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온 걸로 보아 틀림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설마. 아니, 그럴 리 없겠지.”
엊그제 불길의 확산으로 잃은 능력자들 중 민성이 껴 있었단 사실을 알고, 이 부장은 남몰래 꿍쳐 놨던 술잔을 기울였었다. 개인주의의 극을 달리는 놈이지만, 놈 덕에 불리한 형세를 뒤집은 판도 많았으니 말이다. 한 잔의 술은 민성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임무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그의 미래를 애도하는 잔이기도 했다.
“만약 보고와 다르면 군법 회의에 넘겨 버릴 거라고 전해.”
이종범은 보고한 장교에게 엄중히 경고하며 서둘러 막사를 나왔다. 그리곤 미친 듯이 경계지로 달려갔다.
“정말이었군. 정말이었어.”
초소 인근에 도착한 이종범은 헛웃음을 흘리며 전방을 바라봤다. 캄캄하다. 큰 불길 탓에 대낮처럼 밝았던 경계지부터 맨살을 내보이던 벌판까지 모두 어둠에 묻혀 있었다.
“지금 당장 병력들 기상시켜! 사령관들한테도 무전하고!”
이 부장은 뒤따라온 장교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놓치는 불상사는 없어야 했다.
“당장 전파하겠습니다!”
“아직 운이 다하진 않은 건가.”
이종범은 잠시 어둠 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다 달려가는 장교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간부들의 사나운 고함 소리가 잠든 주둔지를 깨웠다. 병력들은 전투 준비 태세 명령이 떨어진 지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준비를 끝마쳤다.
“전군, 전진!”
군부대는 신속하고 맹렬하게 나아갔다. 이윽고 경계지 너머 목표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고기 알처럼 한데 모인 목표물들이 군부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구더기 새끼들처럼 득실득실합니다.”
“당장 전차장들 보고 따로 명령하기 전까지 발포하라 그래.”
이종범이 눈에 대고 있던 야간 투시경을 떼기 무섭게, 곳곳에 자리 잡은 전차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쾅-
포격 소리가 천둥처럼 어둠 속을 울렸다. 땅이 패고 건물이 깎여 나갔다. 포탄의 범위 내에 있던 도마뱀들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저주다! 무할름 님께서 분노하셨다! 도망쳐!”
“무할름 님. 대사제의 죽음은 인간들의 만행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제발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도마뱀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렇다 할 반항조차 못 했다. 놀라 도망가거나 그저 그들의 신을 부르짖으며 포격이 멎길 기도할 뿐이었다.
“얼씨구?”
여전히 테라스에 자리 잡고 있던 민성은 여유롭게 구경하며 혀를 찼다. 가장 전망 좋은 곳이기도 했거니와 도마뱀들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 남아 있었다.
“최소한의 저항 정돈 할 줄 알았는데 아예 정신을 못 차리네.”
이종범의 결단이 빨랐다곤 해도 도마뱀들이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차라리 야구 경기를 보는 것이 더 재밌을 정도였다.
[당연한 수순이다. 과거보다 인간이 강해진 탓도 있지만 평생을 우물 속에서 산 결과다. 아무리 갖고 있는 능력이 뛰어나도 정진하지 않으면 소용없지.]
무할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그의 비호 아래서 살아간 종족이다. 입에서 불을 뿜고 전신에 불의 축복을 두른다 한들, 발전을 포기한 종족에게 미래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나저나 계속 궁금했던 건데, 명색이 악마란 놈이 뭐가 아쉬워서 도마뱀들 똥이나 닦아 주고 있었던 거야?”
[카지노 손님에게 약간의 장난질을 쳤다가 봉인되어 유배 보내졌다.]
손님이 신이었다는 뒷말에 민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쾅-
“으아아아아아!”
“살려주세요! 무할름 님! 당신의 자식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죽음 끝자락에 내몰린 도마뱀들의 울부짖음에도 둘은 눈도 깜짝 않았다.
“근데 유배지에 떨어지고 보니 도마뱀들의 거주 지역이었다?”
민성의 호응에 불의 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힘과 권능을 보여 준 것만으로 신으로 추앙하더군. 악마가 신 대접 받는 그 모순이 나름 자극적이라 꽤 즐기고 있었지. 이놈들이 옛 인간들과의 전쟁서 패배하기 전까진 말이야. 관심 있는 것 같은데. 듣고 싶나?]
“저놈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덕에 쓰레기장에 함께 딸려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히 똥 닦아 주는 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벽이 터져서 나왔다. 그 정도 정보는 이쪽도 갖고 있어.”
[… 혹시 마인드 뷰 같은 스킬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자신이 할 말을 민성이 압축해 버리자, 무할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성을 내려다봤다. 인간이 쓰레기장 일을 현지인처럼 알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아. 그런 거였나. 차기 계승자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
민성의 한쪽 눈을 뚫어지라 보던 무할름은 짐짓 납득한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끝났네.”
몇십 여분에 걸친 포격이 끝나고 병사들과 장갑차들이 시가지로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 차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이제 우리가 알아서…”
탕-
도마뱀들은 뒤늦게 정비하고 반격해 보려 했다. 하지만 단단한 외피도 불같은 저항도 총알 앞에선 무기력해졌다. 이제 저들은 죽임 당해 에너지 스톤을 뺏기거나, 실험재료, 혹은 괴수 관찰소에 끌려가 일생을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너희들의 세상으로 넘어온 주민들을 죽이고 인간들의 영웅으로 등극할 건가? 아니면 수많은 미녀를 끼고 방탕한 생활을 즐길 건가? 어느 쪽이던 도와주지.]
