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292화- 무할름(4)
“그래도 머리 돌아가는 놈이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네요.”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귀부인은 그들 곁으로 다가와 혼절한 명철의 배를 걷어찼다.
“컥!”
명철이 고통에 바닥을 굴러다녔지만 그녀는 눈도 꿈적하지 않았다. 외려 민성에게 다가가 꽁꽁 묶인 몸을 바싹 가져다 댔다.
“뭐 하자는 건데?”
민성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무시하며 귀부인을 내려다봤다.
“도주까지 책임져 달라는 소리는 않을게요. 적어도 이 끈만이라도 풀어 주시겠어요? 아니면 줄에 묶인 여자를 감상하는 게 취미신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귀부인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자, 민성은 그녀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만약 저쪽 필드로 넘어갔는데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라면 저 도마뱀 떼거리를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저놈들을 풀어 주면 시선 돌리기론 충분하겠지?’
잠깐의 고민 뒤, 민성은 지팡이를 들어 사람들의 몸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만약 살아남게 되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전경민은 허리 숙여 보이곤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는 명철을 둘러메고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넌 안 가?”
민성은 낫을 챙겨 들고 멀뚱히 서 있는 귀부인을 바라봤다.
“왜요? 꼭 가야 되나요? 저는 오히려 당신 옆에 붙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귀부인은 민성의 팔을 꼭 붙들고 빙긋 웃어 보였다.
“글쎄. 난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서.”
민성이 무뚝뚝하게 귀부인의 팔을 털어 내려는 찰나.
띠링-
[대기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필드, 불의 신전으로 이동합니다.]
지팡이에 박힌 보석에서 맹렬한 빛을 쏟아 내며 민성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맹렬하게 타워를 오르던 도마뱀들도, 민성의 팔을 잡고 있던 귀부인의 몸도 건전지가 다 된 장난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
“흠.”
한편 불의 신전으로 이동된 민성은 내부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름과 달리 신전 안은 삭막하고 고요했다. 흔한 횃불조차 보이지 않았다. 신전 안을 맴도는 무거운 공기가 폐부를 짓눌러오는 것 같았다.
‘신전이라기보단 방치된 집 같은데.’
천장은 시커먼 덕에 확인이 어려웠지만 카펫 같은 것이 깔린 바닥은 잘 보였다. 민성이 어둠에 익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와중, 어둠 저 너머에서 두꺼운 음성이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군.]
화륵-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불길이 거칠게 치솟았다. 주변이 밝아지자 민성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 거인.
대사제라던 놈이 소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부지고 커다란 몸. 고급 모피 코트처럼 전신에 두른 불도 여전했다.
“그쪽이 밖에 불 싸지른 악마입니까?”
민성은 단단한 벽처럼 둘러싼 불길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싸질러? 하하하하하. 아, 딱 보니 네가 장난질로 지옥 불을 넘어온 인간이로구나.]
민성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불 거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과 달리 거인의 눈은 싸늘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좋지만 일개 지배자의 피조물이 제 분수는 알고 있어야지? 헬 파이어.]
민성은 거인의 손에 들린 검은 불 구체를 보곤 직감했다. 저건 받아칠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이 아니다.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자신감만큼 실력도 출중한지 보여 주거라.]
거인 손에서 떠난 검은 구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민성에게 날아왔다.
“젠장.”
민성은 낮게 욕지기를 뱉으며 구체서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추적 효과라도 있는 것인지 좀처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건가?]
거인의 심드렁한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구체는 방 중심부에 꽂혔다. 그러자 구체가 터진 자리서 물속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퍼지듯 검은 불길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영혼까지 녹여 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몰아쳤다.
[지옥에서 끌어온 불치곤 따듯하지 않은가?]
“따듯하긴 개뿔. 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손님 대접 한번 거하게 하시네.”
민성은 뱀의 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불길을 피하며 무할름을 노려봤다.
[손님? 하등한 피조물을 손님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부르질 말든가. 강제로 불러놓고 아주 지랄을 하네. 미친놈한텐 이게 약이지. 뇌신화.”
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파직-
[재밌는 능력을 갖고 있었군.]
무할름은 간헐적으로 튀는 스파크에 흥미를 보였다. 아마 전격 계열의 능력으로 보이는데 참으로 보기 드문 계통이었다.
“끝까지 재밌었으면 좋겠네. 바람을 타다.”
[음?]
갑자기 민성이 사라지자, 불의 거인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민성의 존재감은 느껴지지만 어디서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이 공간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그를 맹렬히 추격하던 지옥의 불길조차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듯했다.
픽-
배에서 울리는 묘한 소리에 무할름은 고개를 내렸다. 깊게 찢겨 나가 덜렁이는 살점이 보였다.
[하하. 얼마 만의 상처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깟 상처쯤은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
여유롭게 웃으며 회복의 불을 사용하려던 무할름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악마는 온몸이 마나로 구성돼 있어 체력이랄 게 없다. 한마디로 복부가 갈라진 모습도 일종의 쇼일 뿐, 물리적인 공격 자체가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그나마 효과 있는 마법도 디스펠과 강력한 실드로 항시 방비하고 있었다.
치익-
그러나 수많은 대비책들이 무색하게 이번엔 양쪽 다리에서 고기 굽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크흡.]
