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291화- 무할름(3)
“믿기 어려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저희는 갑자기 들이닥친 파도 덕에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명철이 횡설수설하며 설명을 끝내자, 폰티우스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오호. 그러니까 우리의 신께서 고작 자연의 섭리 따위에 밀렸다는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나?”
“저…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
명철은 어색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을 말하래서 사실을 말했건만 되레 저들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뭐, 아무래도 좋다. 그 또한 위대하신 무할름 님의 뜻일 테니. 따라오거라.”
폰티우스가 등 돌려 탑의 계단을 오르자, 병사들 또한 사람들을 끌고 그 뒤를 따랐다.
화륵-
그러나 누구도 뒤편에 있는 횃불들이 차례대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음?”
다만 대열 후미에 있던 병사만이 비늘이 오싹거리는 느낌에 뒤를 살폈다. 하지만 횃불은 잔잔했고 계단에는 어떠한 흔적조차 없었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아… 아냐! 얼른 가자.”
동료의 물음에 병사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대열에 붙었다.
침묵 속에서 한참 계단을 오르던 폰티우스는 사방이 뻥 뚫린 층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끌고 온 사람들을 발코니 끝에 정렬시켰다.
“설마 내 마지막이 낙사로 끝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년 허벅지나 더 주무르다 올 걸 그랬어.”
명철은 흘낏 밑을 바라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개미 같은 것들이 득실거리는 지상은 내려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났다. 만약 여기서 떨어진다면 제 형체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얼간아.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 죽였겠지. 괜히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귀부인은 체념하여 소침해진 명철에게 조용히 쏘아붙이곤 상황을 주시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도망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전부 모였습니다.”
“좋다.”
병사의 신호가 떨어지자, 폰티우스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테라스 앞으로 나섰다.
“무할름의 백성들이여!”
“와아아아아! 폰티우스 님!”
“무할름의 대사제 폰티우스 님 만세!”
폰티우스가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모습을 보이자, 언제 집결했는지 수많은 도마뱀들이 환호성을 질러 댔다. 이십만은 족히 넘어 보이는 도마뱀 병사들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저게 다 도마뱀들이었어?”
“…….”
명철이 지상에 득실거리는 개미들을 보며 학을 떼자, 전경민 역시 멍청한 얼굴로 열기 가득한 현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조용!”
폰티우스의 벼락같은 음성에 환호성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제야 폰티우스는 조용해진 좌중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무할름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이자 동포들이여. 오늘은 무할름 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성언을 공표하려 한다.”
화륵-
폰티우스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치자,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염 덩이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화염 덩이는 곧 형태를 갖추더니, 곧 불의 거인으로 탈바꿈했다.
“오오! 무할름이시여!”
도마뱀들은 경의와 두려움을 담아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사랑하는 나의 자식들이여. 이제 때가 되었다.]
거인의 음성은 잔잔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무릇 자식이란 장성해 언제고 부모 품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나의 비호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훌륭히 성장했다.]
거인이 고개를 까딱이자, 도마뱀 병사들은 포박한 인간들이 잘 보이도록 테라스 끝에 내몰았다.
[보라. 이들은 과거 너희를 핍박하고 내몰았던 인간들이자, 우리의 가족과 땅을 약탈하고자 놈들이 보낸 척후병들이다.]
“저들로 인해 우리는 생명의 땅을 잃었다. 무할름 님의 넓은 품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복수는커녕 외부의 적에게 죽임당했을 것이다!”
폰티우스가 지팡이를 흔들며 거인의 말에 동조하자, 도마뱀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저 바싹 태워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같으니!”“더러운 인간 새끼들!”
“무… 무슨 말을!”
명철이 다급히 항변하려 했으나 목에 드리운 검날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어떤 말을 해도 저들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가 칼을 가는 동안 저들은 승리에 취해 과거를 망각했다. 인간들은 더 이상 너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아, 알았으니까 밀지 마!”
창끝의 위협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멸감에 치를 떨기보다 혹여나 테라스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스스로의 안위를 염려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지상의 도마뱀들은 폭소하며 인간들을 조롱했다.
[시국이 변했다.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그대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허락할 것이니, 밖으로 나아가 싸우고 점령하고 약탈해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무할름이여! 영원하라!
“대사제 폰티우스 님! 만세!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죽이자!”
그 말을 끝으로 거인의 형상이 사라지자, 엎드려 있던 도마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폰티우스는 인간들을 쳐다봤다.
“네놈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어.”
평화가 길어질수록 잡다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실제로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 탓에 무할름 전역에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제의 자리도 차츰 권위를 잃어가던 찰나 저들이 나타났다.
과거의 망령이자 현재의 적.
사실 저들이 정말 척후병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다만 무할름 전역에 쌓인 불만을 저들에게 돌리고 전쟁을 통해 사그라뜨린다. 이보다 좋은 계획은 없을 것이었다.
“젠장. 우리를 얼굴마담으로 사용하려고 잡아 둔 거였어?”
대강 상황을 짐작한 명철이 크게 고함쳤다. 그러나 곧 병사의 손에 입이 막히고 말았다.