무할름의 물음에 민성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너무 협조적인데? 무슨 꿍꿍이야?”
[어쨌건 네게 졌으니 약속을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네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을 것 같거든.]
“그래? 굉장히 바람직하긴 한데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빈둥거릴 건데?”
[그 또한… 뭐?]
불의 거인이 어처구니없이 바라봤지만 민성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 놓고 요리에 종사하겠지.’
어차피 이종범에게서 보상을 받으려면 기다려야 할 터였다. 토벌을 마무리 짓고 전후 처리에도 시간이 들 것이고,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국가를 위하는 마음은 없으나 국가가 안정돼야 그에게도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따라야겠지.]
무할름은 나지막이 한숨 쉬며 보석을 들어 민성의 손등 위 문양에 올렸다. 그리곤 연기가 되어 보석 속에 빨리듯 들어갔다. 그러자 민성이 위치해 있던 타워가 밑층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또한 무할름이 임시로 만든 건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이 안에 들어가 네 행동을 관전하겠다.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부르면 된다.]
“그건 마음에 드네. 아이템 확인.”
진노의 봉인석
설명: 제42 위계 악마 무할름이 봉인된 보석이다. 한때 유명한 카지노 관리자였던 그는 얄팍한 사기로 신의 진노를 사 봉인되고 말았다. 비록 봉인되어 힘은 다소 줄었으나 지옥의 업화를 다루던 악마가 들어 있는 만큼 주의를 요망한다.
등급: ★★★★★★
능력: 시전자가 원할 시, 무할름을 소환할 수 있다(다만 굴복, 혹은 계약하지 않는 이상 무할름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쁘진 않네. 앞으로 고기나 굽게 할까.”
민성은 천천히 설명을 읽어보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공짜 노동력을 얻었으니 꽤 만족스러웠다.
‘이제 돌아가 볼까.’
“유령출몰.”
투명화된 민성은 테라스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민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마뱀들과 인간들의 고함과 아우성만이 남아 맴돌았다.
*
11월 30일, 서울의 제7 난민 보호소 안. 보호소라고 해 봐야 대형 돔 구장을 임시로 개편해 사용 중이었지만 다른 보호소에 비하면 꽤 양호한 편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길고 길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식량은 부족하고 따시게 등지질 집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고난을 함께 이겨 내야 합니다.]
구장 안의 스피커에선 박정후의 강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겨울이 오긴 오는구만.”
“후… 그러게. 날이 갈수록 배급은 줄어드는데 버틸 수 있을까?”
보호소에 들어오기 전보다 여윈 사람들은 음성에 귀 기울면서도 담소를 나눴다.
“자각사에서 지속적으로 식량 지원해 준다더니 다 어디로 간 건지. 이러다 굶어 죽는 건 아니겠지?”
누군가의 처량한 음성에 잠시 대화가 중지됐다. 막연한 불안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탓이었다. 그들의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는 잠정적 아사자들이 가장 높은 해로 집계됐다. 다만 정부의 정보 통제 탓에 일반 시민들은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 충청권까지 회복하면 내년부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정부도 생각이 있으면 군인들 활용해서 농사일시키겠지.”
한 남자의 넋두리에 주변 사람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달 전, 이종범의 출병 소식은 보호소 내에서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그 드넓은 땅을 잘 활용하면 지긋지긋한 식량난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나야 괜찮다지만 이 녀석은 한참 먹을 나이잖아.”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잠든 아들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앙상하게 변한 손마디가 모두 그의 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무료로 식량을 배급해 주는 곳이 있다던데. 나중에 아들놈 데리고 한번 가 보는 건 어때?”
“뭐?”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홱 돌리자, 말을 꺼낸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에 용접 나갔다가 들은 거긴 한데 확실한 건 아니야.”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그게….”
같은 시각, 비밀스러운 집 안.
“젊었을 때 놀고먹어야지 늙어서 놀려면 힘이 없나니.”
민성은 뒷마당에 설치한 해먹 위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거렸다. 한동안 고생하고 왔으니 당분간은 이 여유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하늘도 맑고 공기도… 야! 내가 먹을 걸로 장난하지 말라고 했지?”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찔러오자 민성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석쇠가 놓인 마당을 째려봤다.
[그게… 내 잘못이 아니다. 재료가 불길을 감당 못 하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석쇠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불의 거인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반박했다. 그러나 민성에게 통할 턱이 없었다.
“그럼 불 조절을 잘해야 할 거 아냐! 얼씨구? 아주 숯을 만들어 놨네. 명색이 악마란 놈이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해?”
혀를 차던 민성은 시커멓게 타 버린 생선의 꼬리를 잡고 무할름의 몸을 후들기기 시작했다.
치익-
[그… 그만! 내가 잘못했다! 더 조심해서 구워 보겠다! 그러니 그만 때려라!]
신체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무할름은 악다구니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음식 귀중한 줄 알아야지. 다 내가 피땀 흘려서 얻어 낸 거야.”
정확히는 하급 고양이들이 수확한 일부였지만 어쨌든 돈 주고 부리는 거니 그의 피땀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