순식간에 3분의 1에 가까운 마나가 빠져나갔지만 무할름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원래는 적당히 괴롭히다 계약해 줄 생각이었지만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놀아 주려 했더니 안 되겠구나! 파이어 레인!]
무할름이 스킬을 시전하자, 천장서 주먹만 한 불덩이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만 어쩔 수 없지.]
불의 거인은 불길로 발 디딜 곳 없는 신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안도했다. 신에게 반기를 든 죄로 보석 안에 갇혀 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서열 42위 악마다. 한낱 인간에게 죽기라도 하면 이보다 창피하고 굴욕적인 일은 없을 것이었다.
치익-
[음?]
하지만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끊겼어야 마땅한 소리가 가슴에서 들려오자, 무할름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민성이 강화로 떡칠한 코트와 50% 확률로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 스킬, 그리고 마법 저항 스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할름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망했다.
무할름은 애써 몰려오는 고통을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방금 타격으로 이미 반이 넘는 마나가 빠져나갔다. 이대로라면 민성을 불태우기 전에 마나가 홀라당 타 버려 죽을 것이다.
‘아, 그래! 그 수가 있었지!’
죽을힘을 다해 민성의 공세를 피하던 무할름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좋아. 여기까지. 시험은 여기까지다.]
거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전을 뒤덮었던 불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무슨 뜻이야?”
민성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무할름은 서둘러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소한 손님 대접 받을 실력은 갖추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제 본 게임으로 넘어가겠다는 소리다.]
“뭐?”
무할름은 민성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웅장한 신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묘한 것들이 대체했다.
“카지노?”
민성은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을 주시했다. 카드를 쥐고 눈치를 살피는 임프부터 상대방의 칩을 쓸어 담는 발록 등, 영락없는 카지노의 모습이었다.
[맞다. 내가 과거 운영했던 카지노의 모습을 잠시 마법으로 구체화시킨 거다.]
“갑자기? 왜? 계속 싸우자니 질 것 같아서 종목을 바꾼 건가?”
민성은 픽 웃으며 무할름에게 쇄도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날은 놈의 몸에 닿기도 전에 투명한 장벽에 막히고 말았다.
[카지노 안에서 전투는 금지. 내가 만들었던 룰이지. 네가 아무리 공격하려 해 봐야 소용없다.]
“죽이긴 어려우니까 도박장으로 도망가시겠다? 이거 웃긴 놈이네.”
민성이 천천히 대검을 거두자, 무할름은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룰 따윈 없었다. 그저 실드를 최대한 중첩시키고 민성이 속기를 기도했는데, 잘 먹힌 듯 했다.
[손님 대접 받을 자격이 있는 걸 확인했으니 방식을 바꾼 것뿐이다. 이제 본 게임으로 넘어가려 한다만 응하기 싫다면 포기해도 좋다. 지금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밖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꺼져. 그냥 빨리 꺼져!’
한시라도 민성을 내보내고픈 속내와 달리 무할름은 정중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성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지금껏 도박으로 누구에게도 져 본 적 없었으니 말이다.
“이기면 뭐가 좋은데?”
[내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하면 네 영혼을 바쳐야 한다. 그래도 응할 것이냐?]
불의 거인은 민성을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퇴로도 열어 줬고 이 정도 겁 줬으면 알아서 물러날 것이다.
“까짓거, 하지 뭐.”
[좋다, 돌려보내… 뭐?]
“하겠다고. 대신 게임 종류는 내가 정해도 되지?”
민성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지노를 돌아다녔다. 어차피 바깥의 불 장벽을 없애기 위해선 이 거인과 승부를 봐야 했다. 게다가 이미 게임에는 이골이 난 몸. 외려 이런 제안을 한 무할름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
무할름은 그런 민성의 등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거 간단해 보이고 괜찮네. 이걸로 하자.”
잠시 카지노를 돌아다니던 민성은 이윽고 한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다만 다른 테이블과 달리 둥근 테이블에는 카드 6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딜러 역할을 하는 임프들이 보이지 않았다.
[운명의 굴레를 골랐군. 생각보다 어려운 게임인데. 자신 있나?]
“룰이나 설명해.”
민성이 의자에 앉아 테이블을 툭툭 치자, 무할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규칙은 간단하다.]
무할름은 카드를 손에 든 뒤 불 속에 넣고 흔들었다. 그러자 불 속에서 잘 섞인 카드 6장이 튀어나왔다. 민성은 카드들을 낚아채 확인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카드 안에는 각각 노예, 농민, 기사, 귀족, 여왕, 왕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건 너희 인간들이 사용하는 카드를 똑같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양측은 카드 3장씩을 나눠 갖는다. 그리고 매 턴마다 반드시 카드 한 장을 내야 한다.]
“그게 전부야? 평생 승자가 안 나올 것 같은데?”
민성의 물음에 무할름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격이 급하구나.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카드를 내어 더 높은 계급의 카드를 낸 측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계급은 노예-농민-기사-귀족-여왕-왕 순으로 올라간다. 1게임당 3세트, 먼저 2게임을 가져가는 쪽이 승리다.]
설명을 곱씹던 민성은 무심한 눈으로 불길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