“그럼 뭐 하러 너희를 살려 뒀을까. 상으로 고통 없이 보내 주마. 죽여.”
폰티우스가 심드렁하게 손짓하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커헉!”
별안간 폰티우스의 몸이 매의 발톱에 낚이듯 공중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검고 기다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상 받고 싶은데. 남는 거 없어?”
“어?”
민성이 대사제의 목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히죽이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바닥에 구멍이라도 뚫어 놨던 걸까.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기습이다! 폰티우스 님을 지켜라!”
대사제 곁을 지키던 병사들이 다급히 민성의 등짝에 창날을 쑤셔 박았다. 그러나 창날은 코트 실오라기 하나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그러자 병사들은 아가리를 벌리거나 손을 휘적거려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괜찮겠어? 대사제가 노릇노릇 구워질 텐데?”
“큭…”
그러나 민성이 대사제를 방패로 내세우자, 병사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그 틈을 이용해 민성은 날렵하게 병사 앞으로 달려가 놈의 몸을 걷어찼다.
“으아아아아악!”
반동에 테라스 밖으로 밀려난 병사는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민성은 그에 그치지 않고 테라스에 있던 병사들을 모두 밖으로 몰아냈다.
퍽-
“으아아아악!”
“낙하산이라도 챙기지 그랬어.”
민성은 바닥을 힐끗 내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도마뱀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놈들이 사태를 파악했을 땐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말이다.
“설마 구해 주러 오신 겁니까? 저는 그렇게 빈정거렸는데도?”
명철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민성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곤 고개를 돌렸다.
“어디 보자.”
민성은 폰티우스의 몸을 찬찬히 훑다가 그의 지팡이를 주시했다. 지팡이 외에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으니 아마 저것이 거인을 부른 매개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그 거인이 신성한 불이랍시고 밖에 울타리 친 놈이랬지?’
“안 된다! 감히 인간 따위가 무할름 님을 건드리려 해!”
민성이 지팡이를 빼내려 하자, 혼절해 있던 폰티우스가 버럭 소리치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응, 돼.”
민성은 피식 웃으며 대사제를 바닥에 메다꽂고 지팡이를 낚아챘다. 저리 발광하는 걸 보니 귀속 아이템은 아닌 듯했다.
“어디,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 볼까?”
민성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려는 순간, 지팡이 머리 부근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에서 음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띠링-
[제42 위계의 악마 무할름이 그대를 시험하고자 합니다. 5분 뒤, 필드로 이동됩니다.]
‘이건 또 뭔데?’
“이제 네놈은 끝이다! 네깟 놈이 감히 무할름 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놈은 영원한 업화 속에서 고통받게 될 거다. 영원히! 하하하하!”
“그래?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폰티우스가 실성한 듯 웃어젖히자, 민성도 따라 웃으며 놈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곤 테라스 끝으로 걸어갔다.
“잠깐! 잠깐! 무할름 님께서 어떤 시험을 내리실지 궁금하지 않아? 난 시험 내용을 알고 있다!”
민성이 빙긋 웃으며 손을 놓으려 하자, 폰티우스는 다급히 민성을 회유하고자 했다.
“호오. 그래?”
“그렇다! 지금이라도 날… 으아아아아아악!”
“명색이 악마 새낀데 설마 똑같은 문제를 낼까?”
민성은 거친 비명과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폰티우스를 내려다봤다. 곧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당혹한 도마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킬이 아니고 진짜 아이템의 부름이었나 보네.’
혹시나 폰티우스가 수작 부린 건가 싶었지만 정말 보석 속의 악마가 호출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뭐가?”
전경민이 어두워진 얼굴로 묻자, 민성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젠장. 도마뱀들의 머리 역할을 하던 놈인데 당연히 인질로 잡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이제 우린 망했어. 저것 좀 보라고!”
명철은 곧 죽어 가는 사람처럼 한숨 쉬며 눈빛으로 지상을 가리켰다.
“폰티우스 님!”
“대사제께서 악독한 인간들 손에 돌아가셨다! 복수해야 한다! 인간들을 죽여라!”
대사제의 죽음에 동요하던 도마뱀들이 하나둘 정신 차리고 타워로 접근하고 있었다.
“후… 이미 엎질러진 걸 어쩌겠어. 어이! 도와주러 온 김에 이것도 좀 풀어 줘. 아마 그 지팡이로 건들면 풀릴 거야.”
명철은 대사제가 반 장난삼아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리고 민성을 불렀다.
“내가? 왜?”
그러나 민성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필드 이동까지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은 3분.
‘42위계 악마라. 살다 살다 이제 악마야? 아주 재밌어.’
이미 많은 괴수들을 접했지만 악마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인간이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던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뭐라고? 이 새끼가! 지만 안 묶여 있다 이거야? 뭐 이런 이기적인 새끼가 다 있어?”
“뭐 하는 거야, 병신아! 도와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제발 뒈지려면 혼자 뒈져!”
명철이 요란하게 소리 지르자, 보다 못한 전경민이 그의 이마를 들이받았다.